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86화
로헨 대륙 (6)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혼란스러웠다.
그것 외에는 현재의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것인지, 저기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이들의 텐션에도 적응할 수도 없었다.
‘촉수 슬라임은 뭐야.’
튜토리얼 던전에 몬스터 디자인. 특히나 저 촉수 슬라임의 기획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새끼가 저런 걸 풀어놓았단 말인가.
‘대체 뭐냐고….’
[꽃과 풍요의 여신♥이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 기영이가 위험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전투는 격렬했다.
너무 격렬하지 않은가 걱정이 들 정도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접점이 펼쳐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 전투에서 대부분의 게니우스들이 원하는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천부적인 전투능력을 자랑하는 모습도, 재치 있게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모습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그들을 물리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발버둥 치고 있는 필멸자 하나와 그를 둘러싸 압박하고 있는 촉수 슬라임들.
-하으읏!
[노을빛의 검신♥이 비명을 지릅니다. 적들에게 분노를 표현합니다.]
어설픈 칼질은 슬라임들 특유의 탄력 있는 몸을 가르지 못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평범한 성인 남성의 근력이라면… 아니… 아직 어린아이의 근력으로도 충분히 슬라임에게 대미지를 입힐 수 있을 터.
심지어 노을빛의 잡신이 내린 성물의 예기가 화면 밖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던가.
플레이어와 함께 레벨이 높아지는 성장형 아이템이라고 한들 튜토리얼에서 기본적으로 지급하는 아이템과는 수준 차이가 나는 것이 극명하다.
그 아이템을 가지고 촉수 슬라임에 고전하고 있다니….
‘연기야.’
-이야아아아앗!
[노을빛의 검신♥이 그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외칩니다!]
[심연 속의 가장 낮은 심연♥ 이 초조해합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적을 내리고 싶어 합니다.]
-괜, 괜찮아요! 심연 님!
“…….”
-촉수… 촉수가앗… 아아아아앗!
모든 게 연기일 것이다. 게니우스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저게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분명히 저 영악한 녀석이 무언가를 노린 것이 분명하다.
[노을빛의 검신♥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쥡니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두 눈을 가리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일까.
-아학!
이게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것일까.
촉수 슬라임들과 뒤엉킨 채로 어떻게든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 모습은 처절하고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만든다.
‘이길 수 있잖아. 코인창놈. 할 수 있잖아! 이… 이겨낼 수 있잖아.’
코인창놈이 몸을 일으켜 한 녀석을 떨쳐낸 것은 바로 그때.
-하아아아압!
가는 기합 소리와 함께 노을빛으로 빛나는 검을 촉수의 핵에 꽂아 넣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절로 손을 움켜쥐게 만드는 반격.
물론 이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머지 두 마리의 슬라임이 그를 향해 검은 손길을 내밀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패턴에 익숙해졌는지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이미 그의 몸은 촉수 슬라임들의 점액질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몸은 둔해지고 점점 호흡도 가빠지는 모습, 상처를 입었는지 온몸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은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이 그의 체력을 갉아먹고 있다. 하지만….
“이길 수 있어!”
저도 모르게 나온 목소리.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가죽을 만지는 부드러운 손♥이 할 수 있다고 외칩니다. 남아 있는 힘을 전부 사용하라고 조언합니다.]
[호수에 비친 별무리♥ 역시 우리 기영이를 응원합니다.]
순식간에 응원 메시지가 쏟아진다. 너무 많아 일일이 다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응원하는 게니우스들이 많다. 자신 역시 그중에 하나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노린 거야.’
처절하고 드라마틱한 승리를 설계했다고 가정한다면… 너무 그를 과대평가하는 것일까.
겨우 촉수 슬라임 3마리를 사냥하는 것에 희로애락을 전부 다 담아 놓은 것이 가능한 행동일까?
많은 이들이 녀석을 응원하고 있지만 순수한 의미로 응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금색 성좌의 앉은 이♥가 재미있다며 웃습니다. 오랜만에 즐거운 쇼를 본 것 같다며 만족스러워합니다.]
그냥 즐기는 이들.
[가녀린 촉수 여왕♥이 더 많은 촉수를 원합니다. 너무 싱거웠지만 쓸 만한 작품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가녀린 촉수 여왕♥이 5천 코인을 후원합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촉수에 집착하는 이들.
[삐뚤어진 수호자가 플레이어 이기영을 비웃습니다.]
[초승달 아래에서 우는 늑대가 침을 흘리며 이기영을 손가락질합니다.]
그를 비웃고 멸시하는 이들.
‘미친… 후원자 순위에 못 들면 하트도 안 달아주는구나.’
철저한 코인 우선 주의에 할 말을 잃은 것도 잠시.
욕망, 슬픔, 기쁨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어우러진 이곳은 감정 쓰레기통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다.
혼돈의 카오스.
정말로 이게 설계일까. 수많은 이들이 각기 다른 감정을 품게 만들며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하악… 하아… 으윽… 이야아아아앗!
고작 촉수 슬라임과의 전투일진대 어째서 많은 서사를 쌓아온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할까.
녀석의 부모가 촉수 슬라임에게 목숨을 잃기라도 했단 말인가.
-촉초로로록! 촉촉!
-이야아아아아아아!
언제부터 촉수 슬라임이 촉초로로록 촉촉 하고 울었단 말인가.
[노을빛의 검신♥이 피하라고 외칩니다. 아니, 어젯밤 배운 것을 떠올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야아아아앗!!!
한 박자만 늦었더라도 녀석이 졌을지도 모른다. 검을 든 양손으로 사정거리 안으로 당도한 몬스터의 촉수를 쳐내고.
-패링!
[노을빛의 검신♥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성공할 줄 몰랐다고 외칩니다.]
기어코 두 번째 녀석에게 검을 박는다. 이후에 덮쳐온 촉수 슬라임 하나가 그의 뒤를 덮치고 그 영향으로 검을 손에서 놓기는 했지만… 코인창놈은 계속해서 발버둥 친다.
촉수를 깨물어 슬라임이 움찔한 사이… 떨어진 검을 아슬아슬하게 쥐고.
마무리.
-하아… 하아… 하아… 하아….
“…….”
-하아… 하아… 하악….
코인 폭격이 시작됐다.
전전 기수의 유명 플레이어가 4레벨 던전을 퍼스트 클리어했을 때에도 이 정도로 코인들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얼마나 버는 거야.’
[……후원합니다.]
[……후원합니다.]
[……후원합니다.]
[……후원합니다.]
‘이거 그냥 사기잖아. 그냥 쇼 아니야?’
-여러분 감사합니다. 감… 감사해요.
‘애초에 촉수 슬라임이랑 싸울 이유도 없지 않아?’
모두가 까먹고 있는 것일까. 저 녀석이 보유한 코인만으로 이미 레벨4 수호자와 레벨4 소환수들 십수 개체를 구입할 수 있다.
아마 레벨2라면 분대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녀석의 스트리밍에 여러 가지 장치와 옵션들을 구매했다고는 하지만 쓰는 코인 보다 버는 코인이 더 많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코인창놈이.’
녀석이 자신의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로헨 대륙 출범 역사상 이런 종류의 인간은 없었다.
게니우스와 플레이어들이 서로 교감하고, 성장하는 이 시스템으로 이 지랄을 하는 새끼는 없었다.
대부분 적응하지 못하거나 두려워할 뿐이다. 수동적으로 수호신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기다리거나 퀘스트에 휩쓸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년 차는 그나마 약은 짓거리를 하기도 했지만 이 새끼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타 차원에서 넘어온 영웅이 아니라 전문 광대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위화감을 느낀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종종 코인으로 용병을 구입하라는 훈수가 떨어졌지만….
-어… 어떻게 쓸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이 주신 소중한 코인인데….
“…….”
-여기서 제 한 몸 안전하자고 그런 허튼일에 사용하라는 코인이 아니잖아요. 여러분들이 피땀 흘려서 번 코인이에요. 그런 걸 어떻게….
활짝 웃고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더 크게 쓰일 일이 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저는 재능도 없고… 어째서 여기에 이렇게 떨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로헨 대륙을 구할 수 있는 재목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꽃과 풍요의 여신♥이 우리 기영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5천 코인을 후원합니다.]
-아이~ 풍요의 여신니이이이임~ 코인 보내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오~
‘콧소리 뭔데.’
[꽃과 풍요의 여신♥이 우리 기영이를 응원한다고 합니다.]
-진짜 안 보내주셔도 돼요. 풍요 님. 여러분들이 피땀 흘려서 번 코인… 제가 가지고 있어봤자 뭐하겠어요… 저는 그냥 이렇게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만족….
[노을빛의 검신♥이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말을 꺼냅니다.]
-이 코인들은 제가 튜토리얼에서 나갈 때까지 모아놓고 있을게요. 쓰더라도 조금은 의미 있는 곳에서 사용하고 싶어서… 여러분들의 패밀리아도 괜찮을 거고… 진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삐뚤어진 수호자가 생쇼 하지 말라며 플레이어 이기영을 비웃습니다.]
[초승달 아래에서 우는 늑대가 입바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멍청이들이며 저 필멸자에게 휘둘리는 바보들이라 비웃습니다.]
[삐뚤어진 수호자가 플레이어 이기영 님을 코인창놈이라 모욕합니다.]
[초승달 아래에서 우는 늑대가 촉수슬라임으로 코인 벌이 하지 말고, 튜토리얼이나 진행하라고 경고합니다. 플레이어 이기영을 코인창놈이라 계속해서 모욕합니다.]
그리고.
-아….
“…….”
[꽃과 풍요의 여신♥이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몇몇 이들에게 분노를 표현합니다.]
-흐윽… 흐으윽….
[심연 속의 가장 낮은 심연♥이 너희 누구냐고 외칩니다. 익명의 탈을 쓰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차피 찾아보면 다 나온다고 말합니다.]
-흐윽… 히끅….
[거룩한 밤의 여주인♥이 몇몇 이들을 반드시 찾아낼 거라고 경고합니다.]
-여… 여러분… 그만… 그만하세요. 그러지 마세요오….
[가녀린 촉수 여왕♥이 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좋지만 이런 식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불어 저 연놈들을 반드시 심판대에 올릴 것이라 다짐합니다.]
-저… 저….
[노을빛의 검신♥이 저들의 목을 바칠 것이라….]
-저… 방송 종료할게요. 죄… 죄송합니다.
[……합니다!]
[…………합니다!]
-정말로… 흐윽… 죄송합니다. 제가… 멍청해서 죄송합니다. 바보라서 죄송합니다.
[…………합니다!]
[………합니다!]
[……합니다!]
[………합니다!]
[……합니다!]
[…………합니다!]
아비규환.
혼돈이 찾아온 것은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