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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10화 (1,11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10화

우효열 (17)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네.”

“어떻게 마지막이에요? 지금부터 시작인데요. 형.”

“너라면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지금부터 너는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살게 될 텐데 말이야. 우리 같은 건 금세 잊어버리는 거 아니야?”

“승윤이 형, 지금 저 놀리는 거죠. 그 표정은 뭐예요, 누나. 혹시… 청하 누나도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죠?”

“글쎄.”

“아, 진짜 왜들 그래요….”

“농담이야. 농담. 바보야. 네가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니까. 후훗.”

“머리 쓰다듬지 마요. 누나.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형도 마찬가지예요.”

“고마워서 그래. 기영아. 고마워서.”

“네?”

“처음 아카데미에… 아니, 초보자의 시련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는데… 네 덕분에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힌 느낌이니 어떻게 고맙지 않을 수가 있겠냐. 대형 패밀리아에 오퍼를 받은 것도 어떻게 보면 네 덕이니까.”

‘고마운 건 알자너. 애들이 되긴 됐어.’

“그게 어떻게 제 덕분이에요? 전부 형의 능력을 알고 있으니 오퍼가 들어온 거죠.”

“그건 아니야.”

“네?”

“물론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네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을 거라고 본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거 아니, 기영아?”

“누나?”

“아카데미에서 졸업 파티를 한다는 게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거. 사실상 한 달짜리 단기 교육이 뭐가 대단하다고 이런 규모의 파티를 열어주겠어? 보통은 졸업식도 없이 대륙으로 내몰리기에 십상이야. 지나가다 들은 이야기로는 많은 대형 패밀리아들이 이번 기수의 졸업 행사 비용은 지원해 줬다고 하니… 그게 다 누구 때문이겠어? 특히 꽃과 풍요에서….”

“설마요….”

“우리 조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최소 중견 패밀리아의 오퍼를 받았어. 전부 너와 발을 걸치고 싶다는 걸 어느 정도 표현한 거라고 생각해. 이 파티도 말이야. 어떻게 보면 전부 뇌물인 거지. 어쩌면 게니우스들이 영향력을 끼쳤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간에 전부 네 덕분이라는 거야.”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어쩜 그렇게 똑똑하면서도 이렇게 순진하나 몰라, 우리 기영이는…. 이런 게 정치라는 거야. 정치. 아직 얘가 어려서 뭘 모른다니까. 우리 기영이는 아직 사회의 무서움을 몰라요~”

“…….”

“기영이 얼굴 빨개진 거 봐, 승윤 오빠.”

“너무 놀리지 마라. 청하야. 하하핫.”

“저 잠깐 히로세 형이랑 첼로 누나 좀 보고 올게요.”

“아니, 가지 말고! 삐진 거 아니지? 기영아!”

“안 삐졌어요.”

“아니. 잠깐 기영아, 잠깐. 농담하려고 한 게 아니라 가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네?”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이 어린놈의 자식들이 대충 뭘 물어올지 예상이 갔다.

“혹시 그날… 말이다.”

“네.”

“그러니까 네 병실에 우효열이 찾아온 날 말이야.”

“아… 아… 네. 그랬었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분위기 잡자너.’

“웬만해서는 묻지 않고 싶었지만… 저 녀석이 신경 쓰여서 말이다.”

한승윤이 슬쩍 눈치를 준 곳을 바라보자 우효 녀석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뭔 일이 있었는지는 내가 알고 싶다.’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또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얘 진짜 저럴 거면….

‘도대체 왜 튀었지?’

너무 급하게 움직였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완급 조절에 이상은 없었다. 아마 녀석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

감정 과잉 상태로 질질 짜면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고 그냥 건조한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으니까.

살이 있는 인간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한 적이 없었던 녀석을 위한 배려였다.

혹시나 아카데미를 빠져나가 제 갈 길을 간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이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은 그날 이후에도 여전히 아카데미에 남아 있었다.

심지어 아카데미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에도 모습을 드러냈으니 더욱더 녀석의 심리 상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둥에 기댄 채로 조용히 가오를 잡고 있는 모습. 술이나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가끔씩 힐끔 이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한승윤과 임청하가 녀석을 신경 쓰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왠지 모르게 자꾸만 이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그날 이후로 뭔가 너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종종 들 때가 있어서.”

“별거 아니에요. 그냥… 앞으로의 이야기를 조금… 했었고….”

“앞으로의 이야기?”

“네. 자세한 건 말씀 못 드려요. 게니우스들이 연관된 거라서… 아무튼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얘네들이 시바 이상해할 만해.’

한승윤과 임청하마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만큼 우효 녀석이 이곳에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어째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로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일까?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거겠지만… 후우… 그래도 걱정이 돼서 말이다. 가뜩이나.”

“왜요. 또 그 말 하시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 도대체 왜 꽃과 풍요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한 발 걸치는 거예요. 어느 정도 지원을 받기도 했고… 안전하다니까요. 소도시 하리젤은 치안이 좋기로 유명하다고요. 그리고 이건 제 선택이니까 더 이상 왈가불가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같이 가준다니까.”

“형 누나는 기회를 잡으셔야 돼요. 하리젤에서도 절 도와줄 사람이 있다니까요. 형 누나가 이 파티를 패밀리아에서 지원해 줬다면서요. 제가 그 이상을 받고 활동할 수도 있다는 건 예상 못 하세요? 아까는 이제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거라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걱정이 많으세요?”

“후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연락도 주기적으로 드릴 테니까.”

“그래. 꼭 그렇게 하는 거다.”

둘과의 대화를 대충 마무리한 이후에는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다.

우효 녀석 역시 두 번째 기둥으로 자리를 옮겨 등을 기대고 있는 중.

대충 보면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의식이 되고 있었다.

말이라도 걸어왔으면 차라리 덜 답답했을 것이다.

‘이 새끼 목적이 뭐야.’

1차적으로 보자면 녀석이 흥미를 잃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최초의 목적은 어떤 형태로든 녀석에게 목줄을 채우는 거였으니까.

윌리엄과 패배를 미끼로 계속해서 녀석은 이쪽의 시선에 두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녀석이 이쪽을 자신의 시선에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으로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도통 속을 알 수 없고 가끔씩 이상한 돌발행동까지 보여주니 그냥 좋은 쪽으로만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아냐. 일단 관심은 있다는 거자너. 구태여 나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기영아! 여기야!”

“아! 첼로 누나.”

“이야기 들었어. 혼자 활동하기로 했다며?”

“얽혀 있는 게 많아서 혼자 활동하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소도시 하리젤이면… 우리들이랑은 대부분 떨어질 텐데. 조금 더 대도시에서 활동하는 게 좋지 않겠어? 거긴 너무….”

“동떨어진 곳은 아니에요. 중앙과 워프게이트가 연결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소도시 중에 하나고요.”

‘무엇보다 이기영 계획도시가 근처에 있으니까.’

“근데 쟤는 왜 저런데?”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우효열이지. 기영이 너 조심해. 아무래도 쟤 좀 이상한 것 같으니까.”

얘가 이럴 정도면 녀석이 티를 내고 있기는 한 모양인 것 같았다.

“널 감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야.”

“네?”

‘그래. 시바. 그렇게 보여.’

혹시나 설정 오류가 있었나?

어쩌면 내 말이 살짝 못 미더웠을 수도 있다. 조심한다고 조심했었지만 갑작스러운 시한부 설정에 나도 모르는 구멍이 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

의심이 많은 녀석이었으니 모든 걸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무르익어가는 파티, 이미 술에 거하게 취한 몇몇 놈들은 방 안으로 들어가거나 리타이어 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새끼는 여전히 기둥에 기대 폼을 잡고 있다.

“그러니까 그때 기영이가 말이야.”

“많이 취했어요. 들어가요, 누나.”

“뭐? 나 아직 안 취했는데? 안 취했어. 기영아. 끄읍.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아니요. 저는 슬슬 들어가려고요. 내일 준비할 게 많거든요.”

“아. 아아아아… 그, 그… 렇겠네. 저… 저기 기영아!”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내일… 내일! 마중 나갈게.”

“네. 첼로 누나. 내일 봬요.”

대충 여기서 사귄 인연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중을 기약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내일도 작별 인사를 하겠지만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팬들과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지만 몇몇은 확실히 쓸모 있어 보였으니까.

그리고 혼자 남은 시간.

이기영은 발걸음을 옮긴다.

한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누군가에게는 가치 없는 시간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는 모든 것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보고 있지?’

시야 내에 우효 녀석은 없었지만 분명히 녀석이 어딘가에 숨어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아카데미를 거니는 발걸음.

홀로 바라보는 어두운 하늘.

모두와의 추억을 곱씹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다.

아무도 없는 훈련실에 홀로 남아 검을 휘둘러보고 갑작스레 가빠오는 숨을 참지 못하고 헐떡거린다.

쓴웃음을 짓고 미련을 담은 눈으로 검을 바라봤지만 기영이가 검을 쥐는 것은 사치스러운 행동이겠지.

그리고 콜록, 콜록거리는 모습.

지나치게 고통스러워 보이는 기침에는 혈흔이 섞여 있다. 물론 깜짝 놀라는 리액션 따위는 없다.

익숙했으니까.

죽어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역설적이게도 이기영은 죽어가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설정이 있었다.

한 달 동안 머물렀던 방,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추억이 깃든 장소, 조원들과 마찰이 있었던 회의실, 가끔은 투정 부렸었던 식당, 땀을 흘렸던 훈련장, 그가 만난 크고 작은 인연들.

이기영은 그 모든 것들을 가슴 속에 담기 위해, 눈으로 기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

그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투명한 눈물이 눈에 고이는 것을 바라봐 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

그렇게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날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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