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68화
피크닉 (31)
“시바!”
“기영 씨!”
“시바! 시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라베하에 파견 온 화이트 폴 주니어들의 숫자는 무려 16마리.
흰색과 검은색으로 뒤섞인 녀석들이 이쪽을 덮치듯 달려든 지 5분 만에 일어난 불상사였다.
간만에 자신들을 찾아온 주인이 반가웠는지 날개를 파닥거리며 엉겨 붙은 녀석들이었지만 그중 한 녀석이 반가움을 참지 못했는지 입질을 하고 만 것이다.
악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저 새끼들의 부리가 이쪽의 내구 수치를 뚫어버린 것이 문제.
자기 자신조차도 깜짝 놀라 부리를 놓아버렸지만 팔에는 붉은색 부리 자국이 커다랗게 자리 잡은 이후였다.
“무슨 짓이야! 제길!”
당연히 흥분한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혹시나 검을 빼 들어 건방진 그리폰의 목을 날려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는 했지만….
‘이걸 참네.’
아니. 이걸 참아? 시늉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야. 오히려 쟤 목 날라갔으면 이 새끼 인성을 걱정했어야 했을 거야.’
한때 콰직 현성으로 각성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폰에게 보여준 김현성의 자비는 훌륭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리 녀석이라도 인간보다 그리폰을 더 소중히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갑작스레 일어난 사고로 김현성의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상황.
사고를 친 그리폰 녀석은 순식간에 파다닥거리며 김현성과 이쪽의 영향권을 벗어났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고 했잖아! 루키!”
‘분위기 살벌하네.’
루키라고 불리는 그리폰은 김현성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하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는 중, 실제로 김현성의 몸에서 마력과 살기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평소에도 저렇게 애들을 휘어잡았는지, 혼나는 건 분명 루키 한 마리뿐인데도 불구하고 나머지 15마리 역시 군기가 바짝 들어간 것 같다. 마치 1류 그리폰 훈련사를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래. 널 믿은 내가 멍청했지. 이곳으로 널 데려온 내가 멍청했어.”
삐약….
생긴 것은 성인인데 울음소리는 삐약 소리가 난다. 미안하다는 듯 루키가 삐약거리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녀석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이쪽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기영 씨?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은데….”
“괜찮아요. 별거 아닌 상처인데요. 아마 루키도 장난으로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리 장난이라도… 자신이 한 행동은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건 너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겠다. 근데 얘가 너무 기가 죽었어.’
구석에서 얼굴을 처박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입질 한 번 한 것치고는 상당히 가슴 아픈 결과물. 아직 어린 탓에 자기 자신도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안타깝기는 하지만….
‘교육은 확실히 하기는 해야지.’
흔하지는 않지만 교육이 안 된 그리폰이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장난일지도 모르겠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애완견한테 물리는 사고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판에 그리폰한테 물리는 사고는 폭탄이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생각보다 훨씬 단호한 김현성의 모습은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순식간에 다른 그리폰들에게 밀려나 눈물만 떨구고 있는 루키를 뒤로 한바탕 소동이 대충 정리된 것 같은 분위기.
상처는 간단하게 포션으로 치료를 했고, 예상하지 못한 사고에 안절부절못하던 김현성 역시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흉터는 남지 않은 것 같군요.”
“조금 깨물깨물 한 것뿐인데요. 뭐. 아마 오랜만에 제가 온 게 반가웠나 봐요. 저 녀석은 다른 녀석들 중에서도 제법 기억에 남거든요. 딱 흰둥이 정도 크기일 때 봤던 것 같은데… 아직도 기억하는군요.”
“네. 그리폰들은 기억력이 좋으니까요. 분명히 기영 씨를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때 잠깐 본 것뿐이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루키를 처음 보셨을 당시에… 화이트폴을 쓰다듬는 모습을 보여주셨으니… 어쩌면… 기영 씨를 주인으로 여기고 있을 수도 있었겠군요.”
“네?”
‘시바 내가 너무 무심했나 봐.’
근데 어쩔 수 없자너. 알 까는 게 한두 번이어야 찾아가서 예뻐해 주고 귀여워해 주고 그렇지.
틈만 나면 새끼를 낳아대는데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신경을 써줘.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그나마 한 번씩 찾아가는 게 전부지.
이제는 새끼 낳았다는 게 일상처럼 들려오는 뉴스여서 보고도 하지 말라고 했어.
또 찾아갈 때마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여럿이서 달려들어서 누가 누구인지 구분도 못 하겠다고.
당연히 전문 사육사와 관리사들을 두기는 했지만 다행히 김현성이 매번 찾아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 이름을 다 붙여주고 구분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김현성을 잘 따르는 게 느껴진다.
여가 시간에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그리폰 우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양.
혹시 얘는 실제 사람보다 그리폰이 더 편한 것이 아닐까.
“알파. 이리와.”
검은색과 하얀색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그리폰 하나를 껴안고 웃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게 틀린 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녀석도 기영 씨를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아아. 네. 기억나네요.”
“최근에 저와 가장 자주 라이딩을 나가기도 했었습니다. 체력이 좋고….”
‘그래. 시바. 또 전문 지식 나왔다.’
“날개를 잘 살펴보시면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조금 꺾여 있는 걸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사실 이건 기형이 아니라 특수 개체에서만 보이는 기관으로 공중에서 방향 전환을….”
“아! 그렇군요! 대단하네요~”
“깃털의 색을 보시면… 화이트 폴과….”
“아! 그렇군요! 대단하네요~”
“무엇보다 알파의 눈을 보시면.”
“아! 그렇군요! 대단하네요~”
적당히 맞장구쳐 주면 좋아하자너.
간만에 지식을 뽐낼 기회.
“무엇보다 귀엽습니다.”
“아! 그렇군요! 대단하네요~”
평소에 이렇게 뭔가를 설명하거나 잘난 척할 기회가 아예 없다시피 한 만큼 신나게 떠들 수 있게 맞장구를 쳐줘야지.
“그러니까.”
“아! 그렇군요! 대단하네요~”
“네.”
지도 지가 조금 오타쿠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일단 기분은 좋아 보인다.
“하지만 오늘은 빠른 비행을 하는 게 아닌 만큼 알파보다는 다른 녀석과 같이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기영 씨는… 제가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저기 저 녀석은 어떠십니까. 이쪽으로 와볼래?”
“아뇨. 아뇨. 저는 루키랑 같이 나가고 싶네요.”
“네?”
“안 되나요?”
“조금… 위험할지도 몰라서… 아시다시피 아직 루키는.”
“현성 씨랑 나가는데 뭐가 걱정인가요. 그냥 좀….”
“네.”
“저렇게 혼자 구석에 있는 모습을 보니까.”
‘왠지 너 같아서.’
벽에 처박혀 웅크려 앉아서 울고 있자너.
원래 기회는 한 번 더 줘도 돼.
“네. 그렇다면 준비하겠습니다. 일단 차 한 잔 마시면서….”
“네.”
한 번 실수가 있었던 만큼 김현성도 조금 걱정하는 눈치이기는 했지만 굳은 얼굴로 준비를 시작하는 녀석.
승강장 관리인이 가지고 온 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보고 있자니 뭔가 옆에 관리사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김현성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장비를 추가해야겠다느니, 이걸로 안 된다느니, 하는 말들을 주고받기도 하고, 날개를 꼼꼼히 점검하는 모습은 프로처럼 보이기야 한다.
‘이거 대회도 한번 열어볼까.’
쟤 진짜 좋아할 것 같은데.
그리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대회에 참가할까 싶기도 했지만 아마 돈 많고 할 일 없는 부자들은 대리 기수들을 고용해서라도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 할 것이다.
기수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리폰의 혈통이 어느 정도인지 증명하고 싶어 할 테니까.
‘혈통 하면 화이트 폴이랑 현성이 그리폰도 만만치 않기는 한데.’
경마처럼 제대로 사업으로 성장시키면 볼만하기는 할 거야. 균열랜드에 남는 부지가 있으니까. 그쪽에 투자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잠깐 동안 사업 생각에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어느새 준비가 끝냈는지 이쪽을 부르는 김현성이 눈에 보였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지 굳게 마음먹은 눈빛을 쏘아 보내는 것이 루키와 다름없어 보일 정도.
“가시죠.”
“네.”
승강장에서 그리폰 두 마리가 날아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베하의 전경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혹시 너무 높거나 페이스가 빠르면 곧바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으니 너무 배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현성 씨.
-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폰을 타고 하늘을 느끼는 것보다 사실 아래쪽을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다.
파란 길드의 배지를 달고 가슴을 쫙 펴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디아루리아와 아이들.
신입 모임이라도 있는지, 스미스 대령과 벨리에, 알프스가 함께 광장을 돌아다니는 것도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리폰을 발견했는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나 환호성을 보내는 이들도 시야에 비쳤다.
-여유롭네요. 사실 라베하 도시에 들어간 비용을 생각하면….
-…….
-처음에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런 모습들을 보면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감… 감사합니다.
‘감격했나 봐.’
-그건 그렇고 라베스 사막이 꽤 넓네요.
-네. 제대로 둘러보시려면 하루 이틀 가지고는 힘들 겁니다. 그러고 보니 보여드리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네? 어디….
-천천히 따라와 주세요.
‘비밀이 많자너.’
하루가 꽤 빨리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몬스터 박물관에 가서 식사를 하고, 나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수다 떨고.
승강장에서 짧은 사건을 마주하고 정처 없이 그리폰을 타고 라이딩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노을이 지려고 하는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노을 같이 못 봐서 죽은 귀신이라도 씌었나.’
김현성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코스는 역시나 노을 감상 타임.
라베스 사막 어딘가에 괜찮은 스팟이라도 있나 생각한 찰나. 꽤 의외의 장소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는….
-소금사막입니다.
마치 하늘이 두 개가 있는 듯한 느낌. 거울 호수처럼 라베스 사막의 소금사막은 하늘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이쪽에 내리시면 됩니다.”
“와….”
‘멋있기는 하네.’
별별 걸 다 봐서. 이제는 진짜 질릴 때도 됐는데. 이렇게 보니까 진짜루 멋있기는 해.
무슨 말이 필요할까. 굳이 멋있다고 말할 필요도 멋진 풍경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저녁노을이 막 지려는 찰나 세상이 주황빛으로 물든다.
김현성도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노을빛 하늘을 발로 밟고 있는 듯한 느낌. 온 세상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자연에 대한 경외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
“…….”
“좋네요.”
“…….”
김현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린다.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온 세상을 노을빛으로 물 들은 소금사막의 모습은 아름답다.
“기영 씨와 꼭 한번 와보고 싶었습니다.”
“1회차 때도 와본 적이 있는 곳인가요?”
“아니요. 라베스 사막에는 올 일이 없었지만… 이런 장소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기회가 닿게 되는군요. 당시에는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멋있기는 하다. 진짜.’
화아아아아악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다시 한번 노을빛이 세상을 가렸을 때.
김현성이 입을 열었다.
“기영 씨.”
“네.”
“사실….”
“……?”
항상 진지하지만 이번에는 더 진지한 것 같은 느낌.
녀석의 그 진지한 얼굴에 이쪽마저 조금은 긴장할 무렵.
“당황하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뭔데?’
김현성은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실은….”
“…….”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불러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