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70화
피크닉 (33)
‘내 비상금. 시바.’
내 비상금… 내… 내 신성.
“기영 씨?”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시바. 이걸… 이걸 어떻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타이밍이리라.
‘혼자 퀘스트 보냈을 때부터 틀어막았어야 했는데.’
노을빛의 검신이라는 이름으로 벌어들이는 신성은 거의 대부분이 내게 자동으로 이체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약 77.9% 정도. 노을빛의 검신이 희생과 부활의 신의 하위신임을 스스로 자처하고 있어 신성의 흐름이 자연스레 이동되고 있는 상황.
물론 100%를 전부 받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22.1%는 김현성의 용돈으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하위신에게 받는 신성은 30% 정도도 많은 상황이라 양심이 찔리기도 했고, 노을빛의 검신에게 믿음을 보내는 열성적인 지지자들의 신성은 김현성에게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용돈이었다.
22.1 퍼센트
‘말이 22.1%지….’
노을빛의 검신에게 들어가는 신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애초에 희생과 부활의 신과, 노을빛의 검신의 서사는 살아 있는 신화 그 자체였으며, 어디 한 종족이나 지역에 국한되지 않게 대륙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으니까. 엘룬이나 바리안의, 혹은 로렌의 신도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희생과 부활의 신을 기리며, 노을빛의 검신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신도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사실상 모든 대륙민들이 신성을 조금씩 보내준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당연히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22.1% 웬만한 신들의 벌어들이는 양을 상회할 정도다. 소규모 지역에 단체 이벤트를 걸거나, 전설등급의 던전을 5개 이상 활성화할 수 있고, 새로운 종류의 하급 몬스터를 창조하거나, 아주 오래된 서사를 깨울 수 있을 정도, 지역 전체에 변화를 줄 수 있을 정도의 양이다.
당연히 골드로 환산할 수도 없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이곳에서 꼭 필요했던 비상금. 저금한다는 심정으로 김현성에게 차곡차곡 쌓아놨던 비장의 무기.
그게… 그게 실시간으로 재가 되어 하늘로 달아가고 있었다.
‘아예 몰수해야 했어.’
그냥 내가 관리해야 했어.
22.1%가 뭐야? 3%만 되도 용돈으로는 과분한데. 내가 왜 이걸 그냥 그대로 뒀을까.
‘애초에 이 새끼는 신성이라는 개념도 잘 모르는데.’
퀘스트를 보내는 방법을 깨달은 것도 비교적 최근이 아니었던가.
어차피 김현성이야 쓸 일도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화근, 퀘스트를 보내는 것 정도의 지출이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이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이걸 이렇게 써먹어?’
“…….”
“기영 씨. 괜찮으십니까? 조금 표정이 좋지 않은데.”
‘이게 괜찮아 보이나?’
“어딘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시바.’
“혹시 강림 절차가 어땠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정확히는 이 노을빛의 검신님과 계약을 맺었고.”
“계약서 좀 볼게요.”
“아… 네.”
‘혹시 계약서가 없는 건 아니지? 그렇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김현성도 깨닫고 있는 것일까.
갑작스레 내가 계약서를 보자고 물고 늘어지자 극도로 긴장하는 녀석의 모습도 시야에 들어왔다. 기분 나쁜 것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무언가 상황이 터지긴 터졌다는 걸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기영 씨 그러니까 이건… 제가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사실 말입니다. 마력과 비슷한 성질의 기운….”
“그냥 가만히 있어요.”
“네… 네.”
‘사기계약일 수도 있어.’
김현성은 계약서 같은 거 쓸 줄도 모르고 볼 줄 모르니까.
그냥 평범한 일도 아니고 무려 타 차원의 신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일이다. 김현성이 계약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지언정,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구두로 계약을 했을 리는 없다.
“아. 네. 물론 드리겠습니다. 노을빛의 검신께서 계약서에 대해 알아서 진행하라고 말씀하셔서… 다소 주관적인 항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시바. 분명히 이거… 바가지 씌웠을 거야.’
베니고어의 재무상태를 통해 배운 점이 있다면 이 새끼들도 그리 착한 놈들이 없다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보다 더 야비하고 비열한 놈들도 있는 만큼 이런 건 확실히 해야 한다.
“보시는 것처럼 계약서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혹여나 조금 과하게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 현 차원에 체류하는 동안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신성은 최소로 요구 드렸으며….”
‘그러네.’
“분할납부 하실 수 있게….”
‘그러네?’
김현성이 몇백 년에 걸쳐 신성의 일부를 납부해야 한다는 계약서의 내용이었다.
“의뢰하신 작품의 경우에는… 값이 조금 과하게 보이실 수도 있지만, 이것은 부디 장인의 자존심이라고 판단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값이 조금 과하기는 해.
‘아니, 사실 많이 과해.’
엄청 과해.
계산해 보니 정확히 271년이다.
271년 동안….
“후우….”
하지만 이마저도 양보했다는 느낌이 들기야 했다. 눈앞에 있는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대륙에 남기는 마지막 작품이니까.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장인의 자부심을 오히려 깎아내린 것은 아닐 정도의 가격. 당장에라도 김현성의 뺨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액수이기는 했지만, 타 차원의 신을 대륙으로 불러내 강림을 시킨 것으로 모자라 작업까지 의뢰했다는 걸 모두 종합해 보면, 여러모로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게 느껴진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함정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어 계속해서 꼼꼼하게 계약 내용을 살펴봤을 정도,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네 번까지 살펴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들었던 대로 무척 꼼꼼한 성격이시군요.”
‘당연하지만… 계약 파기도 못 하네.’
“너무 저희 쪽에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 말에 자신이 지은 계약이 좋은 계약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김현성이 환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지금은 녀석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 그렇군요!”
“…….”
“어떤 부분을 걱정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과물은 만족스러우실 테니까요. 제가 고향이었던 대륙에 마지막 작품을 남길 수 있다니… 이미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뿐입니다. 부디 장인의 자존심을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허투루 작품에 임하는 경우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네….”
“기영 씨. 샤넬리아 에르메스 씨는 믿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기영 씨에게 딱 맞는.”
‘넌 좀 입 다물고 있어.’
김현성을 한번 홀겨본 이후에야 진정하고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이상하게 시각보다 이쪽을 더 사로잡는 것은 후각이다. 정확히 어떤 냄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서 오래된 가죽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은 느낌, 물론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라고 하는 게 알맞지 않을까.
짧은 머리를 하고 있고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작고 귀여운 인상의 여인. 무두장이들이 입을 법한 벨트와 작업복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그녀가 가죽세공 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제가 조금 무례했군요. 손님에게 차도 내드리지 않고….”
“네? 아, 아닙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일단 커피 한잔 마시겠어요?”
“물론! 감사히 받겠습니다.”
‘좀 씩씩해 보이기는 해.’
한편으로는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적대적이지는 않고.’
오히려 잘 보이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려고 하지 않는 모습은 의아해 보일 정도였다.
“커피향이 참 좋군요.”
“그러고 보니 샤넬리아 에르메스님은 어떻게 저희 대륙에 자리 잡지 않으시고….”
“아아. 그게 궁금하셨군요. 말씀드리자면 깁니다. 사실 자격을 얻어 위로 올라가야 되는 상황에서… 현 대륙에 티오가 없다고 해서… 잠깐 타 차원으로 임대를 나가서… 그대로 이이직을….”
“그렇군요.”
“아무래도 생산직들은 대우가 박하니… 저 같은 경우에는 눈에 띄는 서사나 신화도 없고… 현 대륙에서도 꼭 잡아두고 싶은 탐나는 인재라고는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아….”
“사실 이곳저곳 방황하다가 결국에 좌천되는 경우도 흔한데. 저 같은 경우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우연히 좋은 곳에 자리 잡을 수 있었죠.”
“그렇군요.”
‘너 혹시 여기로 다시 오고 싶니? 스카웃 당하고 싶은 거야?’
“잠깐 동안은 슬펐던 적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만족하며 지내고 있는 중이라….”
‘그건 또 아니네.’
그녀는 커피를 살짝 마시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어떤 의뢰인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감사하게도 희생과 부활의 신께서 제 컬렉션을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니… 개인적인 감상과 더불어 어떤 물건을 가지고 싶으신지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아니면 내가 지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는 것에 대한 호의적인 건가.’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의심하기는 싫지만….
“다시 한번 제 이름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작품은 분명히….”
무조건 의심하기는 싫지만 일단은 화두를 던져볼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게 뭐예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
“그러지 말구요.”
“네? 정말로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 알아. 알아. 현성이가 널 여기에 강림시켰고 의뢰도 했지. 네가 우릴 부른 게 아니라 우리가 널 부른 건 맞아. 근데 좀 이상해.
‘희생과 부활의 신이니, 노을빛의 검신이니 라는 극존칭으로 부르는 것도 신기하고.’
물론 이 대륙이 알려지기야 했을 것이다. 위에 최초로 독립을 요구한 집단이니까.
잘 모르겠지만 나와 김현성의 이름이야 여기저기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이쪽에 호의적일 수는 있겠지. 나와 김현성의 업적은 위에서도 제법 인정받는 모양이었으니까.
최소한의 정보를 접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계약서 한 장 가지고 꼬투리 잡는 것도 웃기고. 사실 꼬투리 잡는 것도 의미 없는 행동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들었던 대로 무척 꼼꼼한 성격이시군요.’
라고 말했던 것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들었다고 꼼꼼한 성격이래?’
누구한테 들었나. 꼼꼼한 성격이라는 걸. 현성아 네가 그랬어? 꼼꼼한 성격이니까. 계약서 작성에 신중해 달라고? 가방을 전부 모으고 있다는 것도 전부 떠벌렸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해요. 그러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잠깐 현성이 머리 좀 뒤져봐야겠다.
곧바로 선명한 이미지가 나타난다.
‘기영 씨는 샤넬리아 에르메스 님의 모든 컬렉션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척 섬세하고 꼼꼼한 성격이시니 부디 디테일이 살아 있는 작품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했네.
“…….”
“…….”
말했었네.
“…….”
“…….”
얘가 전부 떠벌렸었네.
“…….”
“…….”
시바 뻘쭘해서 어떻게 하지?
“…….”
농담이었다고 웃어넘기는 게 맞겠지?
“…….”
“?”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후우… 어쩔 수 없군요.”
“?”
“부디….”
“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부디 저희 차원에… 도움의 손길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