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79화
피크닉 (42)
충분히 감성적일 수 있는 시간, 술 먹고 남의 방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시간 새벽 2시 33분.
실제로 어눌한 발음으로 중얼거리는 김현성은 정말로 어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너,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히끅. 죄송합니다. 하얀 씨. 잠깐만….”
“이, 이 사람 안, 안, 안 되는 사람이네요! 그, 그렇게 안 봤었는데… 나, 나가세요! 당장! 왜 이렇게 경… 경… 경우가 없어요! 사람이!”
“하얀 씨… 그런 게 아니라.”
“오,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 있으시면 내일 아침에 오세요! 그,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힘든 사람한테… 염치가… 있… 있어야죠웃!”
‘죠웃은 뭐야. 하얀이 너무 흥분했어. 온도 좀 내려.’
“제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얀 씨.”
“기… 기가 차서 정말… 사과는… 저한테 하는 게 아니죠!”
“하얀 씨. 그러니까. 지금 사과를… 하고 싶….”
‘이 새끼 진짜 막장이야. 완전 무대뽀야. 뭐가 됐든 얘는 알콜 이슈부터 해결해야 돼.’
술 마시고 다짜고짜 남의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녀석의 모습은 전형적인 불청객, 혹은 주정뱅이의 모습.
그 모습 어디에도 대륙을 구한 영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누가 지금의 김현성을 보고 노을빛의 검신을 떠올릴 수 있을까.
노을빛의 검신과 주정뱅이의 신 김현성의 공통점은 붉게 물든 노을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노을마냥 붉어진 얼굴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 새끼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은 이미 알콜에 절은 듯했고. 초점이 없는 눈은 이 새끼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심지어 저번보다 더 취한 것 같은데.’
김현성 정도의 검사가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라면 술을 얼마나 들이켠 것인지 상상하기 힘들다.
지금도 계속해서 비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혼자 서 있기도 힘이 드는지 벽에 손을 짚고 있었고, 방 안으로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모양새 역시 이상했다.
자꾸만 딸꾹거리고 있었고 당장에라도 오열할 것처럼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상황.
이 새끼가 갑작스레 대성통곡을 하는 게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한 6시부터 마시기 시작한 것을 확인했으니 거진 8시간 동안….
‘이 새끼 다음 날 아침에 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이러지?’
아니, 어쩌면 완전히 필름이 끊긴 상태일 테니 기억도 못 하겠네.
“기영 씨… 기영 씨….”
‘이 새끼 어떻게 이렇게까지 찌질할 수가 있냐.’
김현성의 바닥까지 봤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바닥 밑에 더욱더 깊은 심연이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습… 우욱….”
“그러니까… 지금은….”
‘그 와중에….’
신기했던 것은 김현성이 본래 우월한 종자였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는 것.
나도 외모지상주의가 여기서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김현성이 고주망태가 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사연 있는 주인공이 망가진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막말로 일반인이 저런 모습을 보였다면 정이 뚝 떨어지는 것으로 모자라 당장에라도 경비병들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 아니었던가.
어째서 주연 배우들을 모조리 미남 미녀들로 섭외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만약 저 자리에 있는 게 김현성이 아니라 박덕구였다면… 아니, 덕구는 귀여운 면이라도 있지, 웬 주정뱅이 한 명 저 자리에 데려다 놨으면….
‘극이 너무 리얼리티 했을 거야.’
그 와중에도 상황은 더욱더 절정으로 치닫는 중, 갑작스러운 소란에 다른 방에 있었던 이들이 전부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길드마스터. 너무 취하셨습니다.”
“혜진 씨. 저… 꼭 할 말이….”
“길드마스터… 방으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형씨. 이러지 말고 들어갑시다. 거, 한밤중에 이게 무슨 소란이요. 형씨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날이 오늘만 있는 게… 아니지 않소. 사과를 하고 싶으면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야지… 이러면 안 되지. 거, 정신 좀 차리쇼. 대관절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이요? 실수도 한두 번이어야 실수지… 이런 모습을 형님이 보면 어쩌려고….”
‘신입 길드원들은 다른 층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네. 예리도 그렇고.’
아무리 그래도 벨리에랑 알프스 앞에서 저러면 길드 마스터로서의 체면이 안 서자너.
혜진이랑 덕구같이 볼 거 못 볼 거 다 같이 경험한 원년 멤버가 말리고 있어서 다행이지.
“그, 그, 그래요! 내일 아침에 제정신으로 찾아오세욧!”
“저… 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또렷합니다. 믿어주십시오.”
“아니, 그러지 말고….”
“그 어느 때보다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아영, 김창렬, 한소라처럼 2기 멤버들에게도 굳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저 사태에 난입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소라 역시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똘망똘망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 생각나자너.’
율하랑도 이랬었는데.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자는 척 방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어린 유년 시절의 기억, 아마 한소라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이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다.
“나가보지 않으실 거예요? 부… 부길드마스터?”
“나가봐야죠. 조금 더 있다가.”
“아… 네.”
“소라 씨가 먼저 나가 봐요.”
“네? 제가 가서 뭘 어떻게….”
“그거야 소라 씨 재량이지.”
“부, 부길드마스터가 나가면 해결되잖아요.”
“원래 주인공은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 저 길드마스터한테 찍히면 어떻게 해요?”
“하얀이가 있는데 뭔 걱정을 그렇게 해요. 어차피 소라 씨는 찍히든 안 찍히든 업무 고정인데. 어차피 쟤 내일 아침 되면 누가 지 말렸는지 기억도 못 할 거예요. 그러니까 빨리 나가봐요.”
“좀… 좀 그런데. 길드마스터는 왠지….”
“네?”
“좀 무서워서.”
“아니, 일단 가줘요. 현성이 쪽에 붙기 부담스러우면 하얀이 말리는 척이라도 하든가요.”
당연하지만 한소라가 나가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다. 아직까지도 김현성은 생떼를 부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한소라의 역할은 그저 정하얀이 너무 흥분하지 않게 조절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정하얀 님! 진정하세요!”
“소라야! 놔, 놔! 이…이건 아니잖아! 얼마 만에 오붓한 밤이었는데!”
‘결국 그게 불만이었자너.’
“정하얀 님! 이러시면 안 돼요!”
“멍!”
‘흰둥이 난입했자너.’
“기영 씨! 기영 씨!”
“멍! 멍! 멍! 멍! 멍! 멍!”
술 취한 사람을 보면 짖는 개 흰둥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마냥 상황은 더욱더 개판으로 치닫고 있는 중.
여기저기서 높은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취객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한 시점.
“제가… 드리고 싶은….”
“멍! 멍! 멍!”
이기영이 등장할 시점이었다.
“기영….”
거울을 보고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채로 밖으로 몸을 옮기자 일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조용해진 장내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있어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된다.
상처받은 기영이의 모습. 눈이 조금 부어 있고, 왠지 모르게 처연해 보이는 듯한 분위기는 좌중을 압도한다.
“형님… 형님은 들어가쇼. 여기는… 내가….”
박덕구의 말에는 슬쩍 고개를 젓는다.
“오, 오빠.”
갑작스레 다가와 몸을 부비며 친근감을 드러내는 흰둥이는 그간 투자한 간식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흰둥이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목표는 눈앞에 있는 주정뱅이였으니까.
“기… 기영 씨.”
“많이 취하셨네요.”
“네….”
“왜 이렇게 많이 드셨어요?”
당연히 기영이는 김현성을 나무라지 않는다. 오히려 달래는 듯한 말투.
저번에 사고 친 이후에 왜 사과를 하지 않았던 건지. 어째서 그동안 이기영을 무시한 채로 애송이들과 놀아났던 건지, 그토록 이기영을 비참하게 만들었어야 했던 건지….
상처받은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은 채로 김현성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게 들리기도 했지만 많은 감정들을 내포하고 있는 듯했다.
“기영 씨…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
“저는…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뭘.’
“기영 씨가… 제가 가진 짐을 함께 들어주신다고… 더 이상 혼자 책임질 필요 없다고… 말씀해 주셨던 걸…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힘없이 웃어주기.
“저도… 기영 씨의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기영 씨가 가지고 있는 책임과 의무를 함께 지고 싶었습니다. 기영 씨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었고. 기영 씨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지지해 주고 싶었지만….”
“…….”
“저는… 저는 못난 놈인가 봅니다. 흐윽… 끄윽….”
스스로 내뱉은 팩트에는 흰둥이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야 울지 마. 왜 울어.’
“저는 나쁜 사람인가 봅니다. 저도… 저도 함께 짐을 들어드리고 싶지만… 저는… 저는 무서운 게 너무 많습니다. 무서운 게 너무 많아요. 제 선택이 맞는 건지….”
“…….”
“혹시라도 제가 실수를 할까 봐. 잘못될까 봐… 일을 망친 경험이 너무 많아서… 제가… 저는 강하지 않은 사람인가 봅니다. 흐윽… 제가 잘못되는 건 상관없지만….”
두서도 없고 뭔 말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대충 김현성이 뭔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전해져 온다.
이쪽의 선택을 지지해 주고 싶지만 혹시나 이기영이 잘못될까 지지해 주기 무섭다는 이야기.
김현성의 진심 어린 고백에 몇몇은 공감하는지 잠시 숙연해진 장내가 보이기는 했지만….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일단 들어가서 주무세요. 현성 씨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대충 이해할 것 같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해요.”
“기영 씨.”
“많이 취하셨어요.”
“전 취해서 이러는 게….”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술은 이제… 그만 마시기로 하고요.”
“네?”
“아무래도 술은…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네. 이제… 마시지 않겠습니다. 네….”
“약속한 거예요.”
“네. 약속… 했습니다. 약속입니다.”
“어서 주무세요.”
“…….”
그 말이 안심이 됐던 것일까. 노숙자마냥 바닥에 널브러져 중얼거리던 녀석은 이윽고 눈을 감고 천천히 수마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 방에 제압했자너.’
“형님. 형씨는….”
“네가 좀 옮겨.”
“거… 알겠소. 형씨가 이럴 줄 몰랐는데… 아무튼 간에 욕봤소. 내가 내일 아침에는 형씨한테 이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둘 테니까. 안심하고.”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고… 아무튼… 하얀아. 우리는 먼저 들어가자.”
“네? 네. 오빠.”
김현성 이 새끼. 다 끝난 줄 알 거야.
“멍!”
내일 아침에 일어나고 화해할 생각에 안심하고 시바 쿨쿨 자고 있을 거야.
박덕구에게 업힌 채로 세상 행복한 얼굴로 자고 있는 김현성의 미소가 눈에 띄었다.
정말로 모든 갈등이 해결된 것이 확실하다는 얼굴. 기억하고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정말로 행복해 보인다.
‘이대로 끝난 줄 아나 봐.’
나 속 좁자너.
아마 당분간 이기영이 김현성을 독대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분명히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이 새끼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로헨 대륙으로 훌쩍 떠나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