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24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동료 (9)
“…….”
“…….”
이를 악문 정하얀이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겉모습과 표정이 무척 대조적이라는 것이었다.
정하얀의 취향은 아니었다. 누구의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추장스러운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옷, 머리에도 요상한 보석 장식들이 꽂혀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딘가의 공주를 연상케 하는 그녀의 모습은 귀여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누가 보기에도 분노를 조절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 조금은 소름끼치는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를 악문 얼굴은 한껏 구겨져 있었고, 얼굴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다.
당연히 평소의 정하얀에게서 볼 수 없는 얼굴.
최근에는 그나마 웃는 모습만 봐왔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더욱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물론 이해야 간다.
백 번을 생각해도….
‘화날 만… 하기는 해….’
갑자기 혼자 떨어진 것도 억울했을 상황이 아니었던가.
어떻게든 대륙 단위의 탐지마법을 시전할 마력을 모으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 것은 당연한 수순.
그런 그녀의 앞에서 여전사들과 광란의 댄스파티를 벌이고 있었으니 내가 정하얀이었다고 하더라도 화가 나기야 할 것이다.
정하얀 전문가인 한소라가 이 표정을 봤다면 곧바로 비상벨을 울리지 않았을까.
밥상을 뒤엎기 전의 그것. 대도시에 운석을 떨어뜨릴 때의 그것.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놈들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렸을 때의 그것. 언젠가 대악마를 소환할 때의 그것.
‘…….’
얘 아무래도 참을 생각 없어 보이는데.
갑작스럽게 일어난 축제가 피의 축제로 변모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평범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녀를 꽉 껴안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좋을까? 그런다고 광란의 댄스파티가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까?
보통 정하얀은 이쪽을 원망하지 않는다.
대부분 환경이나 상황, 혹은 타인을 원망하는 쪽이었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답지 않게 이쪽을 원망하는 기색마저 담겨 있는 눈빛에 마음이 편치도 않았다.
미움받는 건 익숙하지만 반갑지는 않다. 특히나 가족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왠지 모르게 원망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초조해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이익….”
심지어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안대 쓴 누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마력이 넘실거리기 직전,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
“…….”
그녀를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미소를 선보이고, 그녀와 함께 빙글빙글.
손을 잡고 춤을 추며 아까의 광란의 댄스파티가 구애의 춤이 아니었다는 것을 어필해야지.
이기영은 단순히 축제를 즐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순수하고 즐겁게 웃으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축제를 즐긴다.
표정이 굳어 있던 정하얀의 얼굴이 이상해진 것은 바로 그때.
뭔가 화는 나지만 반갑고, 반갑지만 의아해하고 있는 얼굴.
이를 악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꼬리가 웃음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보다 윗선에 있었던 것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어째서 이기영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담겨 있다.
“저… 저… 오, 오, 오….”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에는 곧바로 멀어지기.
“어? 어… 어?”
하고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곧바로 사람들 안으로 사라져야지.
“저기 이봐요. 아까….”
미안해요, 안대 쓴 누나. 지금은 안 돼요.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이번에는 덩치 큰 떡대 놈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적당히 어울린다.
축제를 즐기는 척, 음악을 즐기는 척, 자유로운 영혼인 척하고 있었지만….
‘시바. 시바. 시바.’
마음이 편치는 않다. 주변에 있는 새끼들 때문에 더욱더 그렇다.
무수한 악수 요청 대신 오는 것은 싸구려 럼주를 권하는 손길, 그중에서는 함께 텐트를 사용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놈들도 끼어 있었다.
“거기! 진짜 대단하던데? 어디서 노래라도 배웠수?”
“네? 아니요.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아.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한 잔 주고 싶은데 혹시 술은 좀 마실 줄 아나?”
“잘… 잘은 못 마시는데… 요.”
“도수가 약한 술이니까 괜찮을 텐데.”
“…….”
“같이 한잔합시다.”
“아… 네.”
“위하여!”
‘뭘 위해?’
누가 봐도 독해 보이는 독주를 분위기에 맞춰주며 연거푸 마셔주는 것도 일.
이 쓰레기 양아치 새끼들, 분명히 꽃기영 취하게 만들고 지갑 털어갈 생각으로 가득할 거야.
베테랑인 척해도 어쩔 수 없는 뉴비 냄새를 풍기고 있기는 하니까. 장비도 싸구려 같지 않아 보인다 이거지.
물론 놈들의 계획이 실행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정하얀이 이곳에 있으니까.
그래. 하얀이가 여기에 왔으니까.
‘진짜루 하얀이가 왔자너.’
불안하기는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있다. 아니, 솔직히 기쁜 마음이 더 크다. 안 그래도 다른 얼굴들이 그리워지려는 타이밍에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으니 어떻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꼭 껴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지.’
설명해야 할 게 너무 많다는 것도 일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계속해서 이쪽을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
아마 그녀 역시 머릿속이 혼란스럽겠지. 방금 일어난 상황을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노래를 부르자.
방금과 같이 처음에는 허밍으로 시작, 다시 한번 뻗어 나가는 청량한 꾀꼬리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진다.
술을 권하던 놈들도, 이미 취해 소리를 지르는 녀석들도,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며 댄스파티를 벌이고 있던 놈들도 소음을 줄이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조금은 술에 취한 목소리. 물론 여전히 템포는 빠르다. 꽃기영 역시 방금과 같은 텐션을 유지하며 축제에 어울리는 노래를 목 놓아 부르고 있었다.
“마력의 축복을 받은 하얀 마법사를 모두가 기억하리.”
“…….”
“아름답고 고귀하고 순수한 마법의 아이와 영원히 함께하리.”
“…….”
“그녀와 함께 보았던 풍경과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것들을 영원토록 기억하리.”
“…….”
“푸른 마력의 날개, 백색의 마법사의 웃음을 기억하리….”
“…….”
아까와의 차이점은 꽃기영이 조금 슬퍼 보였다는 것, 분명히 즐거운 듯이 춤추고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슬픈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슴 같은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어째서….’
어째서 그는 슬퍼하고 있는 걸까. 축제를, 음악을 즐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는 슬퍼 보이는 것일까.
꽃기영 자신도 알 수 없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노래를 떠올리고 부를 때면 언제나 기분이 우울해지고는 했으니까.
기어코 노래를 끝마친 이후, 사람들과 교류하며 호흡하는 모습은 마치 그 슬픔을 씻어내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머리가 좀… 어지럽네요.”
“많이 마셨나 보네? 이만 들어가는 게 어때?”
“아니에요. 지금… 이곳이 너무 좋아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마음속 한구석에 있는 공허함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다는 것.
불현듯 찾아오는 상실감을 이겨내기에 이 밤은 너무나도 길다.
이기영은 이곳에 온 이후로 언제나 그런 외로움을,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함께 축제를 즐기는 이들은 그동안 얼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타인이었지만 꽃기영은 이런 이들을 통해 상실감과 허무함을 채우고는 했다.
그런 설정이 5분 전에 추가됐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것 같은데.”
“괜찮은데….”
“괜찮기는 무슨….”
“어이! 이 친구 좀 텐트로 옮기자고.”
“거기 아저씨들. 이리 주세요. 제가… 부축할게요.”
‘안대 누나는 좀 빠져요. 진짜. 내가 누나 살리려고 이래요. 진짜 빠져있어.’
“아니요. 아직 가기 싫어요. 딱 한 잔만 더 마셔요.”
“이 친구 사연이 많은 것 같은데…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나 봐?”
“힘든 일은… 그런 거 없어요. 있다고 해도… 특별할 거 있나요. 여기 있는 모두가 다 힘들 텐데요….”
“쯧. 정 한 잔 더 하고 싶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하자고… 이제 슬슬 추워지고 있고….”
‘이 새끼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생 선배라고 생각하고….”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들어주는 것 정도는 자신 있다고.”
“걸을 수 있겠어?”
“걸을 수 있….”
“누가 봐도 혼자 못 걸을 것 같은데?”
이 새끼들.
생각보다 따뜻한 새끼들이었구나?
범죄자 새끼들처럼 생겨서 왜 이렇게 따뜻해?
지갑을 노리는 탐욕스러운 범죄자의 눈빛이 아니라 왠지 진심으로 이쪽을 걱정하는 것 같은 모습.
이 새끼들이 워낙 산적처럼 생겨서 멋대로 판단했었는데 의외로 젠틀하고 따뜻한 아저씨들 같은 느낌이 있지 않은가.
웬 부랑자 같은 놈들이 앞길 창창한 플레이어를 위로한다는 것도 웃기긴 했지만….
그냥 내가 자신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비위생적이고, 술을 좋아하고, 도박을 좋아할 뿐인 따뜻한 아저씨들이었다.
“그런데? 음유시인인가? 전직은….”
“음유시인은 무슨, 딱 보면 몰라? 이제 막 소환된 플레이어 아니야? 장비도 깔끔하고….”
“자네… 내 말 들리지? 자네… 자네 같이 온 사람은 있나? 혼자 여기 올 것 같은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 보지. 우리가 알 필요가 뭐가 있어? 잔말 말고… 잘 챙겨. 훌륭한 공연을 보여준 만큼 우리도 잘 보답해야지.”
‘이 산적 놈들… 진짜 의외로 착한 놈들이었어….’
그동안 인간불신이 좀 심하기는 했나 봐.
워낙 쓰레기 같은 놈들만 만나다 보니까 세상이 따뜻한 곳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자너.
물론 따뜻한 아저씨들과 함께 휴먼드라마를 찍을 기회는 없었다.
자신들도 모르게 덜덜 떨고 있는 아저씨들, 이쪽을 부축하고 있는 손에 땀이 차는 것이 느껴진다.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쉬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정하얀이 내뿜고 있는 기운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 격이 다른 포식자를 마주했을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피식자의 반응.
정신 차린 정하얀이 다시 한번 이쪽을 찾은 것이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지 불안해 보이는 얼굴,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기를 기도하는 두 손,
“오, 오, 오빠?”
“…….”
“오, 오, 오빠… 맞아요?”
그렇게 이기영은 입을 열었다.
“네?”
“맞… 죠?”
“당신은… 누구… 시죠?”
“…….”
“저를 아시나요?”
창백해진 하얀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저를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