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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77화 (1,07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77화

피크닉 (40)

‘그 정도야?’

“우욱… 죄송… 죄송합니다.”

“…….”

“우우웁. 저… 잠깐 실례….”

“괜찮습니까?”

“엘레나.”

“괜, 괜찮으니까. 잠깐… 지혜야. 우웨엑….”

‘시바. 난리 났자너. 욜루 튈 것 같자너.’

입가를 틀어막은 채로 허겁지겁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엘레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지혜 역시 이토록 참혹한 현장을 목도하게 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

씁쓸한 흔적을 보고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미안하네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기껏해야 표정 좀 찡그릴 줄 알았죠.”

“그러게.”

“아무튼 간에 원하는 건 확인했으니깐요… 결과가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알고 보니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클리셰는 못 써먹겠네요. 우리 우효열 씨는 그냥 태어나길 양아치로 태어난 것 같아요.”

“그래도… 이건 엘레나의 주관이 섞여 있으니까. 아주 작은 희망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뭐 사실 양아치냐 아니냐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이용하느냐 이용하지 못하느냐가 문제지. 사람은 고쳐 쓸 수 있어요. 의뢰 내용이 로헨 대륙의 안정화라면 사실 얘 인성이 문제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렇기는 한데. 아마 입장 절차가 아바타 형식이고 인원 제한까지 붙어 있다면 좀 까다로워질 거야.”

“능력치가 너프되는 걸 이야기하는 거죠?”

악마 대군주가 소환되었을 때, 혹은 강림이 이루어졌을 때 초월적인 존재가 본신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마 김현성이 로헨으로 입장한다 가정한다면 사용할 수 있는 힘은 거진 삼 분의 일 정도, 어쩌면 그것도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제물 소환 방식을 사용하거나 페널티를 먹을 각오를 한다면 제한적으로 위력을 올릴 수는 있겠지만….

로헨에서 그 정도 출혈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닌 것 같고… 더욱이 그쪽 관리자들이 제물 소환 방식을 허용해 줄 리도 없다.

“…….”

결국 해결책은….

“우효열을 키우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어. 누나. 거기에 괜찮은 몇 놈 더 있다면 팽해도 될 것 같기는 한데… 전투 수행 능력이 제일 쓸 만한 놈을 건지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봐야지.”

“길들여질 타입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이런 놈들은 그냥 풀어놓는 게 가장 나아요. 목줄 쥐어주면 싫다고 물어뜯을 타입이라고요. 김현성처럼 자기 목줄 좀 잡아달라 울면서 쫓아오는 타입은 아니라니까.”

“…….”

“아! 김현성도 이제는 아닌가?”

‘이 누나 봐.’

“주인만 바라볼 줄 알았던 멍멍이가 고집을 부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멍멍이가 아니라 늑대였어.”

“…….”

“아무튼 김현성 쪽도 잘 진정시켜 봐요. 어차피 김현성이야 항상 남는 인력이고 로헨 대륙에 무조건 진출시켜야 되거든요. 마지못해 가는 것보다는 협조를 구하는 게 낫잖아. 오빠도 너무 자존심 부리지 말고 적당히 져줘요.”

“…….”

“장난삼아 멍멍이니 늑대니 동물에 비유하기는 해도 일단 김현성도 사람이잖아요. 사람. 그나마 오빠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고, 실제로 김현성도 오빠를 제일 의지하고 믿고 있는데. 둘이 너무 대화가 없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갑자기?”

“정보를 차단하고 눈 가리면서 키우는 게 편하기는 하겠지만 이제는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봐요. 장담하는데 오빠 정신병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고…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오빠 인간관계는 다분히 비정상적인 면이 있으니까. 쓸데없는 충고하자면 오빠는 인간관계에서 너무 우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좀 져주면 하늘이 무너지나? 버림받는 게 무서워서 그래?”

“…….”

“지구에서의 일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에 와서 생겼는지 트라우마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멈춰 있으면 오빠 강박증 그거 영원히 그대로일 거예요.”

“누나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정신 상담소라도 열려고? 무슨 이상한 말을 하고 그래.”

“회피하는 것도 도움이 안 되고요.”

“회피는 개뿔. 누나 일이나 신경 써.”

“어떤 때는 참 어른스러운데 어떤 때는 참 애 같다니까. 아무튼 일 시작하기 전에 김현성 원상 복구시켜 놔요. 걔 요즘 하는 꼬라지 보면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더라.”

“…….”

“나는 엘레나 좀 챙겨주러 갈게요.”

‘나도 꼴보기 싫기는 해.’

아주 신났어. 아니, 신나는 척하고 있어.

엘레나는 부축하며 카페 안을 빠져나가는 지혜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새끼의 행보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 존나 어린애야 그냥. 그래도 회귀한 나이까지 합치면 꽤 먹었는데 생각하는 건 그냥 어린애 수준이야.’

지금 김현성이 하고 있는 행동은 막말로 어린애가 삐졌다고 너랑 안 놀아 하는 수준이랑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성인이 행동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은 행동, 심지어 자신의 인맥을 자랑하며 자신은 친구가 많다고, 너 없이도 즐겁게 살 수 있다고 행동하는 꼬라지는 유치원이나 초등학생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던가.

그 와중에 이쪽의 역린을 살살 건드리는 행동은 열을 뻗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라파엘이랑 개인 계정에 계속 태그하는 것도 학습했나 봐.’

아주 학습의 왕이야. 다른 건 몰라도 시바 부모님이 학습하는 방법은 제대로 가르쳐 주셨네.

손거울을 열자 별 시답지 않은 것들과 어울리며 찍은 사진들이 눈에 보인다.

어제부터 급하게 어울리기 시작한 대륙의 차기 지휘관들, 어디 어디의 천재라느니, 어느 지역의 신예라느니.

발굴되지 않은 보물이라든가, 다듬어지지 않는 보석이라든가, 차세대 이기영의 후계라느니 하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애송이 들이었다.

숫자도 꽤나 많다. 남자 셋 여자 셋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칭 엘리트 집단은 내 쪽에서도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을 정도.

지휘관, 책사, 행정관, 보급관, 현재 하고 있는 일들도 제각각으로 두더지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에 참여한 전적이 있었다.

‘아주 좋아 죽네. 이 새끼들. 하긴 저놈들이 언제 린델 삼대 길드한테 줄을 서보겠어.’

노을빛의 검신님이 친히 라베하로 초대해서 같이 식사하고 토론하는데 말이야.

아마 그 행동만으로도 이력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애초에 저 모임도 파란 길드 워크숍이니 나발이니 하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이벤트일 테니까.

문제는 이 새끼의 이 행동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파란 부길드마스터가 곧 은퇴한다든가, 이기영이 파란 길드라는 둥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든가.

파란 길드가 인재들을 쓸어가려고 작정을 했다든가 하는 종류의 찌라시가 돌고 있는 중.

덕분에 언론담당관 스미스 대령은 휴가를 전부 즐기지도 못하고 업무에 복귀하게 되어버렸다. 물론 스미스 대령은 복귀하는 걸 원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씁쓸한 사건이었다.

‘이 새끼는 누구야? 마사카 히로미? 왜 이렇게 열심히 근황을 올려?’

[파란 길드마스터와 함께 식사를 하며 대륙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재능 있고 유능한 이들과 함께, 화를 내고, 싸우고, 웃으며 진지한 토론을 펼치는 시간은 피곤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한 많은 것을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지요. 우리들은 왜 소환된 것이며, 소환자로서 어떻게 이 대륙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까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중략….]

‘그냥 개소리네.’

하지만 베니고어넷에서는 꽤 많은 팔로워들을 보유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좋아요가 찍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사실 이걸로 볼 필요도 없기는 해.’

라베하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네. 현재의 전술 교본에서 일부 수정을 고쳐야 하는 점이 보입니다. 지휘관들의 역량이 올라가고 그들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만큼… 이제는….”

“전문 교육 기관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예. 몇몇 대도시들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표적으로….”

“아직 제도적인 장치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던전 공략 의뢰나 퀘스트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거든요. 아직까지는 행정직군들이 사회적인 약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점점 변하고는 있지만 그들을 대표하는 입장에 있는 만큼 저희들이 힘을 실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죠.”

이제 막 이름나기 시작한 병아리들이 누구를 대표한대. 지혜 누나가 꼴 보기 싫다고 하는 건 아마 저런 모습이겠지.

구태여 테라스에 앉아 토론 같지도 않은 토론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 심지어 김현성은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있다.

“생산직군에 대한 처우는….”

“장인길드조합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지만 저희 행정직군들은 그렇지….”

‘거기서 뭐 이야기한다고 달라지겠냐. 싸구려 탁상공론에서.’

“그러고 보니 제가 참여했던 13구역 전투가 생각나는 군요.”

“아. 저도 교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 시간 나오죠? 뭐 어느 교본에서 나왔는데 저러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겨우 사망자가… 20퍼센트였다니… 경이로운 수치였죠.”

“그래 봤자 소규모 전투였을 뿐입니다.”

‘20명도 아니고 20퍼센트래. 웃겨서 기가 찬다. 이 새끼들아.’

“하지만 정말 대단했어요.”

김현성 살짝 현타 온 것 같기는 해. 실제로 나는 누군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도통 감을 못 잡고 있는 것 같거든.

하지만 이쪽을 발견한 이후에는 눈에 띌 정도로 표정을 밝히며 녀석들에게 친절을 베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주제에 맞장구를 치는 모습. 솔직히 어처구니없어 기가 차지도 않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맞불작전은….’

맞는 선택지라고 볼 수는 없다.

‘나까지 유치해지는 것 같자너.’

인맥 자랑하면 또 빠지지 않지만 굳이 김현성의 장단에 맞추어 줄 리 만무.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김현성을 슬쩍 바라보다 혼자 발걸음을 옮긴다.

세상 쓸쓸함을 전부 다 담은 듯한 발걸음으로. 마치 따돌림을 당한 것 같은 얼굴로 말이다.

그래. 이기영은 지금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거다. 라베하는 넓고 활기차고, 밝은 도시지만 지금의 이기영에게 라베하는 어울리지 않는다.

‘날 버렸어. 시바.’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고.

그 누구도 이기영을 찾지 않는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가장 처절한 배신을 당한 듯한 뒷모습.

‘나쁜 새끼.’

그 모습으로 거리를 거닌다. 마침 해가 막 지는 시점에 기영이는 천천히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본 것은 당연한 수순, 누군가와 함께 바라보던 풍경이었지만 이제는 혼자 바라보게 된 노을.

눈물이 왈칵 튀어나오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정을 실린 멍한 눈동자와 현 시간 이기영이 느끼고 있는 처절한 배신감과 슬픔은 굳이 회사설로 보내지 않아도 녀석이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짧은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지 않은가.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멍하니 아래로 내려온다.

혼자 바라보는 노을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슬프게 느껴졌다.

‘보이니.’

내 모습이 보이니. 이 새끼야.

니가 배신하고 상처 준 하나뿐 인 친우의 쓸쓸한 모습이 보이니?

기영이는 지금 슬프다.

당장에라도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감정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기영이는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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