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91화
패밀리아 (1)
메인스트림, 초보자의 시련의 무대가 되는 초보자의 숲은 규모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재단하기로는 중립국 라이오스 정도의 부지, 각 국가나 지역마다 튜토리얼 던전을 하나씩 가지고 있던 우리 쪽과는 다르게 많은 국가들이 이 숲을 둘러싸 공유하는 형태였다.
당연히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들만 소환되지 않는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는 길 도 모두들 제각각이라 지구에서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따로 뭉치지 못하는 구조였다.
누군가는 숲의 북쪽으로 탈출해 북방의 국가들과 계약을 맺을 것이고, 누군가는 숲의 동쪽으로 나가 동쪽의 이들과 손을 잡을 것이다. 남쪽으로 나간 이들은 해양 국가들에 합류할 거고….
다시 말해 플레이어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구조였다. 어디서 성장할 것인지, 어디에 터를 잡을 것인지, 튜토리얼을 막 끝낸 초보자들은 아마 휩쓸리기 급급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네.”
“각 국가들이 협정을 맺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플레이어들의 편의를 봐준 것이죠.”
“아….”
“메인스트림 초보자의 시련이 끝난 이후, 두 달 동안, 패밀리아들이 각 국가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통행법이 제정됐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저의 플레이어들은 국가 간의 이동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비자 같은 문제가 있었으니 훨씬 더 편리해진 셈입니다.”
“그건 위에 계신 분들께서….”
“네. 위쪽에 계신 분들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이 통행법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만… 아마 위의 계신 분들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많은 분들의 통일된 뜻이라 더욱더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이곳으로 나올지 알고 계셨나요?”
“꽃과 풍요의 여신님의 언질이 있었습니다. 본래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꼭 저희들이 이곳으로 향했으면 하시더군요.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이기영 님을 보니 어째서 그랬던 것인지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초보자의 시련을 이렇게 공략한 경우는 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과찬이세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패밀리아 꽃과 풍요.’
가장 먼저 이쪽과 면담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패밀리아. 수많은 패밀리아가 모여 있었던 숲 밖에서 그들이 첫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만 봐도, 로헨대륙에서 꽃과 풍요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패밀리아. 양지 중의 양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집단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메인스트림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는 것으로도 유명한 패밀리아란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우리 꽃과 풍요의 여신님 취향 어떤지 잘 알겠자너.’
모두가 미남 미녀라는 것.
물론 현재 자리에 있는 것은 고작 여섯에 불과했지만 모두가 억 소리가 나올 것만 같은 미형이었다. 엘리오스 같은 스타일부터, 라파엘 같은 녀석까지. 나이나 성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다른 국적처럼 보였지만 연예인 군단이라도 모아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심지어 얼굴만 반반하냐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음의 눈으로 싹 훑어보자 왜 패밀리아 꽃과 풍요가 로헨 대륙에서 유명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나.
‘이 새끼. 괜찮네.’
패밀리아 꽃과 풍요의 리더를 맡고 있는 윌리엄 프라우드.
잘 모르겠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족 같은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유럽 어딘가에 귀족작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백금발 머리를 단정하게 올백으로 넘긴 모양새는 싼티 나는 우효 녀석과는 다르게 근본 넘치는 금발. 싸구려 염색으로는 따라올 수 없는 진성 백금발이었다.
사용하는 무기는 또 어떠한가.
‘레이피어?’
허리춤에 달려 있는 화려한 검은 장식용이 아니다. 검술에 관련된 녀석의 능력치와 특성이 놈이 어느 정도로 저 검을 잘 다룰 수 있을지 상상케 한다.
근본 중의 근본.
그게 내가 본 윌리엄 프라우드의 모습이었다.
이용하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격식 넘치고, 예의 바르고, 상류층의 품위가 깃들어 있는 모양새. 상대를 배려하는 화술이나 몸짓. 녀석의 모든 것이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기영 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네?”
“육체의 강함만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기영 님의 안에는 많은 가능성이 숨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단순한 가능성이 아닙니다.”
말도 따뜻하게 하는 거 봐.
패밀리아의 리더라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는 몰라도, 꽃과 풍요의 여신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다들 자기 닮은 애들 픽하나 봐. 아까 거룩한 밤의 여주인에서는 진짜 여주인님 소리가 절로 나오는 사람이 나왔드만.’
아쉽게도 가녀린 촉수여왕 패밀리아는 보지 못했지만 차라리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부터는 어떻게 되는 건지 여쭈어봐도….”
“네. 물론입니다. 이기영 님.”
“아니, 그전에… 다른 생존자들은 어디에 있나요?”
‘어디서 교육받을 준비 하고 있겠지 뭐.’
“다른 생존자들은 모두 각 국가가 관리하는 교육기관의 인도를 받아 짧은 교육과정을 거칠 예정입니다.”
“아….”
“튜토리얼 던전, 초보자의 시련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셨겠지만 로헨대륙은 그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두려운 곳이니까요. 교육과정은 약 한 달이며 그 한 달 동안 많은 패밀리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실 겁니다.”
“…….”
“물론 이기영 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다면 곧바로 저희와 함께하시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이곳에서 교육과정을 거치시는 것을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위의 분들 역시 플레이어들이 이 한 달의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으며,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이들 전원에서 각각 3천 코인이 주어지게 됩니다.”
‘뭐야. 겨우….’
아니야.
나한테는 겨우지만 다른 얘들한테는 아닐 수도 있지. 당장 100코인, 10코인 없어서 쫄쫄 굶는 애들도 있을 텐데.
3천 코인이면 충분히 전투 직군으로 도전해 봄 직할 만한 코인이다. 초보자 전용 장비를 사서 사냥을 나가거나… 전투직군에서 벗어나 사업을 하나 해보거나.
“꽃과 풍요의 여신님께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알고 계신다면 절 꾸짖으시겠지만… 많이 보고 많이 겪고, 많이 경험해야 이기영 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뭔지 답을 찾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기영 님이 저희 꽃과 풍요의 맞는 색이라 생각합니다만….”
“리더. 계속해서 가입 권유를 해도 모자랄 판에….”
“여신님께서 모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휴우….”
‘사람도 좋아. 아랫사람들한테도 예의 바르고.’
차라리 얘가 회귀자면 할 만했겠다.
“그럼…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십니까? 이기영 님?”
“글쎄요.”
“…….”
“혹시… 가입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는 조건으로… 패밀리아 꽃과 풍요의 재무상태표, 던전공략로그, 보유하고 있는 아이템 목록이나, 가입되어 있는 플레이어들의 신상정보.”
“…….”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그만. 에밀리아.”
녀석은 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리더!”
“궁금하시다면 공개할 수는 있습니다만 몇몇 항목에는 보안을 걸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리더. 이건 아니에요. 다른 패밀리아로 갈지로 모르는 외부인한테 저희 패밀리아의 정보를 공개하다니요. 아무리 보안을 건다고 해도… 이건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고요.”
“…….”
“당장 이번 회의가 끝나면 이 사람은 거룩한 밤의 여주인 패밀리아와… 일정이 잡혀 있다고요. 알고 계세요? 앞으로 한 달 동안 마주할 패밀리아들에게….”
행정관 포지션을 자처하고 있는 녀석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윌리엄은 이쪽의 무례한 제안에도 다소 너그러운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야. 에밀리아. 여신님의 눈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만!”
“부탁드린 것은 바로 준비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기영 님.”
호구인지 어른인지 모를 녀석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이쪽을 바라본다.
언제 날 보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발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건 자신감의 발로일 것이다. 패밀리아 내의 정보가 새어나가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모습. 녀석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뭐야?’
“여기 있었구나?”
‘저 새끼 뭐야?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문이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언젠가 봤었던 얼굴이다.
누가 봐도 양아치처럼 생긴 얼굴과 행동, 근본 넘치는 윌리엄과는 다른 싸구려 금발. 피어싱으로 얼굴에 구멍을 뚫어놓은….
‘우효 새끼.’
당연히 시선이 집중된다. 패밀리아 꽃과 풍요 역시 당황한 듯한 표정.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가 꽃밭인 잡종들이랑 어울리고 있었네.”
당황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이제 막 튜토리얼을 통과한 플레이어가 갑자기 접견실에 문을 박차고 들어오다니, 본래 인간은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멍 때리게 마련이었으니….
윌리엄과 에밀리아뿐만이 아니라 패밀리아의 다른 인원들도 잠깐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대응은 빠르다.
“당신은….”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방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현재 이 접견실은 3일 16시까지 꽃과 풍요가 대관하고 있으며….”
“아무래도 착각이 있으신 것 같군요. 잠깐….”
누군가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분명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통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마구잡이로 권력자들이 대관한 방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 수 없다. 다년차 플레이어들도 이 패밀리아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진데, 이제 막 튜토리얼을 졸업한 놈이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다.
뒤에 박혀 있던 두 놈이 우효 새끼에게 다가가 녀석을 제지하기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효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심지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을 잡는 손을 쳐내기도 한다.
“뭐? 어쩌라고.”
건들거리며 발걸음을 옮긴 녀석은 기어코 의자 한쪽에 몸을 털썩 주저앉히고 발을 테이블 위로 올린다.
‘미친놈인가?’
준비해 놓은 찻잔과 다과접시에 발이 닿을 듯 말 듯 하는 것이 무척 신경 쓰이는 상황, 파란 길드 안주인의 입장에서 저쪽에서 준비한 다과와 차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더 신경 쓰인다.
‘진짜 미친놈인가? 벌써 3회차로 진입하고 싶은 건가?’
이 새끼 제정신인가? 진짜?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기영이겠구나? 응?”
“…….”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윌근본의 몸에서 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나가. 주십시오.”
“…….”
“…….”
“싫으면….”
“…….”
“싫으면 어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