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80화
피크닉 (43)
무언가 따뜻한 감각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햇빛이 방 안을 환하게 비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말로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각이 없었지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방 안을 둘러본 것은 당연지사. 조금은 처참하게 보이는 풍경이다.
여기저기에 술병이 나뒹굴고 있는 것이 가장 먼저 보인다. 테이블, 바닥, 심지어 침대의 한쪽에도 빈 술병들이 놓여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체불명의 쓰레기들이 방 안에 가득 들어차 있다.
심지어 여기저기에 가구들이 파손되어 있는 흔적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짐승이 사는 곳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스스로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간 정말 짐승처럼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
“…….”
‘은혜도 모르는 놈.’
어째서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변명을 해보자면 상황이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었다.
타 대륙으로 넘어가 고통받는 이들을 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편협한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지금의 평화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며 얻은 평화였던가. 단순히 희생과 부활의 신이 대륙을 구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엔딩이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들은 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야 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아직도 속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썩어 문드러져 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상처받은 그 사람에게 있어 현시기는 이제 막 그 아픔을 회복하는 시기. 심지어 그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템플러들 때문에 다시 한번 고행길을 걸어야 했다.
이전과 비슷한 길을 한 번 더 걸어야 한다니, 스스로 가시밭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니, 새로운 회귀자가 있는 대륙을 다시 한번 구해야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불만을 가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리라.
문제는 그 불만을 표현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이었다.
“기영 씨.”
강하지만 여린 사람. 매번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지만 그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샤넬리아 에르메스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그 역시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괴로웠을 것이다.
이기영이라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고, 타인의 불행과 아픔을 모른 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행동의 결과가 선함으로, 세상의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세상의 아픔을 치료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사람이다.
어쩌면 샤넬리아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자신보다 더욱더 혼란스러워했던 것은 기영 씨일지도 모른다.
내가 힘들었을 때 그가 항상 내 옆에 있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어.’
친우로서 부끄러운 일이지 않은가.
오히려 그를 무시하고 배척했다. 짐을 함께 들기는커녕, 오히려 짐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홀로 노을을 보는 것을 모른 척했고 그를 한계로 내몰았다. 애써 무시하면서 기댈 곳 없는 이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
그래.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 오늘…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셨으니까.
불현듯 떠오른 어제의 기억이 부끄럽기는 했지만.
‘용기 내기를 잘했어.’
그 방법이 다소 추하고 거칠었지만, 술에 취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않았던가.
계속해서 냉전 상태를 유지하기보다는 대화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합의점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다면 다른 방법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둘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테니까.
널려 있는 술병들을 하나씩 하나씩 치우기 위해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기영 씨가 술을 끊으라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이 났지만 그래도 화해를 한 게 녀석들 덕분인 것 같아 쓴웃음이 튀어나왔다.
[기영 씨.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이 많지만 직접 만나서 드리고 싶습니다. 그간 밀린 이야기들도 있고… 또 정식으로… 사과도 드리고 싶습니다. 편하신 시간에 메시지 남겨주시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문자를 보내고 잠깐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여전히 메시지를 읽지 않고 있는 상황.
어제 새벽에 자신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 테니, 아마 답장이 많이 늦겠지.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또 로헨 대륙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그래. 샤넬리아 에르메스.’
그녀가 있었지.
마침 시간이 남는다. 여기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그녀에게 로헨 대륙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놓는 게 좋지 않을까.
직접 나서는 입장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자 익숙한 인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혜진.’
불현듯 어제 저질렀던 일들이 떠오른 것은 당연지사. 조혜진 역시 어제의 일을 의식하고 있는 듯 움찔하기는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혜진 씨, 그리고… 알프스 님도 계시군요.”
“왈! 헥 헥 헥! 왈!”
“길, 길드마스터를 뵙습니다.”
“네. 길드마스터.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네. 혜진 씨. 갑작스럽지만… 혹시 샤넬리아 에르메스 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왈! 왈!”
“아직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슨 용무라도.”
“예.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 연락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집무실에서 기다린다고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리고….”
“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길드마스터.”
“…….”
“사과는 저보다는….”
“네. 기영 씨에게도 따로 사과드릴 생각입니다. 여러모로 추태를 부려 면목이 없습니다. 기영 씨에게도… 혜진 씨에게도 다른 길드원들에게도 말입니다.”
“…….”
“…….”
“길드마스터.”
“네?”
“모든 사람은 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 감사합니다.”
“분명히 부길드마스터도 분명 용서하셨을 겁니다.”
이후에는 곧바로 집무실로, 가는 길에 기영 씨가 머무르고 있는 방이 눈에 들어왔지만 함부로 문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많이 피곤하시겠지.’
아마 점심 식사를 할 때 즈음에 일어나시지 않을까.
여신의 손거울이 울린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이후였다.
-길드마스터.
-네. 혜진 씨.
-샤넬리아 에르메스 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네?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 샤넬리아 에르메스 님의 모습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머무르시는 방에 들어가 봤지만 방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깥에 나간 흔적도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창렬 씨를 불러 방 안의 흔적들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네?
불길한 생각이 든 것은 순식간이다.
-일… 일단 알겠습니다.
-혹시 라베하 안에 계신 것은 아닌지 리안 씨와 예리가 찾아보는 중입니다. 발견되는 즉시 연락드릴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아! 라베스 사막에는 예리를 파견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한 좌표는 제가 보내드릴 테니… 그리고….
-그럼….
-혜, 혜진 씨.
-네.
-혹시 기영 씨는….
-네? 부길드마스터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후에도 무어라 말을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머릿속에는 그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겠지만, 상상하기 싫은 일이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했었지만….
머릿속은 자꾸만 최악의 상상을 하게 된다.
‘내가 어제 뭐라고 했었지?’
짐을 함께 들기가 무섭다고 했었다. 겁쟁이라서 죄송하다고… 분명 그런 뉘앙스로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머릿속에 흐릿한 파편만 남아 있어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명… 분명 자신은 무섭다고 이야기했었다.
어쩌면… 어쩌면….
“아! 파란 길드마스터.”
“…….”
“오늘 워크숍에서 토의할 주제에 대해서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파란 길드마스터. 오셨군요. 오늘은 조금 일찍 오셨습니다? 하하.”
“김현성 님.”
어쩌면….
“던전 원정 중 보급 혁신을 불러올 수 있는 기획이 있습니다. 아직은 기초 단계에 불과하지만… 아마 파란 길드마스터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빨리 말씀드리고 싶은데 오늘은 조금 일찍 모이시는 것도….”
“파란 길드마스터! 원정 중 보급도 보급이지만 저한테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거든요. 혹시… 특수 개체들을… 키메라….”
“하하. 아침부터 너무 열정이 넘치시는 거 아닙니까? 파란 길드마스터도 조금 쉬어야 되지 않습니까. 모두들?”
“대륙 발전을 위해서인데 밤낮 가려서 되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파란 길드마스터. 하하하.”
“…….”
“꺼져.”
“…….”
“…….”
“네?”
“파란 길드마스터? 방금 뭐라고….”
“꺼지라고.”
“아… 으….”
“…….”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녀석들을 몸으로 밀어낸 이후에 곧바로 기영 씨의 방으로 향하려고 했지만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몇십 초도 걸리지 않은 거리일진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마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떠올리기 싫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기영 씨… 기영…. 기영 씨….”
어제 자신이 한 말이 다른 의미로 들리지는 않았을까.
“기영 씨… 저… 저 김현성입니다.”
지쳤다고, 짐을 함께 들기 무섭다고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주면 무언가를 받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영 씨 들리십니까? 하얀 씨… 하얀 씨 계십니까?”
안에서는 아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심지어 인기척도….
“기영 씨! 하얀 씨!”
언제나 느껴지던 연결되어 있는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연결이 끊어져 있었던 거지.
내 눈은… 내 눈은 그대로인 건가….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손거울을 들여다봤지만 메시지가 도착해 있을 리 만무, 통화를 걸어봤지만 연결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닐 거야.’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천천히 문을 열자.
‘아닐 거야….’
“아아….”
“…….”
“제길… 제기랄….”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시야에 비쳤다.
* * *
“시바 여기 어디야.”
“…….”
“하얀이는 어딨어? 하얀아. 소라 씨?”
“…….”
“하얀아… 소라 씨?”
“…….”
“…….”
“시이바….”
[이기영 님께서 튜토리얼 ‘초보자의 시련’에 입장하셨습니다.]
“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