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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20화 (1,12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20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동료 (5)

노전사 특1. 후회가 많음.

노전사 특2. 이전의 실수를 바로잡고 싶어 함.

이 노인은 현재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애초에 훅훅 털어버릴 수 있는 사건도 아니겠지만 고통에 첨탑에서 있었던 사건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의 유산. 물론 그녀와 이기영은 다른 사람이다. 심지어 시그니처 대사 역시 다르다.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의 명대사는‘저는 그늘 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였으니까.

너무 같은 대사를 사용하면 아무래도 조금 이상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비슷한 뜻의 대사를 던진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할배의 얼굴이 추억에 잠기는 것은 순식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연 깊은 눈망울에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높은 확률로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아니면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 같은 것들을 떠올리고 있겠지.

그의 머릿속에서는 ‘할아버지!’ 하는 이자벨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않을까.

그걸로도 모자라 함께했던 추억들이 파노라마 흘러가듯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이만 현실로 돌아오세요. 할아버지.’

“…….”

“…….”

“레이먼 볼트 씨?”

“아무것도….”

“네?”

“아무것도 아닐세.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 같으이.”

‘바람 한 점 안 부는데 먼지가 눈에 들어가자너. 표현도 고전적이고 클래식해.’

비가 내리지 않은 게 다행이다.

“괜찮으세요?”

“괜찮네. 괜찮아… 난 괜찮네….”

‘할배 멘탈 챙길 시간 줘야 하나?’

이미 추억에 빠져들어 있다. 앞을 바라보기가 힘이 드는지 자꾸만 먼 곳을 응시하는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땅을 바라보거나 아예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만이 이 노전사가 감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만 같았다.

“레이먼 볼트 씨….”

“아무것도… 아니야….”

손자뻘의 꽃기영 앞에서 주책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레 깨달은 것일까.

‘정신력 좋기는 해.’

솔직히 오열할 만한데….

아마 속으로 부정하고 있는 시기일 것이다.

‘저 아이는 그 아이가 아니다.’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이미 유대감 인터셉트가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노인이 정신을 차리는 속도 역시 빨랐다.

온갖 경험을 다 한 노인답게 벌렁벌렁거리는 심장과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순식간에 가라앉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인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이기영과 이자벨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며,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그녀를 얼마나 소중히 아꼈는지와는 관계없이 이쪽과 그녀를 동일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이며, 본인에게도 좋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를 뿌리칠 수 없다.

비슷한 행동, 비슷한 표정, 비슷한 성품.

결정적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것까지.

그녀에 대한 리써치가 많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관통하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알고 있다.

이상주의자.

그녀는 이상주의자였다. 세상이 따뜻하고 빛나고 있는 것이라 믿었고 모든 이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그늘진 태양왕관 패밀리아는 그녀의 의지에 반해 모인 추종자들의 집단이었으며 그녀는 그녀의 말처럼 그늘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비추어 주는 태양 같은 존재였다.

이기영과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고밖에 볼 수 없다.

세상에 악의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잘못이 아닌 환경의 잘못이라 여긴다.

선한 이들이 모여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많은 것들이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소한 날갯짓 하나가 대륙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꿈꾼다.

모르긴 몰라도 그늘진 태양왕관 패밀리아는 그런 그녀의 성향 때문에 피해 보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이자벨 그녀 역시 그런 부당함과 악의를 참고 견뎠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대형 패밀리아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패밀리아가 중견에서 머무른 이유는 아마 거기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여느 이상주의자들처럼 그녀 역시 인망은 좋았지만 주변 환경이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럼…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레이먼 볼트 씨.”

“벌써?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슬슬 남쪽으로 내려가 봐야 하거든요.”

“남쪽으로 말인가?”

“네.”

“…….”

“…….”

“자네.”

“예?”

그렇기 때문에 레이먼 할아버지는 꽃기영을 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무슨 의뢰를 받았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물론이죠. 간단한 약초채집 의뢰예요.”

“약초채집이란 말이지….”

“예. 실은 제가 약초학에도 조금 관심이 있어서요. 물론 어디 가서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카데미에 있을 때부터 공부를 조금 했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했고요.”

“다른 파티원들은….”

“네?”

“그러니까. 자네와 함께하기로 한 다른 파티원들 말일세. 어디에 있나? 여관에 모여있는 겐가?”

“아….”

“설마… 설마 혼자 숲으로 들어가려고 한 겐가?”

“정확히 말씀드리면 숲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에요. 초입은 어느 정도 안정화가 완료되었다고… 몬스터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들었거든요. 사전 조사도 확실히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아르니아의 잎은 숲 안쪽보다는 주로 외곽 쪽에 자라고 있으니까요. 메고 버섯도 탈리나 뿌리도 전부요. 의뢰서에 들어 있는 물품은 그게 전부예요. 실제로 길드에서도….”

‘그래 내가 봐도 멍청한 소리라는 거 알아. 그러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할아버지.’

“이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정말로 혼자서 가려고 했다 이 말인가?”

“네? 네….”

“몬스터는 둘째 치더라도 남쪽 숲 근처에 산채가 있다는 건 알고 있나?”

“네?”

“자네 같은 플레이어들이나 상단을 노리는 산적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 말일세. 그냥 시정잡배들이 아니라 꽤 커다란 세력을 형성한 상태라네. 의뢰서를 발주한 것은 누군지 정확히 확인해 본 겐가? 모험가 길드의 공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임무가 정상적인 임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심지어 패밀리아의 공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일세. 막말로 그 의뢰서를 산채의 끄나풀들이 발주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설… 설마요.”

“물론 지나친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네만. 로헨 대륙에서는 아예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야. 실제로 몇 년 전에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네. 간혹 무리에서 쫓겨난 몬스터들이 숲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건 어떻게 할 겐가? 혹시 길을 잃는다면? 나쁜 마음을 품는 무리들이나 노예상인 같은 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할지 생각한 적이라도 있나?”

“그런 생각은….”

“후우….”

“간단한 약초채집이라는 말만 믿고… 허… 참… 혼자서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꽃기영은 로헨 대륙을 책으로 배웠지.

“하지만….”

“무장 역시 처참한 수준이고….”

“…….”

“자네 몸을 지킬 수단은 있는지 물어보고 싶군.”

“검을 하나… 가지고 있기는 한데… 방에 두고 왔어서….”

“혹시 레벨은 몇인지… 검사로 전직을 한 겐가?”

“레벨2… 사제직군이기는 한데요….”

“그런데 검을 들고 다닌다니. 빼앗기지 않는다면 다행이겠구만. 그리고 충고 하나 하지. 누군가 자네 레벨을 묻거든 그리 함부로 말해주지 말게. 자네의 능력을 추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말일세. 장비도 마찬가지야. 새로 샀다고 티를 내는 장비를 그리 당당하게 가지고 다니면 어떻게 하나? 뜨내기라고 광고라도 하는 싶은 겐가?”

‘아니, 어쩌라고….’

“후우….”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

컨셉은 꿈꾸고 있는 청년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천재라며 치켜세워주지만 사실은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 컨셉.

노전사의 눈에는 아마 내가 곧 죽을 놈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십중팔구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오지랖을 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전사는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내버려 둘 수 없는 거자너.’

분명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와 이기영은 다른 사람이지만, 아무런 관련도 없고, 굳이 레이먼 볼트 본인이 신경 쓸 이유도 없지만….

‘못 내버려 두겠자너.’

이 노인은 나를 내버려 둘 수 없다.

“안내하게.”

“네?”

“이번 의뢰가 끝날 때까지만 내 자네를 도와주도록 하겠네.”

“그,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레이먼 볼트 씨, 제 의뢰는 제가 끝까지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을 허투루 들은 겐가.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네. 물론 내 자네의 소문을 들었으니 자네가 영특하고,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인재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세상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간단한 의뢰처럼 보이더라도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일세. 원정이라는 것은….”

‘네. 네.’

“아니, 내 충고 하나 하지. 로헨 대륙에서 활동하고 싶다면 끝까지 살아남고 싶다면 혼자 활동하는 것은 최대한 지양하게나. 패밀리아에 들어가라거나 같은 진부한 소리는 하지 않겠지만 최소한 등을 맞대고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을 만드는 것은 중요해.”

‘지금 만들고 있어요, 할아버지. 믿을 수 있는 동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함께 나누고 함께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야.”

‘네. 네. 네. 물론이죠.’

“짐 챙기게나.”

“아….”

“짐 챙기래도.”

“그… 그래도 폐를 끼칠 수는… 없….”

“후우. 그럼 이렇게 하지.”

“…….”

“마침 나도 할 일이 없었던 참이니 일시적으로 파티를 맺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겠는가? 나는 약초 보는 눈이 없고, 자네는 자네 몸을 지킬 수단이 없으니, 보수는 정확히 반으로 말일세. 이러면 조금 부담이 줄어들겠는가?”

“…….”

“…….”

“어떻겠는가.”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

“…….”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

아차.

이런 실수를.

“아, 아니… 레이먼 볼트 씨. 죄송합니다. 갑자기….”

“…….”

“갑자기… 이상하게 지구에 계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당연히 선의의 거짓말. 이기영 삶에 할아버지 같은 건 없었다.

“허허….”

“…….”

“허허허….”

“다시 한번 죄, 죄송합니다. 레이먼 볼트 씨.”

“괜찮네.”

“네?”

“상관없으니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도록 하게나.”

노전사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마치 진짜 손주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지 않은가.

‘3년 후에 요단강 건넌다고 하면 이 할아버지 심장마비 걸리시겠는데.’

물론 이것은 이기영의 작은 비밀이었다.

순수함과 꿋꿋함을 토대로 인간찬가를 외치는 소년이 외롭고 힘들게 간직하고 있는 작은 비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아주 작은 비밀 말이다.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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