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99화
우효열 (6)
눈물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진 이 세계에서 갑작스레 과거의 인연을 마주친 상황.
데면데면한 사이였어도 반가울 진데, 어디 소라 누나와 기영이가 보통 인연이었던가.
어떤 설정인지 정확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보고 있는 갤러리들은 우리가 어떤 사인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수는 없다.
사실 저들이 마음대로 정확히 정의내리는 것을 원치도 않는다.
약간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가 조금 더 감질 맛 나는 게 정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한소라를 바라보고 있는 이기영의 표정은 마치 연인, 소중한 친구, 가족이나 삶의 파트너를 바라보는 듯했다.
‘사실 그 정도로 반갑긴 해.’
“소라 누나….”
“아… 으응… 기… 으응….”
“소라 누나. 흐윽….”
한소라 역시 본능적으로 이쪽을 꽉 껴안고 있었다. 마치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너도 솔직히 반갑지?’
“둘이 아는 사이였어?”
“뭐야….”
“진짜야?”
“그럼 이제…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야. 누가 빨리 우효열 좀 불러와 봐.”
그놈의 우효열은 도대체 왜 불러오는 건데?
시바 이 지경이 됐는데도 옥상 씬 을 찍어야겠어?
물론 쓸데없는 한마디를 한 녀석을 제외한 모두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까 전에 일어났던 소소한 사건은 잊혀져 있다.
바이킹 여자 역시 마법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따로 한소라에게 말을 하거나 다른 시비를 걸기는 싫은 모양이다.
지구를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과거의 인연을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후 사정이야 어떻게 됐든 간에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소라 누나…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누나였구나.”
“…….”
“정말로 누나였어….”
“아… 으어… 누… 누나는….”
‘시바 얘 고장 났다.’
아마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지 않을까.
아카데미에서 나를 만날 줄 예상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갑작스럽게 누나와 동생으로 포지션이 변경되었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적응 안 되나 봐. 한 배우 내가 박미진 때 데뷔시켜 주지 않았었나?’
“누나는… 흐윽… 끄으윽… 누나는… 기… 기영아아아….”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으니 일단은 즙을 짜는 선택지. 가르침을 잊지는 않은 것 같았다.
“누나….”
“기영아아아아… 흐으윽….”
눈에서 떨어지는 닭똥 같은 눈물. 아까부터 계속해서 우효열 좀 불러오라고 외쳤던 새끼도 입을 다물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더 이상 녀석이 등장하기 적절한 장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저… 소라 언니….”
“소라 누나… 아시는 분이세요?”
“저 사람은 누구지?”
“소라 언니….”
그 와중에 한소라의 추종자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 당연히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모두의 아이돌이었던 한소라가 갑작스레 나타난 남동생과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니.
머릿속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슴 속에서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 것이다.
왠지 모르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수도 있고… 튜토리얼 때부터 목숨을 걸고 동고동락한 인연이니 지들이 한소라의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다.
‘내가 더 소중하자너.’
특히나 본래 남동생 포지션에 있었던 녀석은 씁쓸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중, 마치 나라라도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기… 기영아, 여기서… 이러고 있기는… 조… 조금 그러니까… 우리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라도….”
“그러네요. 누나. 미안해요. 제가 너무….”
“…….”
“너무 진정이 안 돼서… 흐윽… 정말로… 정말로 누나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서….”
“아니야. 미안할 게 뭐가 있겠니… 나도 같은 마… 마음… 이었는걸… 기영아아아… 일단 다른 곳으로 옮기자.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어딜 시바.’
한참이나 안겨 있다 살짝 떨어진 이후에는 저도 모르게 옆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눈에 띄는 것은 어정쩡한 자세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한소라의 추종자.
몇 미터 떨어진 상태로 멍하니 나와 소라 누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저분들은….”
“아… 튜토리얼에서… 이, 이럴 게 아니라 기영아. 빨리….”
“아~ 아니에요. 누나 지인들이 제 지인들인데…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요.”
‘너 왜 쟤네들 안 소개시켜 줄려고 그래?’
“그러지 말고….”
‘부길드마스터. 일단…’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자너. 진짜 얘 이상하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누나. 여기 이 사람들 좀 소개시켜 주세요.”
“아… 으응… 그러니까. 이쪽은….”
한소라가 몇몇을 콕 집으며 이름을 설명해 주기는 했지만 제대로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
어차피 외울 필요도 없었거니와 이름을 부를 일이 있으면 마음의 눈을 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쪽은… 이기영… 이라고… 어…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듯이 볼을 붉힌다. 무슨 사이인지 정확히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감이 오게끔 말이다.
‘우리 한 이불도 덮고 잔 사이자너.’
가운데 하얀이가 있기는 했지만 한 집에서 함께 먹고 함께 자고 생활한 전우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보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정하얀의 가족계획에 한소라가 무척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 이제 자리 좀 옮길까… 기… 기영아?”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듯한 한소라.
하지만 그녀의 추종자 1번 크리스티앙은 이 상황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한소라와 내가 사라질까 허겁지겁 말을 잇는 것이 들려왔다.
“소라 누나. 그럼 저, 저희 오늘 모의전 준비는….”
‘이 상황에 잘도 모의전 준비하겠다.’
“크리스티앙. 미안한데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미안해. 누나가 조금… 상황이 이래서… 이해해 줄 수 있지?”
‘이 새끼 소라 누나한테 너무 친한 척하는 거 아니야? 어딜 건방지게.’
“아… 그러고 보니 누나 모의전 때문에 왔었죠? 혹시… 제가 방해한… 건가요?”
“아니. 방해라니… 기영아. 절대로 그렇지 않지… 그것보다 빨리….”
“괜히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저는 괜찮으니 나중에 따로 약속 시간을 정하는 건 어떨까요? 조원분들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은데….”
“소라 누나. 저분 말씀대로….”
“크리스티앙!”
“네… 네?”
“내가 사정 좀 봐달라고 했잖니!”
“아….”
암, 암. 이래야지. 급발진 한 것 같기는 했지만. 쳐낼 건 빨리 쳐내야지.
“너는 어쩜….”
“…….”
“이 상황에서도 모의전 준비라니… 아까 사고 친 걸로도 모자라서… 그렇게 나를 곤란하게 해야겠니? 가족 같은 동생을 만나서 오랜만에 이야기 좀 하고 싶다는데 어쩜 이 정도도 이해해 주지 못하니! 모의전? 네가 내 상황이었으면… 모의전 같은 게 눈에 들어왔을 것 같아?”
“누… 누나….”
“너한테는 오늘 여러모로 실망이다. 정말….”
“…….”
“미안해. 기영아… 그럼 자리 좀 옮기자.”
들었지? 이 새끼야. 니네 누나 아니야. 우리 누나야.
“누나… 저분은….”
“신경 쓰지 마. 기영아. 일단 빨리 들어가자.”
한소라가 이쪽의 팔을 꽉 잡고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벙찐 얼굴을 하고 있는 임청하에게는 잠깐 사정을 설명하고, 곧바로 그녀에게 끌려가듯이 식당을 빠져나간다.
무척 다급해 보였던 한소라도 식당에서 멀어지니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집 나간 이성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방문을 탁 하고 닫은 이후에는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쟤가 저래 보여도. 심성은 착한 애예요. 부길드마스터.”
“…….”
“해코지하지 않으실 거죠?”
‘얘는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제가 걔를 왜 해코지해요?”
“아… 그, 그냥 부길드마스터가 언짢아하실까 봐.”
“별로 안 언짢은데… 아니. 조금 언짢기는 했는데. 제가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언짢다고 전부 쳐내겠어요? 그냥 웃어넘길 때도 있고 그래요. 아무튼 오랜만에 보니까 좋네요. 소라 씨.”
“저, 저도요!”
왠지 별로 안 반가운 것 같자너.
“이렇게 갑자기 떨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찾고 싶지만 찾을 방법도 없었고… 부길드마스터도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서… 부길드마스터가 높은 성적으로 졸업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점수가 엄청나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아! 근데 여기 튜토리얼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더라고요. 게니우스라는 것도 그렇고. 우리 쪽이랑은 많이 다른 것 같던데 적어도 뭔가 신경을 쓴 티는 나더라고요.”
지금 보니 반가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보통 한소라가 이 정도로 수다를 떨지는 않았으니까.
“노을빛의 검신한테 부길드마스터를 빨리 찾으라는 메시지와 함께 코인을 조금 후원받았는데. 이거 길드마스터 맞나요?”
“네. 현성이 맞아요.”
“닉네임 보고 예상은 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거든요. 이쪽 사람들한테 도대체 왜 따로 소환된 건지 피드백은 받으셨어요?”
“네. 대충 그것도 설명해 드릴게요.”
“그리고. 혹시 정하얀 님은….”
“…….”
“아….”
“…….”
“아! 정… 정하얀 님….”
동그랗게 떠진 눈, 마치 오랫동안 잊어버린 것을 떠올리는 듯한 눈이었다.
‘얘 진짜 깜빡 잊고 있었나 봐.’
갑작스레 찾아 온 자유. 마음속으로 꿈꿔왔던 갓 세계.
자신에게 믿음을 보내주는 추종자들과 마치 치트키라도 친 것처럼 느껴진 유희생활.
그동안 받아왔던 억압이 완전히 풀어져 정하얀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계속해서 붙어 지냈던 것의 반작용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얀이가 섭섭해하겠다. 야.’
한소라 역시 그걸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아… 어떻게…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
“정하얀 님… 우리 정하얀 님 어떻게 해요. 식사는 제대로 하셨을까요? 지금 혼자서 힘들고 외로우실 텐데… 혹시 울고 계시지 않을까요? 아카데미에도 들어가지 않으신 것 같은데! 아! 좋아하시는 부길드마스터 인형들도 전부 제가 가지고 있는데….”
“…….”
울먹거릴 일이야? 아까는 완전히 까먹고 신나게 사는 것처럼 보이더만….
“정하얀 님… 어떻게 해요, 부길드마스터? 혹시 어디 계신지 알고 계시나요? 잘 지내시고 계신 거죠? 잘 지내고 계신 거 맞죠?”
“…….”
“셋이서 로헨 대륙으로 간다고 하셨을 때 정말로 기뻐하셨단 말이에요. 얼마나 힘드실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한소라 이 멍청한 년아…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럴 수가 있니….”
새삼스럽게 분리불안이라도 온 듯한 모습이었다.
“정하얀 님을 찾아야 돼요! 빨리 찾아야 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