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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25화 (1,12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25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동료 (10)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따금씩 머릿속에 흘러들어 오는 기억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마치 꿈처럼 느껴지던 기억들이었다.

안개처럼, 흐릿하게 느껴지는 기억의 파편들.

불현듯, 갑작스레,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는 기억들은 이기영을 웃음 짓게 하기도 눈물짓게 하기도 했다.

함께하던 소중한 동료들, 아니, 가족들….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인사를 나누던 기억, 별것 아닌 대화를 나누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던 기억.

노을이 지는 풍경 속에서 들려오던 음유시인들의 노랫소리와 남아 있는 그림자들.

이기영은 가끔 기억에 남아 있는 노래들을 흥얼거렸다. 실제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가사를 조심스레 목소리로 옮기고는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단순히 꿈에 불과했을진대, 이렇게나 뚜렷하다니…. 꿈에서 깨어났을 뿐인데 상상도 할 수 없는 지독한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니.

이렇게 지독히도 아플 수가 있다니.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들을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다니.

눈앞에 있는 귀여운 여성은 흩어져 버린 기억 속에 존재하던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은 분명 이 여성의 그림자를 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보았던 풍경과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것들을 영원토록 기억하리.’

‘…….’

‘푸른 마력의 날개, 백색의 마법사의 웃음을 기억하리….’

실제로 잠깐 동안 그녀와 마주한 직후, 음유시인들의 노래가 떠오르지 않았던가.

“오, 오… 오빠?”

“정말… 저를 아시나요?”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덜덜 떨리는 손과 발이 눈에 보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뭔가… 뭔가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안개 같은 머릿속을 걷어내 주지 않을까. 언제나 안고 있던 상실감을 채워 줄 수 있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감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마치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많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후회. 두려움. 그리움. 연민. 애정. 그리고 욕망.

‘욕망?’

“저, 저는….”

“네….”

“결, 결혼한 사이였어요. 오빠의 아, 아내였어요.”

‘얘 봐.’

감정 잡은 거 다 깨지자너.

“결… 결혼한 사이였다구요. 제, 제 이름은 정하얀이고… 오, 오빠랑 저는 결혼했었어요. 결혼한 지는 일, 일, 일 년… 일 년 정도가 됐고. 따끈따끈한… 신, 신혼이었고….”

“…….”

“오, 오빠는 저, 저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언, 언제나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해주고… 항상… 같, 같이 있어 주고… 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서 정, 정말로 걱정했었는데. 이… 이거 봐요. 반… 반지. 오빠가 선물해 준 반지요!”

“…….”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이, 이야기해 줬어요.”

“저… 저는 이제 겨우… 스물세… 세 살인데요.”

“아… 스… 스물세 살이구나… 왜… 왜 스물세 살이지? 그건… 나도 모르는데… 아, 아이가 생겨서… 결혼을 조금 빨리 했어요. 이… 이세라라고… 있는데….”

“…….”

“정, 정말이에요. 우, 우리는 같이… 같이 대륙으로 소환돼서… 튜토리얼을… 그, 그곳에서 오빠는… 조, 조금 더 나이가 많았었는데….”

얘 급발진하는 거 봐.

모처럼 잡아놓은 감정들을 순식간에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는 급발진.

이런 건 현성이나 혜진이한테나 하는 거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잔뜩 흥분한 것 같은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보인다. 아까와는 대조적이었다.

‘귀엽기는 해….’

항상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가기는 하지만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해야 좋을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기영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방금 전에 확인했고, 대륙에서 음유시인들이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는 것으로 기억의 파편이 남아 있다는 것 역시 확인했을 것이다.

당연히 방금 봤던 광란의 댄스파티가 자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겠지.

간질간질한 마력이 스쳐 지나간 걸 보니 내 몸에 이상이 있는지도….

‘확인했네.’

방금 전 불안해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은 환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당연히 그 이면에는 이쪽에 대한 걱정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당장은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몸에는 이상이 없고, 갑작스러운 소환사태에 단기적인 기억상실을 겪고 있다고 판단.

만약 단기적인 기억상실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차곡차곡 쌓은 뒤에 정리한 이후, 정하얀 자아 토론실로 곧바로 직행하고, 내면의 자신과 짧은 회의를 마친 뒤에 나온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몇, 몇 살이신데요….”

“누… 누나는… 아, 아니… 아니, 저는 스물한 살이에요.”

‘얘 방금 은근슬쩍 자기가 누나인 걸로 설정 바꾸려고 했자너.’

“…….”

근데 이걸 누가 믿겠냐구.

“증… 증거도 있어요. 오, 오빠… 허벅지 안쪽에… 작은 점, 점 하나 있는 거. 나만 알고 있는데….”

“…….”

“성, 성격도 다 알아요. 오, 오빠… 여, 여동생 있다고… 이… 이야기해 주셨고. 그… 그분이 저랑 닮았다고… 이야기해 주시고… 커피… 마시는 거 좋아하는 거랑… 책 읽으시는 거… 티, 티파티 하는 것도 즐기시고… 그, 그것 말고도 또 많은데. 허벅지 툭툭 두드리는 습관이랑… 샤워하는 루… 루, 루틴도….”

“…….”

“씻… 씻을 때. 양치질 먼, 먼저 하구… 머, 머리 감구… 얼굴… 얼굴 씻구… 위에서부터 아래로….”

“…….”

“반신욕 할 때는… 오, 오빠는 루틴대로 움직이는 걸 좋아했어요. 항상 규칙적으로….”

‘너무 자세히 말하면 무서워.’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는데요… 저, 저는….”

“배에… 흉터 있죠. 원래는 없, 없었던 작, 작은 흉터… 작은 흉터요.”

“…….”

“제 예상이 맞다면 오빠 기, 기억에 없었을 거예요. 그, 그건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진 상처이기도 해서 지, 지워지지 않을 흉터래요.”

“…….”

“어떤 부분이… 기억나세요? 혹시… 기억나는 게 있으신가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라….”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밀고 들어오는 모습은 저돌적이라는 말로밖에 표할 수 없다.

마치 압박 면접을 받고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무작정 이쪽이 아는 비밀과 습관들을 내뱉으며 내 말이 맞으니 자신을 믿어야 한다 호소하는 모습은 조금은 무섭게 느껴질 정도, 뭔가 장단을 맞춰야 하는데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정하얀 역시 자신이 뭔가 잘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오빠는 어려졌고, 왠지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으니까.

‘빌드업이 하나도 안 되어 있자너.’

보통 조금씩 이해시키려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법일진대, 무작정 결혼했다고 말해버리면 쉽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갑작스레 상황극을 하더라도 서로 손뼉이 마주쳐야지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몰아붙이기만 하고 있으니 대화 자체가 붕 떠 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이 다시금 입을 연 것을 바로 그때였다.

“소라… 만났었죠… 오, 오, 오빠.”

“…….”

“소… 소라가 무슨 이야기했어요? 소, 소라가… 오빠가 자기 남자… 친구였다고 그래요?”

‘시바. 분명히 아니라고 했는데. 얘는 아카데미 안에서 퍼진 소문을 어디서 또 주워들었어?’

“소, 소라 누나는….”

“소라… 누나라고 해요? 소, 소라가 자기가 누, 누나라고 했어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 그때는 저도 조금 놀라서… 그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돼서… 분명히… 나중에 조만간 다시 한번 찾아오겠다는 말밖에는… 저도… 저도 지금 제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자꾸만… 이상한 기억들이 꿈속에서 나타나고는 하니까요… 소라 누나가 이걸 한번 알아보겠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고….”

“…….”

“솔직히요… 믿… 믿기 힘들어요. 당장은… 너무 혼란스럽고… 지,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정하얀의 표정이 슬슬 구겨질 것 같다.

“하… 하지만 만약… 하얀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

“저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군요.”

“…….”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과… 결혼을 했다니… 헤헷….”

살짝 미소를 띠어보자.

정하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삐 풀린 적토마처럼 돌격하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이후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눈앞에 있는 목표에 맹목적으로 달려들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역공에 본래의 소심한 정하얀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 아름… 아름다워…?”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아, 아름답대. 히… 히히힛. 히히히히… 히히히히힛. 오, 오빠가 나한테 첫, 첫눈에… 반, 반했나 봐. 소, 소라야.”

‘소라 여기에 없어.’

“히힛… 히히히히힛. 히히히히히힛. 푸히히히히히히히힛.”

‘좀 무섭게 웃기는 하자너.’

하지만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쪽으로 가지고 오는 것에는 성공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광기에 몸을 실은 폭주기관차가 아닌 부끄럼쟁이 하나.

대화에 집중하기보다는 본인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공주처럼 코디를 한 것은 알고 있는지 굉장히 공주 같은 모습을 선보이고 있지 않은가.

“믿고… 싶네요.”

“진, 진짜예요. 정말로.”

“네. 하지만… 제가… 지금 좀 혼란스러워서… 혹, 혹시 조금 차근차근… 대화를 해도 괜찮을까요? 저, 저도 궁금한 게 많아요.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로헨 대륙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의 기억들….”

“…….”

“만약 하얀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제가 이곳에 있는지, 도대체 이 꿈의 정체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네. 네!”

“다행이다.”

시바, 근데 내가….

‘방송 오프 해뒀었나.’

한소라 때는 분명히 해뒀었는데….

정하얀에게 지속적으로 미소를 띠며.

지나간 로그를 올려다본 것은 당연지사.

그 이후에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노을 빛의 검신♥이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묻습니다.]

[노을빛의 검신♥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고 외칩니다.]

[노을빛의 검신♥이 자신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냐고 울부짖습니다.]

‘아….’

[노을빛의 검신♥이 D%%118%^&[email protected]^!]

[하늘의 문지기♥가 노을빛의 검신을 조심하라 조언합니다. 간혹 필멸자에게 집착하는 게니우스가 생기지만 저 잡신은 그중에서도 위험한 수준이라고 경고합니다.]

[초승달 아래에서 우는 늑대가 저자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고 비웃습니다.]

[노을빛의 검신♥이 이건 말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외칩니다. 이런 현실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눈물을 흘립니다.]

[노을빛의 검신♥………….]

[노을빛의 검신♥……….]

[……………….]

[……….]

‘…….’

[노을빛의 검신♥이 로헨의 모든 것들을 저주합니다.]

‘아… 안 돼.’

[노을빛의 검신♥이 로헨의 모든 것들을 멸하고자 합니다.]

[노을빛의 검신♥이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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