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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21화 (1,12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21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동료 (6)

“그래서.”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됐어요. 우연찮게요. 이후에 남쪽 지역으로 내려가 약초 채집을 마치고 복귀했죠. 걱정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덕분에….”

“말하고 싶은 건 그게 끝인가?”

‘이 새끼 진짜 더럽게 삐딱하네. 얘가 매사에 왜 이렇게 불만이 많아?’

“정식적으로 길드에 파티 등록을 하면서 움직이기는 않겠지만 우리 파티에 전위를 담당해 주실 거예요. 할아버지는… 아니, 레이먼 볼트 씨는 현역에서 활동하시기에는 나이가 조금 많으시기는 하지만 그만큼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계세요. 전투 외적으로도 도와주실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기본적인 전투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고요.”

“그리고?”

“그보다 당신은 어땠나요? 볼일은 잘 해결하셨나요?”

“내가 그걸 어째서 네게 말해줘야 하나?”

‘이야기하기 싫으면 시바 그냥 나가든가. 여기는 왜 앉아 있어? 밥도 다 처먹은 새끼가. 진짜 꿀밤 한 대 쥐어 박고 싶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병이라도 생긴 것일까.

어떤 말을 해도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커피를 얼굴에 던져 버리고 싶었던 것도 잠시,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많이 변하기는 했어.’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을 보려고 노력하니 화가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간의 작업이 성과를 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원래 말을 싸가지 없이 하는 걸 패시브처럼 달고 다녀서 그렇지, 녀석 역시 못 이기는 척 이쪽의 말을 따르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거야. 그래서 적응이 안 됐나 봐. 원래 이런 새끼였는데.’

꽤 멀리 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리젤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여관에 돌아온 것도 놀라운 부분.

아마 지난 1회 차에는 딱히 돌아올 곳이라고 정해놓은 거점이 없었을 것이다.

다른 도시에 다녀오는 개념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 들렀다면 거기에 방을 잡고 묵었겠지, 다른 원정을 떠날 때면 다른 방을 구하고, 노숙이 필요하면 야전 생활을 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간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걸 보면 우효 녀석이 하리젤의 여관을 돌아올 곳이라 여기고 있다는 증거처럼 여겨졌다.

들개가 지킬 집을 마련해 주는 임무를 반쯤 성공시킨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통보 하나 하지.”

“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네놈과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다고 해서 너의 말에 따르겠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서 너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다고 해서 너와 함께 똥 밭을 구르겠다는 뜻이 아니야.”

“…….”

“기회, 그래. 네놈에게 기회를 줘보겠다는 거다.”

‘지금도 봐. 이렇게 은근슬쩍 조금씩 양보하잖아.’

분명히 처음에는 하리젤에 따로 볼일이 있다고 말했던 녀석이, 지금은 기회를 주겠단다.

같이 움직일 거라는 착각하지 말라고 분명 며칠 전에 으름장을 내놓았던 녀석이 지금은 한 번 정도 어울려 주겠단다.

우효 녀석의 말대로였다면 이미 녀석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후 다른 볼일을 보러 나가는 것이 정상이리라.

아카데미에서부터 하리젤에 오기까지 날린 시간이 아까워 발을 붙이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만 진짜로 탈주할 생각이었다면 저런 말을 지껄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잠적했겠지. 뭐.’

본래 탈주할 마음이 없는 놈들일수록 말꼬리가 긴 법.

“71살? 뭐? 할아버지라고?”

“…….”

“나는 네놈이 소꿉장난하는 걸 지켜보자고 여기에 온 게 아니야. 네가 말하는 그 거창한 계획을 실현하려면 현 대륙에서 주목받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긁어모아도 어려울 거다. 그런데 뭐? 내가 알 바 아니지만 혹여나 동정심이나 같잖은 정에 이끌린 거라면 나가 뒈지라고 말해주고 싶군. 할아버지와 손자 놀이를 하고 싶은 거라면 다른 곳에서 알아보라는 소리다.”

“아니요.”

“뭐?”

“레이먼 볼트 씨는 동정심이나 같잖은 정 때문에 영입한 게 아니에요. 잠깐의 인연 때문에 영입한 것도 아니고요. 단지 그가 모든 조건에 맞았을 뿐이에요.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했어요.”

“…….”

“…….”

“당신이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플레이어답지 않게 노련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당신 입장에서는 그가 필요 없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레이먼 볼트 씨처럼 이 대륙에 대해 많은 걸 겪은 사람도 드물 거예요. 로헨 대륙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베테랑의 지혜는 결코 무시할 수 없어요.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탱커도 희귀하고요. 더욱이 그는 레벨4의 베테랑 전사예요. 레벨3인 당신이 그를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보시나요?”

“…….”

“전투력 문제도 걱정하실 필요 없을 거예요. 스탯 하락이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수준이고, 레벨4에 랭크되어 있는 만큼 기본적인 전투력도 높아요. 어중간한 사람들을 데려오느니 확실한 사람을 데려오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적어도 레이먼 볼트 씨가 3년 안에 스탯 하락이 진행되지는 않을 테니까.”

‘키워서 쓰는 게 아니야. 단기로 쓰는 거지. 우리 파티가 천년만년 갈 것도 아닌데 뭐 이상한 걱정을 하고 그래? 너 혹시 오래갈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

“그리고… 할아버지라고 부른 건… 죄송해요. 그냥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

“부모님이 안 계셔서… 할아버지가 저를 키워주셨거든요.”

분위기 싸해지자너.

“…….”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했네요.”

“…….”

“…….”

“흥.”

“…….”

“내가 꼬집은 것은 호칭의 문제가 아니다. 분위기의 문제라는 거지. 네놈이 그 노인을 뭐라 부르든지 내 관심사가 아니야. 네놈의 뒈진 할아버지를 떠올리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

“…….”

“정확히 다시 말하지. 애초에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았다고.”

“정에 휘둘려서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을 할 일은 없을 거예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요.”

“그 말. 기억하겠다.”

“아! 그리고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사안인데… 조만간 원정을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

“던전 공략이요.”

“…….”

“아무래도 의뢰나 사냥보다는 던전 공략이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후보지는 물색해 놨고, 필요한 물품이나 정보들을 수집하는 중이에요. 인선이 조금 더 충원돼야겠지만….”

“시기는?”

“최대한 빠르게요. 적어도 한 달, 아니, 일주일 안에는….”

“나쁘지 않군.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네… 네. 아. 그리고.”

“제길. 후우… 또 볼일이 있나?”

“포션이에요.”

“…….”

“이번에 얻은 약초들로 간단하게 만들어 봤어요.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성능이 좋은 것 같으니 가져가세요.”

“…….”

대륙 최고의 연금술사가 수줍게 내민 포션을 빤히 쳐다본 녀석은 이내 조용히 가방을 집어 들었다.

‘우리 오늘 대화 많이 했다. 그지. 교감도 좀 있었던 것 같아.’

당연히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 따위는 없었다. 대신….

“혹시 괜찮은 놈이 있다면 데리고 오도록 하지.”

“네?”

“파티원으로 쓸 만한 녀석 말이다.”

“…….”

“기대하지는 마라.”

라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여관의 문을 박차고 밖으로 퇴장하는 것으로 짧은 회의는 마무리됐다.

이후 위층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쯧. 삐뚤어진 청년이로구만.”

“…….”

“아! 할아버지!”

“저 녀석이 자네가 말하던 그 녀석인가?”

“네. 우효열이에요. 레벨3의 검사고….”

“어째서….”

‘저딴 놈이랑 파티를 맺었냐고? 나도 몰라.’

하지만 대답하는 것은 중요했다. 이 새끼 바깥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르거든. 아니, 무조건 듣고 있어. 분명히 이 새끼 벽 뒤에 기대서 폼 잡고 있을 거야.

“조금 모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따뜻한 사람이에요.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라….”

“허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나도 알아.’

“아주 조금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그보다 할아버지. 여기 이거 받으세요. 오늘 사냥 나가신다고 하셨죠.”

“…….”

“포션이에요. 시중에서 판매하는 상품보다 효과가 좋을 거고요.”

“이거 고맙구나… 이런 걸 그냥 받아도….”

“당분간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 답례예요. 뇌물이라고 봐주세요.”

“허허. 이리 귀여운 뇌물이 또 어디 있을꼬.”

쑥스러운 듯이 고개 숙이기. 단지 한 번 같이 마실 다녀온 할배가 익숙한 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약초 캐기로 이 정도의 유대감을 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지경, 그만큼 꽃기영이 따뜻한 성정을 지녔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상황이리라.

이미 의뢰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은 것은 덤이다.

설정상 꽃기영은 부모님 없이 할아버지 손에 자랐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 하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지나가기는 했지만 아마 담담하게 지구 이야기를 꺼낸 시점에서부터 이 할아버지의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았을까.

물론 각색을 거친 이야기들. 부모 없는 자식이라 괴롭힘을 당했던 유년 시절,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한 사연.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지만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한 소년의 성장기. 물주를… 아니, 믿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나고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합격한 것까지.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 이쪽은 이미 레이먼 볼트의 친손주가 되어 있었다.

“한데… 결심은 변함이 없는 게야?”

“네.”

“…….”

“물론 걱정해 주시는 건 너무 감사하지만 말씀드렸잖아요. 할아버지. 저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하지만 말이다.”

“위험한 일은 최대한 피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제 목숨 아까운지 아는 사람이에요. 준비가 되지 않은 원정이 얼마나 가능성이 낮은지, 아카데미에서 막 졸업한 플레이어들의 사망률이 높은 것도 알고 있어요.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계시잖아요.”

“허허허. 네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구나.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래도.”

“제 눈에는 충분히 대단해 보이세요.”

“허허… 그래… 그렇다면… 파티는 어떻게….”

“글쎄요….”

“추천해 줄 만한 사람이 있는지 내가 알아보는 게 좋을까?”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

“모험가 길드는 이미 둘러봤거든요. 그리고….”

사실은 한 명 봐뒀거든.

전투 직군의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하리젤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본 여자. 준수한 마력 능력치, 괜찮은 특기를 가지고도 음유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녀석.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눈에 더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혹시 봐둔 사람이라도 있는 게야?”

“네. 할아버지. 혹시 하리젤로 돌아오는 길에 봤던 음유시인 하나 기억하세요?”

“아아….”

“네. 피아노 같은 거 치고 있었던 그 사람이요.”

“성문 밖 삼거리에서 말이냐? 그 사람은 분명….”

“네. 전투 직군은 아니지만요.”

“그래. 아마 이름이….”

“…….”

“노담혜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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