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63화
피크닉 (26)
“엘리오스 님? 기연 씨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게… 그녀가 선택한 길이니까요.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의 기연 씨라면….”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
“엘리오스 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
“지켜볼 수밖에 없겠군요.”
“…….”
“…….”
“네. 지금은 그녀의 싸움을… 지켜봐 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구질구질한 구 남친의 감성을 담아 이쪽을 바라보는 엘리오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물론 촉촉한 눈가와 씁쓸한 표정을 숨길 수는 없다. 이유야 어찌 됐건 간에 놈은 이기연과 함께할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물론 진심으로 이쪽의 선택을 지지해 주겠다는 느낌도 오기야 한다. 아무리 엘리오스가 모자란다고는 해도 이런 상황에서 어째서 붉은 실을 풀어냈냐며 분노하는 사이코패스는 아닐 테니 말이다.
언뜻 보면 타격이 없는 것 같기도 했지만, 정말로 타격이 없을 리 만무.
너무나도 노선을 확실하게 정해 다시 한번 구 썸녀에게 돌아갈 명분도 없거니와 오매불망 기다리던 붉은 실 코인도 폭망해 버렸다.
대륙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사건의 한가운데 있는 만큼 의연한 녀석이 진심으로 후회하고 슬퍼할 순간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기 전일 것이다.
‘이 새끼 혹시 내가 다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 활짝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상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눈치 없는 녀석인 만큼 왠지 모르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지사.
‘이미 우린 끝난 거야. 알지? 이해하고 있지? 너와 나는 끝. 붉은 실도 끊어졌음.’
근데 왜 저렇게 눈빛이 애절할까.
악신 겔라와 내면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이기연이 그리 걱정되는 것일까.
홀로 대륙에 우뚝 선 이기연이 녀석의 취향을 저격하고 만 것일까.
‘생각해 보면 이 새끼. 좀 그런 사람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해.’
의연하고, 바르고, 흔들림이 없는 사람.
이를테면 조혜진 같은 사람 말이다.
단단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인물.
이기연과 조혜진의 공통점은 엘리오스와 나들이를 나갈 때 파란색 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 정도밖에 없었지만 방금의 각성을 통해 녀석의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연쇄고백마의 검은 손길이 이쪽에게 닿을 걸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하기는 했지만.
‘에바잖어.’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진짜 끝이야. 확실하게 끝난 거야.’
이 극에서는 이기연을 끝까지, 믿고 지지하는 역할을 맡은 배우가 한 명 더 있었으니까.
“저는… 으윽… 지지 않겠어요. 겔라.”
“…….”
“어디 발버둥 쳐 보려무나 아이야.”
“나는… 지지 않아.”
‘상투적인 대사 좋아.’
겔라와의 내면의 결투가 계속되고 있었던 시점, 이제 막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던 시점.
이쪽의 눈이 닿은 곳은 검은 비가 내리는 사막의 안이었다. 물론 설정상 이기연은 망원경이 없으니 다른 곳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갑시다.
-혼자라도 가겠어.
-이 양반 왜 이렇게 고집이 세? 이대로 가다가 전부 다 죽게 생겼다니까!
-그럼 거기서 죽든지. 나는 계속 걸어갈 거다.
-나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다고 제기랄.
-틀린 말은 아니야. 캐넌, 어차피 멈춰 서면 전부 죽을 거다. 차라리 길을 뚫는 게….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럴 것 같아? 제길….
‘지후야….’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 사막의 길잡이들과 이지후의 몸은 한계를 맞이한 지 오래.
한 번 한 번의 전투가 사선을 넘나들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투였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지후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마 예전의 이지후였다면, 이기연을 만나기 전의 이지후였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지후 님.’
성장하기 전의 그였다면 틀림없이 낙오됐을 것이다. 많은 일을 겪으며 성장한 그였기에,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그였기에 검은 비가 내리는 시련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렇게 이기연은 이지후를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어떤 심정인지, 그가 어째서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모두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어째서 자신을 배신하고 내버려 둔 것인지.
모든 것이 이기연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도…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결국 이기연을 위해서라는 것도… 지금도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제치고 달려와 주고 있다는 것도.
-나는 가야겠어.
-가지 말자는 소리가 아니잖아. 이 사람아. 안 그래도 우리는 당신을 저기까지 데려가 달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문제는… 우리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느냐야. 죽으면 말짱 꽝이라고.
-몸이 으스러져도 상관없어. 그녀가… 그녀가 느껴지기 시작했거든.
‘누나 대사 왜 이래. 너무… 좀 그래.’
이지후 역시, 이기연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나도… 힘낼게요. 이지후 님. 아니… 나도 힘낼게. 지후야.’
동시에 참여형 관객도르를 수상하고 있는 사막의 길잡이들 역시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검은 짐승들이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계속해서 자신의 힘을 불려나가던 검은 짐승들은 어느 순간, 덩치를 키우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대로 흩어지는 녀석들도 눈에 보이는 상황, 놈들이 멍청하지 않다면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깨닫지 못해도 상관없다. 참여형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연배우가 자연스럽게 상황을 브리핑해 줄 테니까.
-그녀가… 맞서 싸우고 있는 거야.
-…….
-그녀의 안에 든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누나는… 그렇게 쉽게 쓰러질 사람이 아니야.
‘지후야… 대사 왜 그래.’
-그렇다면… 그… 그분께서 자신의 몸을 빼앗은 악신과 싸우고 있다는 겁니까? 그래서… 이 검은 짐승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네. 알렉스.
-너도 같은 생각이야? 조지?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을 테니 말일세. 우리에게 역할을 부여한 것 역시. 그분이지 않았나.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한낱 인간이… 악신과 대항할 수 있다는 게. 이 사막 전체에 검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불가능, 가능을 판단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그녀야.
-저 남자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인간의 선의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감,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한 적이 있지 않나. 명예추기경, 그분도 인간이었네. 알렉스. 우리는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행하신 기적을 모두 목격한 증인들이야. 지금은 새로운 기적을 목도하고 있는 것뿐이라네.
근데 쟤는 왜 이렇게 현자 포지션을 잡고 있냐. 인간 찬가 뭔데.
사막의 길잡이 중 가장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는 녀석은 품속에 있는 술을 입으로 한 모금 집어넣은 이후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기적은 신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야. 우리 필멸자들에게도 기적이 허락되는 순간이 있다네.
저 새끼 너무 현자 같은데.
오죽했으면 누나도 살짝 당황한 얼굴이었다. 단역으로 끝나야 할 참여형 관객들이 갑작스레 명대사를 날리면서 분량을 빼앗고 있으니, 이걸 쳐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듯한 느낌.
잠깐 고민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누나는 녀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이 정도는 극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정도라고 판단한 것이다.
-네놈들은….
-네.
-네놈들은 그녀가 너희들을 이곳으로 보냈다고 말했었지.
-아니, 근데 이 양반이 아까부터 왜 자꾸 반말을….
-입 다물어, 캐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또 무슨 말을 했었지? 정확히… 그녀가 너희들을 이곳으로 보낸 목적이 뭐야.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당신을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아닌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니….
-너무 상황이 급박했던 터라… 잠깐… 잠깐만… 아! 그를 도와달라고 했었습니다.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했었습니다. 저희가 들은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왠지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들었으니… 당신을 그분이 계신 곳으로 꼭 데려가야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저도 알 수 없지만….
-또. 또 다른 말은 없었나?
-…….
-…….
하나 빼먹었잖아. 얘들아. 중요한 떡밥 하나 뿌렸었잖아. 사막의 길잡이들아.
조용히 입을 연 것은 캐넌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사하가의 유산….
-뭐?
-사하가의 유산을 찾으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그렇게… 말했었나? 그게 뭐지.
-악신 겔라의 연인이라고 불리는 신이 사하가라네. 관련된 전승에 관해 모두 일일이 설명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아마 그분의 몸을 차지한 것이 악신 겔라이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하가의 유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게 흐름상 맞는 답인 것 같군. 그녀는 무엇이 겔라의 힘을 악화시킬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 게야.
-그건 어디에 있지?
-저, 저희도 모릅니다.
-뭐?
-저희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네놈. 네놈도 모르고 있는 건가?
-잊혀진 신의 유산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어째서… 어째서 누나는 사하가의 유산에 대해서 언급한 걸까.
-어쩌면 우리가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유산이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지 않나?
-그게 무슨 개소리….
멈춰 있던 거대한 검은 짐승이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전투 준비해! 알렉스!
사막의 길잡이들과 이지후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최후의 발악인 양 몸을 배로 키운 녀석의 거대한 몸이 파티원들을 짓누르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먼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발톱이 검은 짐승을 짓누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당신들이 사막의 길잡이들인가?
-어….
-다시 한번 묻겠다. 하찮은 인간들이여. 당신들이 사막의 길잡이 들인가?
-그… 그게….
-누… 누나님께서! 묻고 있지 않느냐! 무엄한 놈들!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언니. 세라. 여기는 제가….
-크… 크흠. 그래. 하나하나 내가 나서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도미. 여기는 네게 맡기마.
-네. 그럼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 아기 천사님이….
-조금만 진정하시고 제 말을 경청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사막의 길잡이와 함께 있는 분께 사하가의 유산을 전달하라는 퀘스트를 받고 현재 수행 중에 있습니다.
-어… 어디에서….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도미니온스의 시선이 이지후에게 닿는다. 둘이 살짝 눈인사를 건네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니 도미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이해한 모양.
애써 근엄한 용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는 디아루리아를 뒤로한 채로, 도미니온스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이… 사하가의 유산을… 필요로 하는 인간입니까?
그녀의 질문에 이지후는,
-그래.
-…….
이지후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가장 잘생겨 보이는 각도를 만들고 카메라를 응시한 이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지고 가겠다.
심지어 도미니온스 역시 괜스레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너네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