회귀자 사용설명서 1060화
피크닉 (23)
“기연 씨.”
“…….”
“기연 씨가… 맞습니까?”
순간적으로,
‘김현성인 줄 알았네. 시바.’
이상하게 이기연으로 변했을 때는 이 정도 타이밍에 녀석이 등장했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김현성이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잠깐 움찔하기는 했지만 저도 모르게 쾅쾅 뛰었던 마음을 금방 진정시킬 수 있었다.
흐름상 엘리오스가 등장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현성이가 올 리가 없자너. 걔 지금 딴 거 하느라 바쁜데.’
참여형 관객들이 먼저 들어온 게 좀 의외기는 했지만….
엘리오스와 조혜진 역시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사막 엘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든지, 길눈이 밝은 엘리오스가 제 발로 걸어왔다든지….
아니면 다른 레인저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녀석이 제 발로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는 것을 녀석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연 씨….”
“…….”
“기연 씨.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말투 진짜 비슷하네.’
“기연 씨… 접니다. 기연 씨….”
한없이 다운되어 낮은 톤의 소리가 들려오니 왠지 모르게 말투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기본적으로 둘의 목소리는 다르다. 이 엘프의 목소리가 너무 느끼하고 거북한 치즈 같은 느낌이 있다면 김현성의 목소리는 왠지 모를 청량감이 있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
둘의 성격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목소리에서도 확실히 차이점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밀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림자가 걷히면서 드러난 것은 엘프다운 훤칠한 외모. 금발의 긴 머리에 약간은 부담스러운 눈빛을 가지고 있는 엘프.
평소와 같이 무감각한 표정이 아닌, 누가 봐도 절박해 보이는 표정을 선보이고 있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할 것만 같았던 녀석이었는데… 실제로 미팅 같은 데서 만나도 감정을 밝히지 않기로 유명했었는데….
‘대륙멸망 24시간 전 앞에서는 평범한 엘프에 불과하자너.’
“기연 씨….”
물론 저 얼굴이 단순히 대륙멸망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겨우 그것만 느끼라고 연출한 무대가 아니었으니까.
검은 비의 태풍을 힘들게 뚫고 당도한 곳에 위치한 고요한 공간.
깊게 가라앉은 어둠이 차지한 이곳은 이기연의 마음과 같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슬픔이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지독한 외로움만이 이 검은색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새끼는 엘프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힘들었었구나.’
“…….”
‘이 정도로… 아팠었구나.’
“…….”
‘그 밝은 얼굴 속에 이런 어둠을 숨기고 있었구나.’
“…….”
‘이기연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외로웠었구나.’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이코패스라고 부르기에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그와 같이 자리한 조혜진 역시 창백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우리 혜진이도 왔자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하다.
‘우리 혜지니.’
그녀 역시 이기연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 조혜진에 입장에서는 이기연을 처음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이기연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 대륙에서 버텨왔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처럼, 조혜진은 이기연이라는 이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쓸쓸함과 외로움에 공감해 주고 있었다.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 입술을 꽉 깨문 얼굴은 비통해 보이기까지 했다.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굳어 있는 표정은 그녀가 어떤 심정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구하기에는 늦었다. 조혜진이라면 그렇게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눈앞에 있는 여인의 심장은 뛰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혜진 자신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어둠에 좀 먹히고 있다.
저 어둠이 터져 나가기 전까지 얼마나 걸릴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현실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본다면 그녀를 배제하는 것이 가장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물론 혜진이가 이쪽을 쳐낸다는 선택지에 발을 들일 리가 없다.
조혜진은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선택에서는 이성적이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이지만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지 않을 뿐이다.
다른 길드원들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 역시, 그래서일지도 모르지.
이쪽의 상태를 살펴보던 조혜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엘리오스 님… 어쩌면 이미… 기연 씨는….”
“아니요. 아직입니다. 아직 그녀가 남아 있음이 느껴집니다.”
“네?”
“제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분명히… 느껴지고 있습니다. 저 안에 보이는 것은 틀림없이 기연 씨일 겁니다.”
운명의 붉은 실.
‘아아… 아아아….’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우리의 붉은 실.
‘아직까지… 아직까지… 잊어버리지 않으셨군요. 엘리오스 님.’
녀석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에는 붉은 실이 이어져 있다.
평소라면 틀림없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엘리오스가 운명의 여신이 이어준 실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기적이 등장하기 마련, 아마 이것이 기적이었을 것이다.
엘리오스가 아직까지 자신과 이기연 사이에 붉은 실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는 것은 틀림없이 엘룬의 축복으로 일어난 현상이었을 것이다. 엘리오스는 똑똑히 목도하고 있었다.
‘보이지?’
위태롭게 서 있는 여인과 자신의 인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음을.
둘의 운명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을.
왈칵.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 오랜 영겁의 시간 동안을 넘어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음을.
“저분께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혜진 씨.”
“…….”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인연인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은 붉은 실로 이어져 있다고… 그리고… 자신과 제가 붉은 실로 이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엘룬 님을 통해, 엘룬 님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와 제가 이상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붉은 실이라는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
“한데… 한데 지금은 보이는군요. 이상한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눈에… 붉은 실이 보이고 있습니다.”
“…….”
“그녀와 제가… 이어져 있음이… 제 눈에 보입니다. 그녀와 제 손에 붉은 실이 이어져 있음이 똑똑히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미친 것이 아니라면….”
이 쓰레기 새끼.
“아니요. 엘리오스 님께서 보고 계시고 있다면 정말로… 붉은 실이 존재하는 것이겠죠.”
“사실 아직도 제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그녀와 제가 붉은 실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지만… 제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지, 그녀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습니다. 솔직한 제 심정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직도… 조혜진 님을….”
이 새끼. 진짜 나쁜 놈이야.
“조혜진 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오스는 차마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염치가 있으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조혜진이 지 좋다고 따라다닌 것도 아니고 지가 혜진이가 좋다고 따라다닌 것이 아니었던가.
오랜 시간 동안의 열렬한 구애가 끝이 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어떻게 조혜진에게 전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은근슬쩍 분위기가 좋아지려고 하는 이 타이밍에 어떻게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아주 끝까지 비겁해.’
차마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못하자. 이야기의 결론을 낸 것은 다름 아닌 우리 혜진이.
혜지니는 엘리오스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엘리오스 님.”
“…….”
“저는 이런저런 것들을 잘 모르겠지만… 인연의 붉은 실이니, 운명이니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지금 엘리오스 님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저분이라는 걸 말입니다.”
“…….”
“엘리오스 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저분입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조혜진의 표정에 큰 변화는 없다. 인연의 끝이 온다는 것에 조금 허망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내 착각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엘리오스에 대한 실망감이나, 인연을 놓쳤음을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아마 저게 당연한 반응이겠지.
이기연에 대한 걱정, 그리고 이 작은 사건이 해결되어 행복한 결말을 맞았으면 하는 마음밖에는 없어 보인다.
그녀는 해피엔딩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해피엔딩은 아닐지도 몰라도 이 이야기의 끝이 옳고, 좋은 방향으로 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기회자너.’
엘리오스는 뒤를 돌아 조혜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녀석은 조심스레 조혜진을 껴안기….
‘이 시바 새끼.’
아니야. 욕할 게 아니지.
‘얘가 그래도 강단이 있었던 건가.’
운명의 붉은 실이니, 대륙의 멸망이니 하는 사소한 것들은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한 것일까.
다른 모든 것들은 전부 상관없이, 조혜진 하나만을 위하며 살겠다고 결심한 것일까.
정말로 마음을 바꾸고 엘룬의 뜻에 반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일까.
조혜진을 품에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엘… 엘리오스 님? 지금… 대체….”
짧은 시간이 지난 이후, 드디어 녀석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
“죄송합니다.”
“…….”
“정말로… 죄송합니다.”
‘기대한 내가 병신이었자너.’
원래 이런 놈이었자너. 운명에 굴복하는 엘프였자너.
“아니요. 엘리오스 님께서 죄송하실 필요 없습니다.”
“…….”
“그저 시기가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뿐이었으니깐요. 조, 조금 진지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기도 했었지만… 오히려… 속이 시원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역시 이런 연애는 저랑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네요.”
“그런 것이….”
“이제. 갑시다. 엘리오스 님. 저희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 이제 엘리오스 님과 저분의 이야기를 쓰러 갑시다.”
조혜진은 창을 들어 올렸다.
“…….”
동시에 엘리오스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들어 올린다.
악신 겔라에게 몸을 빼앗긴 이기연의 눈이 떠진 것은 바로 그때.
그 직후, 검은 짐승들이 이 땅을 침범한 이들에게 경고장을 보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으르렁거리며 이쪽을 보호하듯 둘러싸기 시작했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네.”
“엘리오스 님께서는 저분에게 닿는 것을 최우선으로 움직여 주십시오.”
‘울 혜지니. 너무 멋있다.’
“와라. 검은 짐승들아.”
그리고 그곳에,
파란의 신창이 강림했다.
‘혜지니. 너무 멋있다. 누나. 누나도 이거 보고 있지?’
-우리 혜지니 진짜 멋있다. 그렇죠? 오빠. 왜 신창이라고 불리는지 알 만해요.
이 누나 이럴 때는 또 몰입 깨는 것 봐.
그 말 그대로,
날이 선 신창은 목표물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