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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72화 (1,07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72화

피크닉 (35)

‘너 왜 그래?’

“기영 씨 더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나 했더니….”

“…….”

“그래. 그랬지. 너희들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네?”

“이기적이고 자신들밖에 모르는 개자식들.”

“진정하세요. 현성 씨.”

“진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기영 씨. 이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더 이상 대답하지 마세요. 애초에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소환한 것이 제 실수였습니다. 그 입을 놀리게 내버려 둔 것도….”

“왜 그러세요? 일단 진정하고 나머지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회귀자를 다시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그런 건가?’

물론 그녀가 김현성의 발작 버튼을 누른 것이 맞다. 김현성은 회귀라는 단어 자체에 극심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1, 2회차 통틀어 개고생을 한 것을 생각해 보면 녀석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의 김현성은 회귀라는 상황을 나름대로 좋게 해석하고 있지 않았던가. 언젠가.

‘저는 당신을 위해서 회귀한 걸 거예요.’

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나?

“노, 노을빛의 검신이시여. 분노하시는 것도 이해하지만 로헨 대륙은 계획을 실행하기 전, 회귀자의 동의를 거쳤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사전에 이미 협의를 마친 상태였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뒷거래도 없었습니다. 적절한 지원과 더불어….”

“…….”

“모두 공식적인 절차를 거친 계획이었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노을빛의 검신이시여. 당신이 분노하고 계시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저희는 이 대륙에서 펼쳐졌던 비정상적인 회귀 절차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있으며 이 대륙의 의지를 대신해 사과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면 전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합니다.”

‘이제 됐어?’

저쪽은 억지로 회귀시키지 않았다자너.

하지만 김현성이 분노한 포인트는 아마 이쪽이 아닐 것이다.

‘형 걱정돼서 그런 거지?’

당연하게도 김현성의 시선은 이쪽에 머물러 있었다.

희생과 부활을 반복하고, 역경을 이겨내며, 많은 고통 끝에 얻어낸 기적적인 승리, 우연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김현성의 하나뿐인 친구는 결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희생과 부활의 성자와 노을빛의 검사의 승리는, 단순히 둘이 힘을 합쳐 외신을 몰아냈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승리가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신성한 승리였지만,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남겼다.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몸은 나날이 피폐해졌으며, 그는 부작용으로 기억상실증을 얻어야 했다. 심지어 한 번 뒈지지 않았던가.

당시에 김현성이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새끼한테는 영광스러운 승리는 아닐 거야.’

누군가에게 이 서사는 결코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라,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서사라는 거다.

“현성 씨.”

“그런 일을 다시 한번 겪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게 끝났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저들에게 휘말릴 수 없어요. 기영 씨가 도움을 줘야 하는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없긴 왜 없어. 시바. 돈 벌어야 되는데.’

“저는 다른 차원이나 타 대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그들에게까지 기영 씨가 동정심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저들의 일은 저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합니다. 저들이 기영 씨를 찾아온 것 역시, 기영 씨가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악마와 다름이 없는 이들이에요.”

“…….”

“언제나. 언제나 그들은 당신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어요. 그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도 다시 한번 더… 말입니다. 이번 일이 끝난 이후에는 또 어떤 것을 강요할지 모릅니다.”

“이건 위쪽과는 상관없는 로헨 대륙 관리자들의 독단적인 선택입니다. 노을빛의 검신이시여. 저희 측에서는….”

“그들이 당신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제 이름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저희 대륙의 관리자들은 일신의 안전을 목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

“더 이상은 자신의 신도들과 피조물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싶었습니다. 네. 노을빛의 검신의 진노를 사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로헨 대륙은 병들고, 썩어가고 있습니다. 제 신도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굶주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

“두 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주어진 시련을 극복하는 것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인간으로서 필멸자들이 신화를 만들고 자격은 얻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노을빛의 검신과 희생과 부활의 신님의 이야기라면 더욱더….”

샤넬리아 에르메스는 말끝을 흐렸다.

‘동정심 유발 작전은 아닌 것 같자너.’

얘가 뭔가 진솔해 보이기는 해.

“그 증거로써 저희는 여러분들의 어떤 요구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니, 진솔한 게 확실하네.

무려, 백지 계약서를 준다는데.

물론 다른 선택권이 없을 것이다.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설명한 그대로가 맞다면 로헨 대륙은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협의까지 100년을 기다리면 된다지만, 아마 자신들이 만들고, 꾸려낸 것들은 내칠 수 없었던 거겠지.

윗놈들 중에는 자신의 관리지구를 단순히 발판으로 삼는 녀석들도 있지만 정말로 관리구에 강한 애착을 느끼는 이들도 존재한다.

아마 로헨 대륙에서는 후자의 비율이 더 높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먹어버릴 수도 있겠는데.’

위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비빌 곳이 여기밖에 없다면, 아예 인수시키는 방법도 나쁜 방법은 아니다.

물론 대군주 3마리를 상대해야 한다는 게 조금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안전만 확보된다면 못 할 짓도 아니야. 나도 김현성 고슴도치 사태를 다시 겪고 싶은 건 아니니까.

“어떤 조건이 나오더라도 기영 씨는 당신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노을빛의 검신이시여. 로헨 대륙은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로헨 이후에 어디로 향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그들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어쩌면 다음은….”

“그렇다면 그 이후에 생각해 보면 되겠군요. 만약 정말로 저희에게 문제가 온다면 말입니다. 그전까지는 당신들의 일입니다.”

“노을빛의 검신이시여.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얘가 이렇게 거절을 잘하네.’

거절 잘 못 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에는 민감한가 봐.

근데 샤넬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아무래도 대군주 3마리가 한꺼번에 움직였다는 건, 조금 수상하기는 하니까.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위쪽과는 다르게 악마 대군주들은 기본적으로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대군주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대군주 3마리가 한 대륙에 모인 것은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다.

무언가 뒷거래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거다.

괜스레 머릿속에 들어 꽂히는 것은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금언.

‘다음은 우리일 수도 있다는 건가?’

잠깐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 사이에도 김현성과 샤넬리아 에르메스는 여전히 설전을 벌이는 중, 물론 귀담아들을 내용은 아니었다.

잔뜩 흥분한 김현성은 당장에라도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목을 칠 것마냥 눈을 부라리고 있었고, 그녀는 절박한 표정으로 김현성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필사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김현성의 모습에서 나를 타 대륙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무작정 하겠다는 빌드업도 조금 그러니까.’

정보가 부족하니까 당장은 못 뛰어들지만 일단 운은 띄어 봐야지.

“샤넬리아 에르메스 님.”

“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로헨 대륙 주민들의 상황은… 어떤가요? 그들은….”

그 질문이 위험한 질문이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일까. 커다란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영 씨!”

“잠깐… 이야기 좀 하게 해주세요. 현성 씨.”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성자 모먼트.

타 대륙이라고 한들, 희생과 부활의 신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들이 어둠에 고통받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샤넬리아 에르메스는 기회라는 듯이 이쪽과 시선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

“…….”

“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육체뿐만이 아니라 영혼마저 굶주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희망의 빛은 꺼져가고 있으며 그들은… 그들은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습니다.”

“…….”

‘눈물 나오자너.’

“마음은 병들고….”

‘그런….’

“영혼은 상처받았으며.”

‘저런….’

“일부 인간들은 악마들에게 동조하여 무차별적인 파괴와 잔혹한 학살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럴 수가.’

“그들은… 그들은 빛이 꺼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빛이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딱 그때 즈음일 것이다.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성자의 눈에서 그 어떤 것보다 순수하고 거룩한 눈물이 떨어진 것은.

그 광경을 목격한 샤넬리아 에르메스는 더욱더 이빨을 털기 시작한다.

“저는… 단지 그들에게 빛을 돌려주고 싶을 뿐입니다.”

“…….”

“그들에게 희망의 빛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우리가 아직 자신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있음을 말해주고 싶을 뿐입니다.”

성스러운 눈물 한 방울.

뚝.

정화수처럼 투명한 눈물 두 방울.

뚝. 뚝.

김현성은 화를 내며 지랄발광을 하는 타이밍을 뺏을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주연의 연기력.

“기… 기영 씨.”

녀석은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목을 치는 대신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

“…….”

“사실… 사실은 당장에라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기영 씨?”

“제가 필요한 일이라면 모든 걸 제쳐두고 뛰어들고 싶지만… 샤넬리아 에르메스 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네.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희생과 부활의 신께 의지하고 있는 식구들이 많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렇지. 알고 있어야지.’

“일단 정식으로 서신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쪽에서도 조사하고 알아볼 것도 많고…. 무엇보다 악마 새끼들 쪽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좀 알아야겠거든.’

“함부로 확답을 드릴 상황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에르메스 님.”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줘야 되는지도 궁금하고, 우리 길드원 애들은 데려갈 수 있을지, 입장 인원은 몇 명인지,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 탈출할 수 있는 경로가 있는지. 보상으로는 뭘 준비했는지, 언제 가야 하는지, 고려해 볼 게 많자너.’

그리고.

‘회귀자에 대한 정보도.’

걔한테도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써질까?

“그럼 일단 돌아가죠. 현성 씨.”

“네?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서 이러고 있기보다는 길드원들이랑 시간을 조금 더 보내야겠네요. 다 같이 모여서 간단하게 한잔 어떠세요?”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샤넬리아 에르메스 님도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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