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61화
피크닉 (24)
‘진짜 멋있기는 해.’
그야말로 일기당천.
천하무쌍.
-이거 꼭 녹화해 주세요. 오빠.
‘진짜 너무 멋있기는 해.’
전투는 그녀가 희생과 부활의 신에게 받은 창을 소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저거 내가 준 창이야. 누나.’
-저 손목보호대 제가 선물한 거예요.
이곳에 나타난 검은 짐승들은 참여형 관객과 이지후가 상대하고 있는 놈들과는 질이 다르다.
많이 쳐줘 봐야 영웅 등급, 희귀 등급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던 짐승들과는 다르다.
이기연을 보호하려는 짐승들은 한때 악신이라 불렸던 겔라의 하수인이라는 이름에 부족하지 않은 능력치와 흉폭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 한 자루로 녀석들을 상대하고 밀어붙이고 있는 조혜진의 능력은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한 자루의 날카로운 창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조혜진의 창술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깔끔하고 절도 있는 지르기 한 번에 괴물들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터져 나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발 구르기 한 번에 놈들이 튕겨 나간다.
거리를 만든 이후에는 다시금 찌르기, 가장 먼저 자신을 덮친 녀석은 무언가를 해보지도 못한 채로 허물어지고, 그 뒤에 따라 들어온 녀석 역시 머리에 구멍이 생기며 흩어진다.
창이 닿지 않거나, 휘두르기 어려운 거리라는 것은 애초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녀의 창은 단·장거리를 가리지 않는다.
중거리에서 가장 활약할 수 있는 무기가 그녀의 손에 의해 결점이 없는 무기로 재탄생되는 순간은 놀라움을 넘어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
곱게 묶은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한 발자국, 아니, 두세 발자국을 전진했고, 그녀의 땀이 뺨을 타고 턱 끝으로 떨어질 때마다 짐승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 간단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일기당천이라는 표현 이외에 어떤 표현이 더 필요할까.
‘난이도 너무 낮은 거 아니야?’
[그, 그럼 조금 더 난이도를 높이겠습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위기라는 것을 직감한 검은 짐승들은 울부짖으며 서로의 몸을 합쳐 새로운 짐승을 만들었지만.
‘어? 어? 혜진이 다친다. 혜진이 다치잖아아! 혜진이 다치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지금….]
‘아니. 아니다… 아니야. 혜지니 안 다쳤어.’
종이 한 장 차이.
그녀가 짐승들의 공격을 피하는 데 사용한 거리는 과장하지 않고 종이 한 장 차이,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자신의 몸보다 배도 큰 괴물의 공격을 피한 그녀는 이해하기 힘든 발걸음을 선보이며 녀석의 머리를 깨끗하게 잘라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몇 발자국 살살 내디딘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거대한 괴물의 뒤를 잡고 있다.
“이야아아아아아!! 지금입니다! 엘리오스 님!”
‘혜지나! 나 죽어! 진짜 나 죽어!’
-혜진 씨! 나 죽어요! 나 죽어욧!
‘이야아아아….’
-방금 봤어요?
물론 싸우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재수 없게 촐랑거리고 있는 엘프가 한 명, 호리호리한 엘프들에게 딱 알맞은 엘프 왕국 검술을 펼치며 분전하고 있었지만….
-어머어머. 쟤 촐랑거리는 것 좀 봐.
누가 보기에도 주역이 아닌 단역의 몸놀림이었다.
김현성처럼 빠르고 절도 있는 몸놀림으로 상대방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것도 아니고, 라파엘처럼 묵직한 중검으로 넘치는 마력을 활용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그 이름, 바하무트의 검술처럼 무겁고 패도적인 것도 아니거니와 구 쓰로누스처럼 긴 리치를 활용해 빈틈을 팍팍 찔러주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템플러 젠처럼 정석적인 검술에 비중을 주지도 않는다.
쓸데없는 기교에 치중되어 있는 모습.
약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은 없는 느낌으로 주변을 맴도는 것만 같은 모양새.
결정타를 먹여야 하는데 결정타는 먹이지 않고 화려함에만 치중하는 빈약한 무기.
심지어 기본적인 체력도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전투지속력이 부족한지, 짧은 쉬는 시간을 가지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할 정도.
단언하건대 절대로 함께 싸우고 싶지 않은 타입이었다.
‘전술 엘리오스는 도저히 써먹을 곳이 안 보이자너.’
아무리 찾아보고 싶어도 진짜 쓸 곳이 하나도 안 보이자너. 심심풀이로 한번 해볼 생각도 안 들 정도자너.
물론 뭔가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날카로운 시선을 떼고 보면 기본적으로 녀석은 강하다. 기본적인 능력치는 결코 부족함이 없다.
전투상황에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기술도 가지고 있다.
단지 그동안 많은 검사들을 봐온 내 입맛이 까다로울 뿐일 것이다.
‘한 방이 없어요. 한 방이.’
-겉보기에는 그럴싸한데 알맹이가 영… 저건 엘프들 전통 검인가 봐요? 뭐가 저렇게 허약하게 생겼담. 뭐 화려하기는 하네요. 근데 화려하기만 하면 뭐하나. 실속이 있어야지.
‘쯧. 쯧. 쯧.’
혀를 찰 수밖에 없게 만드는 움직임.
어느 순간 누나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슬슬 조혜진의 비중이 줄어들 때 즈음에 다시 몰입하러 간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도 조혜진이 엘리오스의 뒤를 봐줄 때 감상을 끝낸 것이 틀림없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다. 검은 짐승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자 조혜진이 엘리오스를 보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움직임은 더뎌지기는 했지만 안정감은 올라간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디며 엘리오스는 숨겨왔던 자신의 감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기연 씨! 들리십니까!”
‘들려.’
“기연씨! 접니다! 제가… 제가 왔습니다.”
‘아, 지금 너무 꼴보기 싫어서 몰입이 안 되는데.’
“기연 씨!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무감각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점.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을 목도한 녀석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어리석구나.]
“당신은….”
[너무나도 어리석구나. 불쌍하고 추악한 엘룬의 피조물아.]
“당신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리석은 필멸자들에게 알릴 정도로 내 이름은 하찮지 않다만, 오늘은 새로운 탄생을 알려준 날이니 특별히 배려해 주도록 하마. 내 이름은 겔라. 과거 너희들이 악신이라고 불렀던 겔라이니라.]
상상도 못 한 정체.
사실 이기연의 내면에 들어 있는 악의 씨앗은 악신 겔라였다는 급전개.
하지만 몰입한 배우들은 개연성의 이상함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녀라니. 아아. 나의 씨앗이 된 이 아이 말이구나.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아이가 스스로 나오길 거부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 가련한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더구나.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았지. 그래.]
“…….”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말이다.]
“그럴 수가….”
[네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그러니 돌아가라 엘룬의 아들아. 네 목숨만은 지켜줄 것이니. 이 아이와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는 너를 엘룬의 품으로 되돌리는 것이… 이 내 마음에 걸리는구나.]
“…….”
[거기까지다. 더 이상 접근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노라.]
“거짓말입니다.”
[무엇이.]
“제가 아는 그녀는… 그녀가 결코 쉽게 포기할 리가 없습니다. 아파하고 쓰러질지언정, 기연 씨는 언제나 다시 일어나 밝게 웃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처를 받을지언정,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캐해석은 잘했네. 근데 너무 오글거리는 감성이라 코멘트하기가 곤란해.
그리고 네가 얼마나 나를 봤다고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그래.
[…….]
“기연 씨!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기연 씨!”
[의미 없는 발버둥이다만….]
“이제는… 이제는 알았습니다. 기연 씨. 기연 씨가 말씀하신 붉은실이 무엇인지, 이제는 제 눈에도 똑똑히 보입니다. 또… 또 기연 씨가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살아왔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아니, 깨달았습니다.”
[우습구나. 우스운 신파극이야.]
“이제는… 이제는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홀로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얘 너무 오그라들어.’
[진정 네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듣고 있을 겁니다. 그녀라면 분명히.”
심지어 이어져 있는 붉은 실을 한 번 바라보고 당당하게 외치는 것도 소름이야.
이래서 생긴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현성이가 했으면 명대사였을 거야.’
절절하고, 가슴 아픈 명대사. 사람 가슴 뛰게 하고 웅장한 대사인데….
이상하게 엘리오스 입에서 나오니 버터를 생으로 먹은 것처럼 느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또렷하고 절절한 눈빛 대신 자리 잡은 것은 치즈를 한 덩이 머금은 것 같은 눈빛.
전형적인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빛나는 목소리 대신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얇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라면 분명히… 제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겁니다.”
[이 아이를 과대평가하고 있구나. 엘룬의 아들아.]
거슬린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은 연기가 아니다.
실제로도 엘리오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거슬렸기 때문에 손을 휘두르는 동작에도 감정이 실려 있다.
검은 짐승들이 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엘프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 혹여나 혜진이가 다칠까 배려했지만 이 보기 싫은 놈은 귀신같이 약한 부분을 공략해 돌진해 온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전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엘리오스.
조혜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절대로 이기연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의미 없는 발버둥일 뿐이다.]
“후우… 후우….”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 것인지… 언제나 그렇지만 엘룬의 아이들은 참으로 포기를 모르는구나.]
“닿을 수 있어.”
[…….]
“닿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어리석은….]
“다음에는 분명히 닿을 겁니다. 기연 씨. 다음에는 분명히….”
‘걍 닿으면 끝인 줄 아나 봐. 나 갇혀 있는 거 안 보이냐구.’
앞만 보고 달린다는 공통점만큼은 김현성에게 지고 싶지 않은 모양.
혼자라면 절대로 닿을 수 없겠지만, 파란색을 좋아하는 구 썸녀에게 의지해 길을 뚫는 모습은 감동적이라기보다는 진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일이 다 묘사하기 싫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녀석의 손이 이쪽에 닿았을 때.
시야가 전환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작은 기적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무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이기연의 내면의 세계.
김현성을 찾으러 온 이기영마냥 내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엘리오스의 모습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기연 씨….”
“흐윽….”
“기연 씨… 기연 씨가… 맞으십니까?”
그게 던질 질문이야? 그럼 내가 시바 이기연이 아니면 뭔데….
“기연 씨… 접니다. 엘리오스입니다.”
그래. 너 엘리오스인 거 알아.
“기연 씨를 찾으러 왔습니다.”
너 이 새끼 잘 왔다 시바.
“기연 씨?”
이 악물고 차일 준비해.
붉은 실을 끊어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