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65화
피크닉 (28)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산에서 거대한 빛이 떨어져 내리며 대륙이 잊고 있었던, 잊혀져야만 했던 사막 엘프의 토속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형태는 형태를 만들고, 덩치를 키워, 이내 필멸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신성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나풀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미형의 존재. 하이 엘프보다 더욱더 긴 귀를 가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사막 엘프의 모습과 무척 닮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빛으로 만들어진 형태의 모습을 또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니. 신의 존재를 이렇게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니.
“…….”
“…….”
처음부터 이해하기 힘든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때 보았던 그 광경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자신들은 신화의 한가운데 있었고, 대륙이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직접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순식간에, 사하가는 악신 겔라를 품에 안은 채 자신들의 눈앞에 사라졌다.
그때 그들이 무척이나 긴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들리지 않았지.’
그 시간은 찰나였다. 아마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다소 허무한 결말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그렇게 고생한 것들이 전부 신들의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니, 필멸자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전부 바라볼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악신 겔라와 사막의 토속신 사하가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조지. 그러면 결국 이번에 일어난 일이 사하가와 겔라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야?”
난봉꾼 캐넌이 중얼거린 말에 삼류도박사 조지가 답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사하가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 악신 겔라가 진정하기 시작했으니… 물론 악신 겔라에 대항한 이기연 님 의지력이 가장 결정적이었겠지만 분노한 겔라의 마음을 잠재운 것은 사하가일 걸세.”
“뭔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하는데….”
“신의 시선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본래 초월적인 존재들이란 그런 걸세. 신의 분노를 사 던전에 갇힌 고대의 무녀 율리에나의 이야기나 마찬가지로 초월적인 존재의 환심을 사 큰 힘을 받은 용사처럼, 신들은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기도, 이타적이기도 하지. 그들의 시선에서 보면 우리는 한낱 미물들이니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특히… 특히나 신의 사랑이라는 건 어느 신화에서나 가장 위험하게 분류되는 이야기야.”
“…….”
“대륙에 대한 겔라의 분노는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걸세.”
“사하가를 내버린 대륙의 대한 복수 말이야?”
“그건 우리가 알 수 없지. 그녀의 분노가 사하가를 내친 대륙에 대한 복수인지, 아니면 단순히 사하가에 대한 분노인지, 단순히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한 쇼일지도….”
“그건 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나, 캐넌? 결국 악신 겔라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나. 그녀가 선택한 여인의 몸에 깃들어 기회를 노리고, 라베스 사막에 비를 내려 대륙에 엄포를 내놓았지. 평범한 사람들이야 멍하니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초월자들에게는 심각한 상황이었을 걸세.”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초월자들….’
아마 희생과 부활의 용, 세상의 지혜를 관장하는 천사, 균열의 주인과 같은 이들을 부르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사하가의 유산 역시 그들이 건네준 것이 아니었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꼭두각시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우리가 뭔가 주도적으로 사건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이 이끄는 곳으로 이끌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이끌렸을 것이다. 그 존재들은 필멸자들의 삶에 관여하는 걸 최소화해야 한다 여겼으니, 자신들일 대신할 대리자들이 필요했겠지.
“결국 그들이 우리를 이끈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딱딱 맞아떨어졌으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들은 이기적일세. 알렉스. 만약 노을빛의 검신이 악신 겔라의 입장에 서서 희생과 부활의 신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게나.”
“이번 일은 어린애 장난이었겠군.”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이해가 딱 되는데? 조지?”
녀석은 웃음을 보이며 술잔을 입으로 들이켰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된 건가? 알렉스.”
“아… 이지후 님과… 이기연 님 말하는 거지?”
“그럼.”
“글쎄… 듣기로는 라베스 사막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그건 너희들도 전부 알고 있는 이야기고… 사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도 묵묵부답이야.”
정신을 차린 그들이 활짝 웃고 있었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이기연 님께서는 작은 모포를 덮고 계셨고, 이지후 님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사막의 밤 아래에서 모닥불을 쬐면서…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처럼 말이다.
조혜진 님과 엘리오스 님께서도 그 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여러 가지 궁금증을 뒤로 남겨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의 뒤처리라면 라베하에서도 충분하니까. 도시로 들어간 직후 모든 것을 마무리할 생각이었겠지만….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쪽지 한 장만 남겨둔 채로 말이다.
“고맙다고, 조용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쪽지였을걸, 아마.”
“어디 갔을까?”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그거 로맨틱하네. 잠깐 전해 듣기로는… 이기연 님은 몰라도 이지후 님은 꽤 적을 많이 만들어놓은 것 같던데….”
“무사하겠지. 그 둘이라면… 아마 어떤 시련이 와도 이겨낼 수 있을 거다.”
무려 신의 시련을 이겨낸 두 명이 아니었던가. 아마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소소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결말이고 엔딩일 테니까.
“한 잔 더 하지. 알렉스. ‘그 둘을 위하여’라는 건배사는 어떤가.”
“한 잔 더 같은 소리 하지 마. 조지. 아까부터 계속 한 잔 더. 한 잔 더. 우리가 누굴 만나기로 했는지 잊은 거야?”
“크… 크흠.”
녀석이 헛기침을 하는 동시에. 허름한 주점의 문이 열리며 두 인형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 계셨군요.”
“조혜진 님. 엘리오스 님. 다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 태풍의 눈 안에 함께 있었던 이들이었다.
파란의 신창과 이종족 연합의 수장, 평소라면 마주칠 일이 없는 이들이겠지만 우연치 않은 사건으로 함께 싸운 동료들.
이런 곳에서 둘과 만나는 것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호의적인 얼굴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깍듯하게 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함께 싸운 전우니까요.”
“하… 하지만….”
“일단 저도 한 잔 마셔야겠군요. 엘리오스 님도.”
“예. 저도 같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
“…….”
“이, 이렇게 만나시자고 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니요. 오히려 이런 곳에서 뵙자고 말씀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사실은 조금 더 좋은 대우를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네?”
“대륙을 구한 영웅분들이 아니십니까.”
“아니… 저희는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이유야 어찌 됐건 간에, 세 분께서 대륙을 구하는 데 큰 힘이 되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와 교황청, 또 린델의 삼대길드를 포함한 단체에 포상을 받는 것이 합당한 보상이지만… 죄송스럽게도….”
“아… 네.”
“저희 쪽에서는 이번 일을 비밀에 부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을 위한 보상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만 공식적으로 이번 일은 없었던 일이 될 뿐입니다.”
“혹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멍청한 질문이었다. 이유는 많았으니까.
대륙인들에게 위화감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공포심과 두려움 속으로 다시 한번 집어넣지 않기 위해서.
당연히 파란에서는 아마 그 사실을 알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대륙의 균형을 수호하는 초월자들이 개입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해결됐다고 말해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여러모로 은폐하는 게 맞는 행동이겠지.
하지만 들려온 것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이기연 님과 이지후 님. 두 분의 의사 때문입니다.”
“네?”
“물론 설명드릴 수 없는 이유도 존재하지만. 이기연 님과 이지후 님이 조용히 살아가기를 원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몸을 숨긴 이유가 이해가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저희 쪽에서도 조사를 이어나갈 수 없었고요.”
“그게… 도대체… 누가….”
“명예추기경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두 분을 존중하겠다고.”
“…….”
“그저 이기연 님과 이지후 님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동시에.
다시 한번 허름한 주점의 문이 열리며, 익숙하지만 가까이서 볼 수 없었던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니고어시여.”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하얀색 사제복에 있는 후드를 살짝 넘기자 그분의 얼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매번 화면을 통해 보기는 했었지만 실물로 영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대륙의 성자. 희생과 부활의 신. 교국의 명예추기경으로 대륙의 신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 베니고어의 아들.
‘진짜… 진짜 명예추기경님이셔….’
“…….”
“…….”
다른 표현이 나올 수가 있을까.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 그 어떤 전투에서도 긴장한 적이 없건만 온몸에 힘이 들어가 제대로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지난밤에 사건에 대해 전해 들어 밤잠에 들지 못했는지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분의 총명함과 신성함을 바래게 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날 봤던 사하가와 겔라의 모습보다 이질적이면서도 친근한 듯한 느낌. 조용한 미소 짓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팔을 덜덜 떨게 됐다.
“명… 명예추기경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당황했을 때….
“앉아 계셔도 됩니다.”
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분들이시군요.”
“네.”
“길잡이의 역할을 하신 분들이….”
“과분한 칭호입니다. 저희는 그저.”
“자신들의 공을 깎아내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헌도와는 상관없이 그대들은 이미 저의 영웅이니까요. 공에 걸맞은 대접을 해드리지 못해 무척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비공식적으로 여러분들에게 포상을….”
“포… 포상은 괜찮습니다. 명예추기경님.”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렉스.”
“닥… 닥쳐! 캐넌! 아? 죄,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쿡쿡… 재미있는 분들이시군요.”
주먹을 턱 쪽에 가져다 대고 쿡쿡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질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도 정말로 영웅다운 풍모이십니다. 하지만 그냥 보내드리기에는 제 마음이 편하지 않네요. 혹여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지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 없지만… 혹시….”
“네?”
“괜찮으시다면 축복을 내려주신다면….”
“간단한 일입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머리 위에 올린 손 위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이내 입에서 기도문이 흘러나온 이후에는 온몸의 죄가 정화되고 사라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감동적이라는 말로는 이 감정을 표현하기 부족하다.
혹시 사인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로자리오라도 받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리가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즈음에. 자신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혹시… 그분들의 행방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단언하건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떨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