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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93화 (1,09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93화

패밀리아 (3)

‘가오 안 살겠자너.’

한바탕 땅바닥을 나뒹군 다음에 씩씩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꼴은 가관이라 할 만했다.

윌리엄에게 한 수를 허용한 시점에 이미 승부가 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일까.

물론 이 새끼가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애초 우리 윌근본은 녀석을 죽일 수도 있었다. 몸에 상처를 남기는 대신 이마에 구멍을 낼 수도 있었고, 어깻죽지나 복부를 찌르는 대신 심장을 찌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녀석을 살려둔 이유는 어디까지나 놈이 이제 막 튜토리얼을 졸업한 애송이였기 때문. 손속의 사정을 둔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근데 또 깝치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보다 추한 것은 없다는 말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녀석은 몸소 추함을 실천하고 있는 중.

이전에 봤었던 여유롭고 건들거리는 모습 대신 자리 잡은 것은 독기와 악의. 심지어 살의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십시오.”

“패배? 웃기고 자빠졌네. 시발. 몸에 구멍 몇 개 난 거 가지고 패배를 인정하라고 하네?”

“…….”

“나 아직 안 끝났으니까. 검 들어. 이 새끼야.”

“…….”

한마디 거들어야지 시바.

“무례하군요.”

“뭐?”

“윌리엄 님께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죽었을 거예요. 아직도 모르시겠나요?”

“하… 이제는 뭔….”

“더욱이 실례를 범했다면 마땅히 사과를 드려야 하는 거고요.”

“…….”

“당신은 강해요. 저 같은 것보다 더욱더. 당연히… 앞으로 더욱더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의 패배를 교훈 삼아… 아니… 이런 말보다는… 일단은 치료가 먼저일 것 같군요.”

본래 말리는 시누이는 미운 법이다. 팩트를 조잘거리면 더욱더 눈에 거슬리겠지.

심지어 이 새끼는 동정받는 것에 익숙한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동정받고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 눈에 띈다.

이기영 특제 포션을 슬그머니 꺼내 녀석에게 다가서자 발악하듯 손을 쳐낸 이후에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특제 포션을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앗.”

기영이 시무룩.

분명히 나 때문에 이곳에 찾아왔다고 말했었는데, 지금은 나를 보고 있지도 않다. 본인에게 치욕을 안겨 준 윌근본을 노려보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은 모습. 어떤 종류의 집착까지 느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 이 새끼 개인적인 사정이야 알 바 아니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다고 봐야 되나?’

생각보다 별것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녀석의 역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본래 누구나 지는 걸 싫어하지만 우효열에게 패배라는 것은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어떻게 예를 들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도태된다는 두려움, 아니. 패배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곧 죽음으로 직결된다고 느껴지는 듯한 모습이다.

평범한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문명과 동떨어진 장소, 혹은 야생에서 짐승들이 느낄 만한 사고방식.

‘로마시대 때 검투사로 살다가 떨어진 새끼도 아니고.’

하지만 지구 혹은 1회 차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갔다고 봐야겠지.

승리하는 것이 곧 생존하는 것과 직결되는 삶 말이다.

이상하게도 녀석이 율하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유능하지 않으면, 쓸모가 있다는 걸 인정받지 못하면 버림받는다는 사고방식이 말이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우효 새끼는 똑똑하지 않지만 멍청하지도 않다.

녀석은 타고난 사냥꾼 기질을 가지고 있다. 한쪽 팔과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페널티를 받아들인 것도 본인이 질 수 없는 무대를 위해 마련한 장치일 것이 분명하리라.

이미 자존심을 한번 굽혔는데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깨지고, 튜토리얼에서 자신이 물 먹인 정체불명의 검사에게 동정까지 받고 있으니….

“시발… 시이발!!”

“죽을지도 모릅니다.”

“죽여 봐. 죽여 봐! 이 개새끼!”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꼴은 금방에라도 레이피어가 꽂힐 것 같았지만.

‘잘 싸우기는 한다.’

저 분노가 녀석의 동력인지, 찔러 들어오는 레이피어들을 전부 회피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공간을 덮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찔러 들어오는 레이피어들을 이해할 수 없는 몸놀림으로 피한다.

기본 검술 교본 따위는 개한테나 줘 버리라는 듯이 몸을 비틀고, 고개를 젖히고, 땅바닥을 휩쓸며 피하면서도 곧바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재능의 영역이었다.

말 그대로 우효열의 육체는 어떤 자세에서도 검을 휘두를 수 있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휘두르기가 찌르기로 변환되는 과정에서의 변환 동작이 녀석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연결 동작을 모조리 생략할 수 있는 재능.

아니나 다를까 당황하기 시작하는 윌근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윌리엄이 밀리고 있는 형국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당황하기 시작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침착해 보였지만, 녀석의 표정이 조금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야비한 새끼! 시바!’

허리를 뒤로 젖히며 피하는 동시에, 검을 하늘로 집어 던진 녀석이 남은 손으로 흙덩이를 집어 드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윌리엄은 볼 수 없는 각도,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한 발자국 몸을 움직인 사이 녀석이 흙을 집어 던졌다.

물론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 잡수 이기는 했지만, 윌리엄의 입장에서는 시야를 방해받은 탓에 공간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꽂히는 로우킥.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윌리엄의 허벅지에 우효열의 발이 틀어박혔다.

“하핫!”

물론 대미지는 크지 않다.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넘어뜨릴 수 있는 종류의 대미지는 아니었지만 턴을 빼앗아 오기에는 충분했다.

‘하.’

우효열이 윌근본의 머리를 부숴 버릴 것처럼 검을 휘둘러 온다.

윌리엄이 레이피어를 들어 올려 공격을 막은 순간, 우효열이 그대로 검을 놓아버리며 맨손으로 윌리엄을 끌어안았다.

우효 새끼가 노린 것은 검을 잡고 있는 손. 레이피어를 휘두를 수 없게 손으로 손목을 꽉 고정시킨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팔로는 너덜너덜해진 본인의 옷을 찢어, 마치 수갑이라도 채운 것처럼 윌리엄과 자신의 손을 동여맨다.

복잡한 동작들을 순식간에 수행하는 능력은 감탄이 나올 지경. 그리고.

“이제 어쩔래. 응?”

우효열의 주먹이 윌근본의 머리에 내리꽂혔다.

‘시바… 시바….’

고개를 비틀며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안면에 틀어박혔지만 윌리엄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쪽 팔.’

본인 스스로 한쪽 팔밖에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까. 심지어 마력으로 우효열을 밀어내는 선택지도 할 수 없다.

본인 입으로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약속했으니까.

‘뭐야. 시바.’

퍽! 퍽! 퍽!

“이제 어쩔래? 이제 어쩔래?!”

퍽! 콰앙! 퍽! 퍽!

무차별적인 구타였다.

윌근본은 우효열을 뿌리치려고 레이피어를 든 손을 이리저리 휘둘렀지만 우효 놈은 레이피어가 휘둘리는 쪽으로 몸을 던지며 본인을 뿌리칠 수 없게 만든다.

마치 윌근본이 어디로 팔을 휘두를지 알고 있는 것처럼 녀석을 따라가며 주먹을 휘두른다.

대미지는 누적된다.

“우하핫! 우하하하하! 우하하핫!”

‘우효 하고 웃지는 않네.’

윌근본의 고운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본래 내구수치가 높은 타입이 아니다.

비교적 낮은 근력으로 시작된 주먹질 이었지만 마력까지 담고 있으니 백금발 머리에 자꾸만 붉은색이 튀어버리고 있다.

저러다 죽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맞고 있었지만….

‘근본이기는 해.’

윌리엄은 아직도 자신의 남은 팔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마력도 일으키지 않는다.

‘멋있기는 한데. 멍청해. 시바. 역시 효열이가 회귀자인 이유가 있기는 해.’

강한 것은 당연하다.

회귀자 버프를 달고 있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달고 있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일 것이다.

녀석은 안하무인에 쓰레기처럼 비치기는 하지만. 본인이 정한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비굴하게 보이거나 치사하게 보이거나 하는 종류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 대외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일들도 그저 흘러넘긴다.

녀석이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느냐 없느냐.

처음 목표는 나를 만나는 것이었을 거고. 두 번째 목표는 윌리엄을 이겨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녀석은 두 가지 다 얻어내고 있지 않은가.

적이 되면 피곤할 타입이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뭐? 버릇을 고쳐줘? 다시 한번 말해봐. 누가 누구 버릇을 고쳐주고 있는 것 같아?”

“…….”

“이 얄미운 새끼! 아파? 아프지?”

예의가 없는 게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 새끼….’

“…….”

‘길들이고 싶네.’

잘 사용한다면 이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타입이 또 어디 있을까. 목줄을 채울 수 있다면… 목표를 녀석이 스스로 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심어줄 수 있다면 어떨까.

‘회귀자 사용설명서에서는 또 어떨까.’

얘를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물론 전제조건은 존재한다.

‘버릇은 고쳐놔야겠네.’

윌리엄의 말대로 우효열은 버릇을 고칠 필요가 있었다.

곧바로.

윌리엄을 향해 메시지를 보낸 것은 당연지사.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세요.]

“?”

[뒤로 움직입시다. 빠르게요. 아까 전에 하시던 것처럼 왼쪽 오른쪽으로 흔들고, 네. 따라오는 거 당황하지 마시고. 잠깐 멈춰요. 우뚝! 네네. 잘하네요. 다시 한번 더 같은 루틴으로. 조금 있으면 멈칫할 예정이네요? 발로 차시면 될 것 같은데… 아! 맞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단은 손을 떨쳐내는 게 먼저니까. 네. 그렇죠. 잘하시네요. 왜 지금까지 맞고 계셨어요?]

“…….”

“뭐. 이제 와서 어쩔 건데.”

“…….”

“이제 와서 뿌리치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할까 봐?”

[대미지가 많기는 하지만 지는 것도 우스꽝스럽죠? 윌리엄 님의 검술은….]

‘좋기는 한데. 너무 찌르기 원툴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장점을 키우는 게 더 좋다는 판단이 서기는 하지만 우효열은 윌리엄의 검술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

한 번 호되게 당한 만큼 방심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훈수 좀 두는 게 더 확실하겠지.

‘얘랑 타입이 비슷한 게… 쓰로누스였지. 아마….’

내가 아는 검사 중, 찌르기를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은 쓰로누스다. 찌르기를 기점으로 다양한 루트로 쏟아낼 수 있다는 강점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새로운 거 하나 배워보실래요?]

나는 중얼거렸다.

“…….”

이윽고….

“…….”

“…….”

“말… 말도 안 돼….”

윌리엄이 제자리에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이게 어떻게… 이런 게… 이건… 방금은… 내가 한 게….”

‘아냐. 네가 한 거 맞아.’

“이런 검술이… 이건 도대체….”

‘메이드 인 쓰로누스.’

물론, 그 아래. 온몸에 상처가 난 채로 기절해 있는 우효 놈도 시야에 비친다.

“…….”

“…….”

“윌리엄 님. 이분… 치료실로 옮겨도 괜찮을까요?”

당연한 결과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