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78화
피크닉 (41)(삽화)
언제나 슬퍼 보이는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타인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이 포인트.
그 와중에도 표정엔 한 줌의 슬픔을 떨어뜨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기영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미묘한 변화, 그러나 이기영을 잘 아는 이들은 뭔가가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의 차이.
이쪽과 가깝게 지내고 있는 파란 길드의 인원들이 위화감을 깨닫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기존 멤버들이야 몇 초간 먼 곳을 바라보는 것 정도로 충분했고 신입 길드원들의 경우에는 조금 더 티를 내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물론 이기영에게 찾아온 슬픔의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은 없다.
‘김현성이자너.’
연회장에서 일어났었던 ‘그 사건’. 김현성과 이기영이 갈등을 일으킨 그 사건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부길드마스터의 행동이 달라지지 않았던가.
‘전부 다 김현성 때문이자너. 이 새끼가 범인이자너.’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표정, 눈물을 흘렸는지 퉁퉁 부은 눈, 가끔씩 기운 없이 행동하는 모든 모양새가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홀로 노을을 바라보고 쓸쓸한 뒷모습을 보여주는 기영이와는 대조적으로 녀석은 매일매일 바깥에 싸돌아다니면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애새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시점.
이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그리폰을 타고 날아가면서 봐도 명백했다.
원래….
‘이런 싸움에서는 지인들로 정치하는 게 기본이야.’
사실 길드원들 같은 경우는 눈치를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그저 이 태풍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름대로 연차가 쌓여 발언권이 있는 이들은 화해를 종용하는 쪽이었으니까.
연회장에서 술을 먹고 난동은 부린 것은 명백히 김현성의 잘못이었지만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알 수가 없는 상황.
이러다가 말겠지 하는 경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길드원들의 입장에서는 지켜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싸움이 조금 격해지는 것 같아 출동했던 것이 화해 원정대였고….
‘아마.’
내 쪽으로는 박덕구가 붙고, 김현성 쪽으로는 조혜진이 붙었을 테고….
각자 찾아가서 이해해야 된다고, 화해하라고 말하면서 최대한 중재하는 입장에 서려고 노력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중재자로서 균형을 잡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에게는 동정 여론이, 누군가에게는 질타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말해야. 겠어.
-하지만… 김예리 님.
-이건 아닌 것 같아.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아무리 기영 오빠가. 잘못 했다고는 해도. 이건 아니잖아. 이건… 이건 아니잖아.
‘그래. 그거야 예리야.’
-사실 연회장에서 먼저 실수를 한 것도 현성 오빠야.
-저희들이야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길드마스터가 부길드마스터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걸 저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을 했었지만… 확실히 지금 상황을 보면… 길드마스터가 너무한 것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도 이번에는 길드마스터가 심하셨다고 생각해요. 연회장에서 실수는 실수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후처리가 더욱 아쉽다고 해야 말해야 될까요.
-역시 정연 언니. 생각도 그렇지?
-응, 그렇지. 어제 덕구 씨도 얼마나 화를 내던지, 말리느라 혼났다니까. 아마 아주버님이 그만큼 안쓰러워 보이신 거겠죠. 최대한 밝은 척하고 계신 것 같았지만… 어젯밤에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신 모양이에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버님 됐자너.’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나는 오늘 말하러 갈 거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예리 씨 뜻이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이번에는 길드마스터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군요.
우리 예리 너무 잘 자랐자너.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
다른 쪽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저, 알프스 선배님.
-응?
-부길드마스터와 길드마스터는 괜찮을까요?
-글… 글쎄.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물론 두 분이서 가끔 부딪치셨다는 소리는 들었고, 싸운 적도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심한 건 처음 본 것 같아. 박리안 님도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까 행동에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고…. 이렇게 분위기가 냉각된 건 처음인가 봐. 벨리에도 조심해.
-그… 그래야겠네요. 그, 그런데 선배님. 이건 길드마스터가 실수하신 게….
-안 돼.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도 말하면 안 되지.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냥 이번 일이 잘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될 것 같아. 조혜진 님도 많이 노력하고 계시는 것 같으니까.
-멍! 멍!
-흰둥아! 흰둥이도 조용히 해야 돼.
-멍! 멍! 멍! 멍!
-저번처럼 길드마스터 지나가시는데 짖으면 안 돼! 알겠지?
‘이미 여론은 내 편이자너. 흰둥이도 내 편이자너.’
덕구야 이미 지속적으로 김현성과 면담을 신청하고 있는 중이고. 조혜진은 김현성을 만나 여러 번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이렇게 정치질할 필요도 없어.’
이미 김현성도 똥줄 타고 있었으니까.
혼자 노을을 보며 쓸쓸한 표정으로 내려오는 설정이 먹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잘 먹힐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안 먹히면 안 되지.’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처럼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딱 봐도 김현성이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상황.
하루에 몇 번씩 여신의 손거울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끔 방문 앞을 두리번거리며 고민하는 듯 한 얼굴을 보일 때도 있었다.
애초에 김현성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세웠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친우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를 원해서 아니었던가.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고통을 줘야 한다니 김현성 자신 역시 자신의 계획의 회의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은 되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떠나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오, 오, 오빠. 괜찮으세요?”
“당연히 괜찮지. 하얀이가 같이 있어 주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
“그, 그래요?”
“응, 빈말로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마음이 놓여.”
그 와중에도 김현성을 칭찬해 주고 싶었던 점은 로헨 대륙에 관해 길드원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
‘비밀은 지켜주네.’
알릴 필요도 없이 자신의 선에서 처리하겠다는 의지인지, 내가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건지, 본인이 악역을 자처하겠다는 것인지, 내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김현성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여, 여기 가만히 계세요. 제가 식사 가져올 테니까.”
정하얀의 친절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김현성 쪽으로 망원경을 돌리자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여전히 여신의 손거울을 빤히 바라보는 모습. 테이블에 홀로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여신의 손거울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다.
-후우….
라고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다시 한번 여신의 손거울을 바라보다 이내 그것을 손에서 내려놓는다.
메시지를 보내도 어차피 답장하지 않을 거지만….
-제길….
‘내가 받아줄 줄 아나 봐. 메시지 보내면 뭐 다 해결되는 줄 알아?’
-제기랄!
괴롭다는 듯이 머리를 부여잡는 행동은 왠지 모르게 부끄럽기 짝이 없다.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신파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배우의 비쥬얼과 진지한 눈빛이 합쳐지니 그럭저럭 봐줄 만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손거울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놓은 녀석의 시선이 닿은 곳은 녀석의 수납장.
-후우….
수납장에서 꺼낸 것은 저번에 김현성을 취하게 만들었던 독주였다.
-1회차에서도… 이렇게 마시지 않았었는데.
‘아, 이 새끼.’
술 때문에 그 사달이 났다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인지, 청승을 떨며 연거푸 술을 들이켜기 시작한다.
‘술을 끊게 해야 돼.’
신성으로도 마력으로도 취기를 제어하지 않고 오히려 취하기를 원하는 듯한 모습은 정녕 이 새끼가 내가 선택한 그 회귀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
-후우….
알콜 중독자인 줄 알았으면 가면의 영웅도 녀석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 오빠. 소, 소라야. 둘 다 이리 와. 식. 식사 준비됐어.”
“정하얀 님….”
“…….”
“갑자기… 눈물이 나오네요. 정하얀 님이… 요리도 다 해주시고….”
“헤… 헤헤헤… 이렇게 다들 모여 있으니까. 너무 좋다.”
“너무 맛있어요. 정하얀 님.”
“오, 오빠는요?”
“나도….”
“…….”
“…….”
“기, 기운 내세요. 오빠.”
“네. 부길드마스터. 부길드마스터 잘못이 아니잖아요.”
“현성이 오빠가… 좀 나, 나, 나빴죠.”
“아니. 그냥 서로 잠깐 오해가 있는 정도라서… 하얀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힘들면 언제든지 말… 말씀해 주세요.”
‘말하면 어떻게 할 건데.’
불안하자너.
‘여기서 너무 이러면 안 되겠다. 하얀이랑 현성이 싸움 나겠다.’
세계관 최강자들의 대격돌을 실시간으로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적당히 포장해 주며 괜찮은 척, 오히려 힘들기 때문에 하얀이에게 계속해서 상주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자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며 저녁을 즐기는 하얀이가 보인다.
‘시바.’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계속해서 독주를 들이켜는 중, 식사 시간이 끝나고.
“소, 소라도 자고 가야지.”
“네?”
“직원분이 엑, 엑스트라 베드 가져와 주신대.”
“아…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 어떻게… 정하얀 님 오늘 그….”
“그래도….”
잠자리에 들기 전 작은 소동이 지나갈 때까지.
이 새끼는 계속해서 독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너무 많이 마시는 것이 아닌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점.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깼을 때도.
이 새끼는 계속해서 독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지금 몇 시야?’
혹시 아직까지 마시고 있는 거 아니지?
[기영 씨… 혹시 주무십니까.]
심지어 몇 시간 전에 문자도 와 있는 상황.
이윽고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에는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쾅 쾅 쾅!
“기영 씨… 주무십니까?”
“…….”
“기영 씨! 혹시 주무십니까! 계십니까!”
‘아니, 이 새끼 술주정 버릇되겠다.’
방금까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던 정하얀이 자리를 박차고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익!”
“기영 씨!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이….”
“나… 나, 나가요!”
“하얀 씨. 늦은 밤에 정말로 죄송합니다. 잠깐… 기영 씨 좀… 히끅… 드리고 싶은 말이….”
“이, 이게 무슨 추…추태예요! 술, 술, 술 냄새 풍기면서! 오, 오, 오빠 주무신다구요!”
“히끅. 기영 씨… 기영 씨… 잠깐이면… 잠깐이면 됩니다.”
‘아, 진짜 이 새끼 알콜 이슈 개 에바야.’
*다음 페이지에 단체 인물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한복 단체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