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09화
우효열 (16)
당연하지만 감정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이 없다는 스탠드를 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마치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시들어가는 꽃기영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죽음이라는 것은 이기영에게 가까웠다는 설정이었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슬퍼하지도 않고 우울해하지도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밝은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죽음을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 보이는 것은 공허함이 틀림없을 것이다.
타인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았을 감정.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감정.
이기영은 어딘가 병들어 있었다. 정확히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그의 내부는 썩고 썩어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우효열은 그것을 눈치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물론 우효 녀석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해결되는 순간이었으리라.
어째서 이기영이 1회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이 정도나 되는 인물이 어째서 이름을 날리지 못했던 것인지.
자신을 회귀시킨 게니우스들이 자신을 도와주는 대가로 이기영에게 조금의 시간을 더 주었다는 것을 추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니까.
녀석이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쪽에 대한 관심이 궤도에 올라와 있는 현시점에서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후에는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 분명했다.
1회차, 로헨의 이기영은 조용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튜토리얼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이후 작은 소도시에서 죽어갔는지, 소환되기 전 지구에서 죽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었지만 이기영의 죽음은 혹독한 겨울처럼 춥고 외로웠다.
깊숙이 들어가면 그런 설정도 숨어있다.
‘네 끝은 어땠을까?’
그렇다면 우효열의 끝은 어땠을까.
1회차의 우효열은 죽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과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우효열 역시 이기영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혼자서 대륙에 처박혀 있었던 현성이보다는 나았겠지만….’
녀석의 죽음에는 그 어떤 것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녀석의 죽음을 지켜봐 주지 않았을 것이고, 그 누구도 녀석의 최후에 공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인성에 시바 친구가 있었겠냐구. 누가 시바 쟤 뒈지기 직전에 같이 있어 주고 싶었겠어?’
애초 동료를 만들거나 누군가와 함께 움직이는 스타일도 아니었으니 사지가 박살 나 피투성이가 된 채로 전장 어딘가에서 죽어가지 않았을까.
대자로 뻗어 누워 하늘을 바라봤을 때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하늘을 보며 눈을 감기는 했을까.
후회했을까?
아니면 허탈하게 웃었을까.
어쩌면 분노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녀석이 이기영에게 완전히 공감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딱 봐도 이 반사회적인 놈은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해 보이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녀석이 개미 손톱만큼이나마 이기영과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면, 이기영의 처지를 동정하고 있다면….
‘시바 동정해 줄 거지?’
이기영 불쌍하자너.
‘동정할 거지?’
시한부자너.
‘조금은 불쌍하지. 그렇지. 굳이 네 손 더럽히면서까지 죽이기에는 조금 그렇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우효의 동공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
“…….”
“내가 동정이라도 해야 하나?”
“…….”
“네놈이 뒈지는 데 내가 동정이라도 해야 하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
얘 봐. 진짜 싸가지 없네. 정말루.
그런데 이 새끼야.
내가 언제 동정해 달라고 말했었나?
“…….”
“…….”
“제가 언제… 동정해 달라고 말했었나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
이쪽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동정이라도 해야 하냐 이죽거린 것은 역설적으로 이쪽을 동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게 만든다.
로헨 대륙이고 이쪽이고 회귀자는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유행인 모양.
다른 건 몰라도 우효열이 이런 종류의 심리전에는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심리전에서 우효열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죽거리거나 욕하거나 무시하고 침묵하는 것뿐이다.
“저는… 동정해 달라고 말한 적 없어요. 당신의 동정 따위는 더욱이 바란 적도 없고요. 제가 당신의 싸구려 동정이나 받자고….”
“…….”
“이런 말을 꺼낸 거라고 생각하나요?”
“…….”
“제가 당신한테 동정을 구걸해서… 하아… 당신이 저를 죽일 필요가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었어요. 정말로 나를 죽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솔직히 저는 당신이 싫어요.”
“…….”
“정말로 싫습니다.”
“…….”
“당신 때문에 지금까지 제가 살아 있는 거겠지만… 저는 당신이 싫어요.”
“…….”
이기영의 남은 삶은 이기영 자신의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로헨의 회귀자를 위해 남겨진 시간이라 말하는 것이 옳다.
“저는 당신이 부러워요.”
다소 직접적인 표현도 거리끼지 않는다.
기영이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현재의 감정에 충실해야 후회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기영은 그런 삶을 살았다.
“당신에게 남겨진 시간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부러워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우효열조차 말이다.
“당신을 보고 있자면 마치 로헨이…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
“모든 게 말이에요.”
부정할 수 없다. 녀석은 회귀자였으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태도도 언제나 자신만만한 것 같은 표정도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어요. 저는… 저는 아마도 당신을 질투하고 있나 봐요. 아니, 질투하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을 싫어하게 됐나 봐요.”
누군가를 질투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기영은 말할 수 있다.
“그걸 어째서 내게 말하는 거지?”
“말하면 안 되나요?”
“…….”
“말하고 싶었어요.”
“…….”
순식간에 페이스를 가지고 온 듯한 느낌.
우효 녀석은 나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해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는 것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녀석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느끼고 있어 던진 무리수였지만 내 생각보다 더욱더 잘 먹히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어쨌든 녀석에게 더 큰 혼란을 선물했다는 건 확실하다는 판단이 설 수밖에 없었다.
혹시 녀석도 이기영을 질투했을까? 이기영이 가지고 있는 인망이나 재능을 조금이나마 질투했을까?
모든 것을 자신의 위주로 생각하는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 때문에 조연이길 자처하는 타인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쪽의 눈에는 녀석이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녀석은 이기영처럼 자신을 질투하고 있다느니, 부럽다느니 하는 말을 내뱉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기영이가 우효열보다 자유롭다.
이기영은 자신의 삶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이기영일지도 모른다.
“좀 걷고 싶네요.”
“…….”
시들어가고 있는 꽃기영이 천천히 병상에서 몸을 일으킨다. 물론 비틀거리는 것도 빼먹지 않는 액션 중에 하나.
혹시라도 우효열이 움찔할까 싶어 기대했지만 이 냉혈한은 내가 넘어지는 건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조금 더 이쪽을 관찰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소 생뚱맞은 제안에도 녀석은 긍정의 표현을 보내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것도 아니고 같이 가자고 말한 것도 아니지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
이미 어두워진 밤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운치 있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나는 네놈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네. 그러시겠죠.”
“도움이 필요하다. 그 자식들에게 구걸한 적도 없다. 그러니 경고하지. 쓸데없는 짓은….”
“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정확히 어떤 계약을 맺었지?”
“말할 수 없어요.”
“너.”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텐데요?”
“그렇군.”
원활한 의사소통은 아니었지만 이런 종류의 쓸데없는 이야기들도 나누고.
“네놈은 뭘 알고 있는 거지?”
“아무것도 몰라요.”
“누구와 계약을 맺었나.”
“말할 수 없어요.”
“목적은… 목적은 뭐지?”
“계속 말씀드린 것 하나예요.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있습니다. 의심이… 많으시네요.”
우효의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결하는 기회도 마련해 준다.
물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냥 건조한 대화였다.
녀석은 지 할 말만 하고 있었고 이쪽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약간 떨어진 거리만큼 커다란 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대화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는 있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니까.
하지만 이 한 걸음은 무척 크게 뻗은 한 걸음이다.
‘타이밍 왔나?’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크게 뻗은 한 걸음이었다.
마침 딱 자리도 괜찮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고,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다소 급해 보일 수는 있지만 한 번 몰아칠 때 제대로 몰아쳐야 한다.
병실 층에 위치한 커다란 발코니, 한 그루의 나무와 그 아래 있는 벤치.
오늘따라 유난히 칠흑 같은 하늘이 눈에 띈다.
별도, 달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우중충한 하늘. 빛 한 점 비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공허한 하늘.
“저는 이렇게 어두운 하늘을 좋아해요.”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은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는 걸 좋아해요.”
다소 생뚱맞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녀석이랑 같이 여길 거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생뚱맞았으니까.
분위기 슬슬 잡고, 아련한 척 하늘도 한번 바라봐 주고, 녀석이 듣는지 듣지 않는지는 상관없다. 어차피 얘랑 대화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커다란 한 걸음을 이어가기 위해, 부연설명을 제대로 하기 위해 녀석의 표정을 보기 위해 슬쩍 뒤를 돌아본 시점.
어처구니없게도….
‘얘 어디 갔어?’
우효열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어?”
“…….”
“…….”
‘시바 너무 서둘렀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걸음을 너무 크게 내디뎠나.’
“…….”
‘너무 급했나?’
우효 녀석이 중간에 튀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