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26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동료 (11)
[황금색 성좌에 앉은 이♥가 저 잡신이 드디어 꼬리를 내렸다며 웃음 짓습니다.]
[하늘의 문지기♥는 여전히 우리 기영이를 걱정합니다. 악질적인 게니우스 하나를 떼어낸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그가 마지막에 이야기한 것이 신경 쓰인다고 말합니다.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심연 속의 가장 낮은 심연♥은 노을빛의 검신은 당신을 가장 아껴주는 게니우스였다고 중얼거립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미소 짓습니다. 그를 헐뜯는 것 같아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지만 노을빛의 검신은 당신에게 이로운 게니우스가 아니었다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하늘의 문지기의 이야기처럼 그의 집착은 도를 넘어섰으며 정신적 착란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가녀린 촉수여왕♥은 가끔 미성숙한 게니우스들이 미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 노을빛의 검신 역시 무료한 삶을 견디다 못해 무너졌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처럼 자존감이 낮은 게니우스라면 그럴 만하다고 말합니다.]
‘얘 왜 이렇게 미친놈 취급이야.’
[거룩한 밤의 여주인♥ 역시 가녀린 촉수여왕의 말에 동의합니다.]
[삐뚤어진 수호자가 이번만은 당신들의 편이라 말합니다. 마치 자신이 저 필멸자의 뭐라도 되는 것마냥 나대는 게 꼴 보기 싫었다며 웃습니다.]
[초승달 아래에서 우는 늑대 역시 모두의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왜 이렇게 민심이 안 좋아? 뭐길래 갑자기 김현성으로 여야 대통합이야.’
[황금색 성좌에 앉은 이♥가 코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는 모든 코인을 탕진했을 거라고 비웃습니다. 이미 당신은 많은 코인을 벌었으니 어떻게 봐도 이득을 본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가 기뻐합니다.]
[……가 드디어 저 기분 나쁜 잡신을 보지 않아도 된다며 즐겁게 미소 짓습니다.]
무슨 공공의 적이라도 된 것마냥 여기저기서 기뻐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민심이 안 좋을 일인가?’
물론 이해가 가기야 한다.
아무리 회장님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친한 척을 하거나 본인이 특별한 팬인 양 나댄다면 빈축을 사는 법.
그동안 김현성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반응을 보고 있자면 비호감 스택을 차곡차곡 쌓고 있던 것 같다.
당연히 노을빛의 검신과 꽃기영의 숨겨진 서사를 모르는 이들의 입장에선 이 새끼가 정말 미친놈처럼 보이기야 했을 것이다.
필멸자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채팅창 지분을 차지하기 일쑤, 분위기를 읽지 못해 채팅창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다거나 뜬금없는 쿠폰 투척으로 흐름을 끊은 것도 셀 수 없다.
자꾸만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고 와 방장과 사담을 나누려고 한 것은 명백히 선을 넘은 행위였다.
당장은 꽃과 풍요의 여신의 품에 안착하기는 했지만 꽃기영은 모두의 꽃기영이었으니까.
이곳이 시끌벅적해진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하늘의 문지기가♥가 이미 지나간 일이라며 그의 이야기보단 당신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심연 속의 가장 낮은 심연♥ 또한 하늘의 문지기에게 동조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그게 정말인지 궁금해합니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대체 아직 밝혀지지 않는 것이 뭐가 이리 많은지, 당신의 비밀에 대해 알고 싶다고 중얼거립니다.]
[거룩한 밤의 여주인♥이 새로운 소식에 대해 흥분합니다. 새로운 비밀이 등장했다고, 이래서 이곳을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오늘 뿌린 떡밥은 노을빛의 검신의 탈주뿐만이 아니지 않은가.
이 기억상실 떡밥에 대해 기뻐하는 녀석들도 많았다. 갑작스럽게 채팅창을 핫 하게 달군 노을 녀석의 탈주만큼, 기억상실 소재 역시 오늘 하루 종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만한 소재였다.
평소였다면 적당히 힌트를 주거나 궁금증을 유발시키면서 시청자들에게 호응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관리할 수가 없었다.
[가죽을 만지는 부드러운 손♥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움켜쥡니다.]
‘그래. 시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당연히 김현성 때문이었다.
‘이 새끼는 시바 도대체 왜 탈주한 거야….’
당장 눈앞에 있는 정하얀을 감당하기도 벅찬 상황이 아니었던가.
‘저주는 또 뭔데….’
진짜 저주할 수 있는 건가? 로헨을 멸하는 건 또 뭐고. 도대체 왜 나간 건데.
‘시바.’
이쪽의 명백한 실수였기 때문에 더욱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는 상황, 물론 김현성이 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녀석은 위쪽 일에 거의 문외한이었고,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실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으니까.
‘이 새끼 진짜 여기 찾아오는 거 아니야? 아니지?’
하지만 왠지 불안하다. 가능성이 낮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치 않다.
항상 김현성과 정하얀이 돌발행동을 할 때면 잘 나가던 일도 나락으로 처박히곤 했으니까.
언제나 내가 예상하지 못한 참신한 방법으로 엿을 먹여왔던 만큼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현성 이 새끼는 이쪽을 아끼는 척하고 있지만 언제나 1회 차의 복수를 하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오, 오빠… 오빠?”
‘얘는 또 어떻게 해.’
“그… 꿈의 정체라는 건… 지, 지금부터 말씀드리면 되는 건가요? 그, 그, 그러면 일단… 시, 시간이 늦었으니까. 일, 일,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 어떨까 싶어요. 일, 일단….”
일단 텐트가 아니라 신전부터 가야 돼. 하얀아. 신전부터.
샤넬리아 에르메스 쪽 파벌과 이야기부터 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앞으로 무슨 상황이 펼쳐지든 간에 필멸자 입장에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으니까.
“저… 하… 하얀 씨라고 불러도 되나요?”
“네. 당, 당연하죠. 오빠. 기, 기왕이면 하얀이라고 불러주세요. 오, 오빠가 항상….”
“지, 지금은 좀… 좀… 그래서.”
“네?”
“물론, 이… 이렇게 귀엽고 아름다운 분과 제가 좋은 인연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기쁘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 시간이 필요해요. 아직…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대로라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
“…….”
표정 풀어. 제발. 너까지 이러지 마.
“당황스럽기도하고… 떨리기도 하고… 정말 죄송해요. 이러면 안 되는데… 실망하셨나요.”
이기영이 정하얀을 경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눈앞에 있는 낯선 여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감정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으니 모든 것이 무섭고 생소할 터.
정하얀 역시 본래의 이기영이 얼마나 신중한 성격인지 알고 있는 만큼 갑작스레 여기에서 분노를 터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알아가고 싶어요.”
“…….”
얼굴도 붉혀보자. 어차피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느낌으로.
“…….”
그러니까 제발 표정 좀 풀어.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드려도 될까요?”
제발.
“제 이름은 이기영이에요. 하얀 씨.”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로. 수줍은 듯이 손을 내밀어야지.
제발.
“…….”
“…….”
“제… 제 이름은 정, 정, 정하얀이에요.”
정하얀 님이 웃어주셨어.
“히힛… 히히히힛….”
정하얀님께서 웃어주셨어. 얘 은근히 마음에 들었나 봐.
도대체 어느 부분이 먹힌 건지는 알 수 없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다시 한번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에 빠지는 흔한 클리셰가 마음에 든 것일까?
어쩌면 잠깐이나마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정하얀은 바보가 아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이 자신을 여동생 대하듯이 대하고 있다는 걸 은근슬쩍 깨닫고 있기도 했고, 내심 그게 신경 쓰였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치명적인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번 기회에 자신의 새로워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심산이 분명하리라.
만약 기억을 되찾더라도 자신의 모습은 뇌리에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든 유혹하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는 자세. 매번 꼼지락거리는 모습 대신 자리한 것은 팜므파탈로서의 자신을 주장하기 위한 모습.
굳이 이쪽으로 컨셉을 잡은 걸 보면 정하얀이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게 어떤 타입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꽤나 자세하게 말이다.
“히히힛… 히히히히힛.”
‘웃음소리는 좀 안 새어 나오게 해.’
“오빠가… 편하신 대로 푸흡… 하세요. 저는 언제나 똑, 똑같은 자리에 있, 있으니까요.”
거기에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현모양처 설정도 추가됐어.
‘하나만 해….’
너무나도 많은 설정을 담았기 때문에 캐릭터 붕괴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일단은 본인의 매력을 보여주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럼 이만… 들어가도 될까요? 하얀 씨….”
“네… 네! 저희 텐트 마침 두, 두 개 있으니까. 하나 쓰시면 될 것 같아요. 오… 오빠.”
저희?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폐라고 생각하지 마, 마세요.”
슬그머니 주변을 살피니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여자가 둘.
남궁선.
그리고 임채령?
성향도 좋고, 기벽도 나쁘지 않다. 잠재능력도 괜찮고… 전체적으로 B급이라 평가할 만하지만 레벨 4까지 오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이 돌봐줬었구나.’
정확히 언제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 정하얀이 입고 있는 공주 옷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섹, 섹시한 거 주세요.”
“네? 정하얀 님….”
“섹시한 옷이요! 섹시한 옷!”
아니나 다를까. 눈치 보고 있는 이들에게 허겁지겁 달려간 이후에는 이상한 요구를 하기 시작.
이제 텐트에 박혀서 나오지도 않을 텐데 어째서 섹시한 옷을 주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기뻐 보이니 그걸로 됐다.
앞으로 어떤 매력을 보여줄지 고민하는 것도 보면, 아마도 정하얀으로 인한 로헨 붕괴는 가까운 미래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얀이도 하얀인데… 노담혜는 어떻게 하지?’
“저… 먼저 들어갈게요.”
“잠… 잠깐. 잠깐만요. 오빠. 저, 저 옷 좀 갈아 입고 다시… 주무시기 전에 이야기 좀….”
‘노담혜는 나중에라도 데리고 오면 돼. 지금 걔가 문제가 아니야.’
김현성이 어떤 행동을 할지가 문제지.
‘그냥 넘어오려나?’
능력치가 깎인 상태에서? 그냥 넘어오는 건가?
‘아니야. 위험부담이 너무 커.’
녀석의 입장에서는 한시가 급한 상황처럼 느껴질 것이다.
몸을 만드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린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페널티를 받으면서까지 넘어오는 선택지에는 발을 디디지 않을 것이다.
세력도 없고, 기반도 없다. 김현성 입장에서는 최악의 선택지로 꼽힐 것이다.
애초에 시스템의 허락할지 안 할지도 미지수였다.
나와 정하얀이 넘어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시스템은 로헨 대륙을 과부하 된 상태라고 판단했다.
아직 안정화도 되지 않은 대륙에 노을빛의 검신이라는 거물에게 비자를 내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김현성이 만약 이곳에 넘어오고 싶다면, 선택지는 비자를 받지 않고 넘어와 불법체류 하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외신 놈들이 넘어온 형태로 넘어온다든가.’
이를테면….
‘악마 대군주로 소환된다든가.’
악마와 흑마법사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김현성이 대군주로 소환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만약 김현성이 대군주로서 이곳에 똬리를 튼다면 어떨까. 아마 이곳 게니우스들에게 불렸던 것처럼 이명이 붙여지지 않을까.
“집착과 광기의 군주.”
‘이건 좀 멋없다. 집착과 광기는 좀… 좀 그래… 이건 다른 걸로 붙여주는 게 맞아. 분노와 복수 같은 거….’
칭호는….
“노을빛의 마왕.”
간지날 것 같기는 했지만….
로헨 대륙 멸망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