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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88화 (1,08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88화

로헨 대륙 (8)

‘이 새끼 간만에 한 건 해서 신났구나.’

[네. 제가 해냈습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누가 듣기에도 목소리 톤이 올라가 있는 상태, 취직한 이후 실적이 없었던 영업사원이 첫 계약을 따낸 것만 같은 텐션이었다.

‘신나도 너무 신났자너. 이 정도로 신날 일이야?’

[하핫! 선배님들도 안 될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누굽니까.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처음에는 제 목소리를 들은 체 만 체했지만, 완강히 말하니 우효열 님도 결국 입을 여시더군요. 네. 제가 그분의 입을 열게 했습니다. 제가 말입니다.]

[…….]

[이기영 님께서 희생과 부활의 신이라는 사실은 필멸자들에게는 시스템 보안이 걸려 있는 사실이라… 말씀드리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사실을 말씀드렸다면 이야기가 더 쉽게 진행됐을 테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핫. 처음에는 저희 쪽에서 우효열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재를 찾았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근데 너 왜 우효열 님이라고 불러?

[이러저러해… 알겠다는 확언을 받아 냈습니다. 오늘 내로 찾아갈 거라고, 희생과 부활의 신께서 계신 좌표를 물어보셨고… 그렇게 성공적으로 좌표를 전달했습니다.]

좌표 하나 전달하는 데 성공적인 게 어디 있을까. 혹시 이 새끼가 다른 곳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그래봤자 너 스카우트 안 해요.’

[중간에 좀 생략이 된 부분이 있는데….]

[네?]

[중간에 좀 생략이 됐잖아요? 어떻게 설득했는지, 무슨 과정이 있었는지.]

[아. 네. 설득하는 과정이 좀 길었기 때문에 전부 말씀드리기에는… 일단 이기영 님께서 많은 것들을 지원해 주실 예정이라는 말도 드렸고….]

[네. 그건….]

[꼭 필요한 사람이니 반드시 만나보는 게 좋으실 거라고… 이기영 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시고 있다고….]

[내용 기록 안 해놓으셨어요?]

[네… 죄송합니다.]

“…….”

‘시바 애매한데….’

정확히 어떤 말투로 어떤 워딩을 사용해 의사를 전달했는지 알 수 없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혹시나 이 튜토리얼 멍청이가 너무 저자세로 비굴하게 들어간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우효열 님 우효열 님 지껄이는 것도 그렇고… 중간에 생략을 많이 한 것도 그렇고… 켕기는 게 있으니 중간을 날려 버린 게 아닐까?

[제… 제가 무언가 실수한 것이라도….]

[혹시 비굴하게….]

[아닙니다!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 그 뜨거운 온도에 이 새끼가 얼마나 비굴하게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새끼 이거 진짜루 비굴하게 달라붙었구나. 그래도 명색이 관리자라는 놈이….’

[절대로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설득하는 과정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래도 성과를 위해서… 저는 제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

[중요한 것은 우효열 님과 이기영 님의 만남을 성사시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성사시킨 게 아니라 어떻게 성사시켰는지가 중요하지.

물론 약속을 잡은 것 자체는 박수를 쳐줄 만한 상황이었지만….

‘내가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 안 되는데….’

오히려 튕기는 쪽이 내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선다.

사소해 보이지만 누가 갑이 되느냐 누가 을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자리. 내가 열렬하게 우효열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자연스럽게 관계의 주도권을 금발태닝양아치가 가져갈 것이다.

‘양아치 새끼들한테 얕보이면 안 되자너.’

어디서나 통하는 불변의 진리가 아니었던가. 이런 족속들은 보통….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할 거야.’

특히나 지보다 강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신이상자라면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이롭다.

[죄… 죄송합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아니요. 뭐. 너무 나무라지는 않을게요. 확언을 받아내셨다고 하니.]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구….’

얘는 어차피 뭘 가르친다고 해서 배울 애도 아니니까.

[다만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네! 그렇군요.]

[우효열 씨가 계신 좌표 전달해 주세요. 정확히 약속을 정하고 만나는 게 서로한테 이로울 것 같은데. 제 사람을 보내서 초대장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서로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 우효 씨에게 제 사람이 간다는 것도 전해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그냥 만나고 싶을 때 와서 만날 수 있는 새끼가 아니라, 이쪽도 엄연히 스케줄이 있고 자존심이 있는 지성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지.

“저… 주인님?”

[그… 그럼 언제쯤 간다고 말씀드리면 좋겠습니까?]

[좌표가 정확히 어딘지 알아야 시간을… 알아서 알려드리죠.]

[앗. 죄송합니다. 지금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인님.”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녀석에게 좌표를 받은 이후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에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마무리되어 있는 촉수 토론, 혹시나 자신들이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적당히 입을 열자 안심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잠깐 회의를 미뤄야 할 것 같네요. 새로운 일정이 생겼네요. 중요한 행사입니다.”

“네? 혹시 바로 작품 들어가시는 건가요?”

“아니요. 작품이 아니라 갑작스레 만날 사람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의 도움도 필요하구요. 오늘 회의 내용은 따로 팀장들끼리 마친 이후 제게 보고서로 보고해 주시고….”

“네!”

“보안팀장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좌표로 향해 금발의 남자에게 편지를 전해주시면 됩니다. 짧게 적어 드릴 테니 잠깐 기다리세요.”

코인으로 편지지를 구매한 이후에는 적당히 지성을 뽐낼 수 있는 편지를 적어서 보낸다. 언제 어디로 몇 시에 찾아오면 된다는 내용. 교국 상류층들이 쓰는 필체로 슬그머니 휘갈겨서 말이지.

누가 봐도 제대로 된 형식의 초대장, 인장으로 내용을 봉하기까지 하자 나를 바라보는 웨어울프 한 마리에게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의지가 깃들고 있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크르륵!”

“간단한 임무예요. 보안팀장, 휘하 웨어울프 셋을 데리고 가세요. 아마 그쪽에서도 보안팀장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최대한 호의적으로 다가가서 편지를 전해주시면 됩니다.”

“네.”

“미술팀은….”

무대도 중요하지. 분위기도 중요하고.

“무너진 신전 같은 컨셉 있잖아요. 가능해요? 스케일이 그렇게 클 필요는 없고… 기둥 몇 개랑 석상 몇 가지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 안에 테이블 하나랑 의자 두 개만 놓여져 있으면 됩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주인님.”

“분장팀은 잠깐 대기해요. 저 씻고 올 테니까. 이후에….”

“네. 입으실 옷을 미리 생각해 두고 있겠습니다.”

‘뽀득뽀득 씻어야지.’

본래 첫인상은 중요한 법이다. 단순한 소개팅에 나갈 때도 때 빼고 광내고 경우의 수를 전부 생각하고 전투에 임할진대, 대륙을 구하려는 두 영웅의 만남은….

‘더 중요하자너.’

조금 연약한 컨셉으로 갈까. 아님 능력 있는 지휘관? 아니면 교국에서 잘 먹히는 성자?

약하면 병신으로 보고, 착하면 호구로 볼 확률이 높으니까. 아무래도 조금 능력 있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캠프로 들어가 대충 몸을 씻은 이후에는 곧바로 옷을 고르기 시작, 지혜 누나가 있었으면 조금 더 일이 수월했겠지만 미술팀에 소속되어 있는 인원들의 안목이 나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최대한 깔끔하게 맞으시죠? 주인님.”

“네.”

“이것도 잘 어울리시고….”

“이것도… 잘 어울리시네요. 장신구는….”

“장신구 많이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일단 꺼내 놓을 테니 골라보시겠어요?”

‘이 새끼 피어싱 범벅이었자너. 귀에도 피어싱 몇 개는 있더만.’

아무래도 공통점이 있으면 호감을 사기 쉬운 법이다. 너무 화려한 건 취향이 아니지만 그래도 두세 개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팔찌랑 반지 몇 개. 너무 과하지 않게 피어싱도 한 쌍 정도만.

“정, 정말 뚫어도 되나요?”

“잠깐만요. 마취 물약 좀 먹고요.”

“하나… 둘….”

“악!”

“아직… 안 뚫었어요. 주인님.”

살짝 거울을 보고 있자니 제법 그럴듯한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적당히 능력 있는 것 같으면서도 선함을 잃지 않는 분위기. 하얀색 와이셔츠에 깔끔한 검은색 바지.

한때 시대를 풍미했었던 모나미 룩.

너무 현대적인 건 아닌가 싶어 이 세계 냄새가 벨트를 걸친다. 액세서리로 단검 몇 개도 꽂아주고.

뭔가 특별할 것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특별하다. 거지처럼 구르고 굴러야 되는 튜토리얼 던전에서 이 정도로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만큼 능력 있다는 걸 보여주는 지표가 되지 않을까.

웨어울프들을 전령으로 사용했다는 것에서 이미 이기영이라는 작자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겠지만 직접 보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그사이에 미술팀이 만남의 장소를 마무리하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주인님.”

“디테일 충분한데요?”

“빛을 어디로 내리쬐게 하는 게 효과적인지 고민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우효 씨 들어오면 저한테 살짝 내리쬐는 형태로 세팅해 주세요. 그리고 여기 너무 깔끔한 것 같은데 좀 빈티지한 느낌 추가되죠? 여기저기 깨지고 갈라지고. 세월의 흔적 팍팍 맞은 것 같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느낌 알잖아. 미술팀장.”

“네. 곧바로 착수하겠습니다. 주인님.”

“그리고 차… 아니다. 차를 안 마시겠구나? 커피도 안 마실 것 같고….”

“와인으로 준비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와인이 아니라… 그냥 럼주… 같은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너무 기품 없어 보이려나?”

“…….”

“그냥 차로 가져다주세요.”

“찻잎은 게슈하트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로헨 대륙의 귀족들 중, 술을 좋아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찻잎입니다. 일반적으로 차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아. 그게 좋겠네요.”

“그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다과도 부탁드려요.”

“네.”

준비는 완벽하자너.

대충 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분위기. 반파된 신전 안에서, 천장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맞은 채로 앉아있는 이기영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주관적으로 보기에도 신비로워 보인다.

본래 첫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게 상대방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양아치 새끼라도 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누군지에 대한 궁금증이 안 생길 수가 없을 것이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고 있으니까.

튜토리얼 던전에서 이런 분위기라니.

‘미쳤다. 이기영.’

누가 봐도 능력 있는 성자처럼 보인다.

일단 자리에 앉고.

‘무슨 이야기부터 하는 게 나으려나.’

같은 고민을 하며 녀석을 기다린 지 약 11분.

약속 시간이 살짝 넘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늦나 보네… 그래. 이해해. 약속 시간 같은 거… 지키는 타입처럼은 안 보였으니까. 뻔하지, 뭐.’

그렇게 녀석을 기다린 지 약 1시간 정도.

“한 시간도 뭐….”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이 새끼를 기다린 지 2시간째.

“…….”

“…….”

그 뒤로 30분이 더 지난 이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양아치 새끼.”

이기영이 바람맞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쾅!

“이 양새끼!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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