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27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동료 (12)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굳이 함께 하실 필요는 없는데… 하얀 씨도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시고….”
“제, 제, 제가 오빠 옆이 아니면 어디로 가, 가겠어요?”
“…….”
“…….”
“설, 설마 여기까지 온 마당에… 아직도 못 믿으시는 건가요? 제, 제가 오빠 와, 와이프였다구요!”
‘너라면 믿겠어? 아니, 믿기는 믿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어제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직은 조금 이런 상황이 어색해서 그래요. 제가 기억하는 건 단편적인 것들뿐이고 그것마저 확실하지 않거든요… 하얀 씨를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조금 미안하고 죄송해서….”
“죄, 죄, 죄송해하실 필요 없어요. 당, 당연한 거니까. 이, 이건 당연한 거니까. 아… 아내로서… 당연히… 오빠 와이프로서 당연히 옆에 있어야죠!”
“…….”
“…….”
“정 그렇다면 혹시….”
“…….”
“혹시 괜찮으시다면… 기억에 관한 일은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또, 또 하얀 씨와 저에 대한 것도…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혹시 안 된다고 하면 거절이라도 할까 허겁지겁 대답하는 모습이 보였다.
“물, 물론이에요. 당연히 그럴 거예요. 굳, 굳이 말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아냐. 너 말하려고 한 것 같았어.
“…….”
분명히 동네방네 소문 다 내고 다녔을 거야. 물론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23살이 결혼하고 애까지 있다는 설정은 너무… 너무 억지 설정이자너.
레이먼 볼트는 물론이거니와 우효열에게도 괜히 위화감 있는 설정을 던져주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모르는 방년 23살 꽃기영과 결혼해서 애까지 딸려 있는 이기영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잘, 잘 지낼게요. 오, 오빠. 다, 다, 다른 말썽 안 피우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너랑 효열이랑 잘 맞을지는 또 모르겠다.’
물론 걱정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둘은 대화할 일도 많지 않을 거고 적당히 거리감 있는 동료로 지낼 계획이었으니까.
아마 원정을 나갈 때에만 함께 활동하지 않을까? 개인 활동은 막지도 않을 테니 가족 같은 분위기의 파란과는 제법 거리감이 있는 집단이 만들어질 확률이 높았고….
다른 것보다 정하얀이 합류한다는데 잘 맞고 안 맞고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벌써 레벨 4자너.’
“함께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족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얀 씨와 같이 있을 때면… 왠지 안정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참 이상하죠?”
“히… 히히힛….”
심지어 저 능력치와 레벨 4라는 숫자가 정하얀을 대변하지도 않는다.
주문의 개수와 마력의 총량, 마력의 활용법이나 회복속도, 같은 레벨 4, 아니, 심지어 레벨 5의 마법사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언제 돌발상황이 펼쳐질지 모르는 현 상황에서 가장 믿음직한 아군.
신경 쓰이는 것은 정하얀 뒤에서 따라오는 두 명의 여자들밖에 없었다.
‘쟤들도 같이 오는 거야?’
“…….”
‘쟤네들은 그냥 집에 가고 싶은 것 같은데?’
마치 따라오는 게 당연한 것마냥 일언반구도 없다.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명은 마치 공주님을 보필하는 서번트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얼굴에 감돌고 있는 불안한 표정은 덤, 나름 연차가 쌓인 플레이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효열 파티에 들어오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싶은 느낌이었다.
심지어 인원이 늘어나는 걸 반기고 싶지도 않다. 파티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녀석이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겨우 두 명 늘어나는 건데… 괜찮지 않을까? 정 쓰다 안 되면… 행정업무에 몰아줘도 되는 거고… 구태여 파티원이라고 도장을 찍는 것보다는….’
아냐. 이 새끼 은근히 예민해서 주변환경이 너무 갑작스레 변하면 도망칠지도 몰라.
들개마냥 킁킁거리면서 냄새 한번 맡아보다 으르렁거릴 것이 분명했다.
한 명 한 명씩 익숙해지는 것도 조심스러울진대 갑자기 파티 하우스에 객식구가 세 명이나 늘어나는 상황.
우효열이 데리고 오기로 한 파티원들까지 포함하면 네 명, 심지어 언젠가 노담혜까지 데리고 온다는 것을 가정하면 다섯 명. 볼트 영감과 이기영, 우효열까지 합치면 벌써 여덟 명.
단순한 파티라고 하기에는 인원의 수가 너무 많지 않은가.
본래 시간을 두고 친해지길 바라를 찍고 싶은 이쪽으로서도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원정을 나가거나 회의를 할 때 세상을 왕따시키는 것마냥 구석에 처박혀 있을 모습이 벌써부터 선했다.
‘부담스러워서 아예 안 나올지도 몰라.’
새삼스레 김현성이 얼마나 유능한 회귀자였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오, 오빠 혹시 어, 어디까지 기억하고 계세요?”
“글쎄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요.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형태가 잡힐 듯 말 듯… 이상하게 희미한 노랫소리는 기억에 남네요. 그리고… 다른 목소리도요.”
“혹시 현, 현성이 오빠는 기억하세요?”
“네? 그 사람이… 누구….”
‘얘가 붙임성이 좀 없고 친구가 없어서 그렇지 기본적인 사회생활 정도는 가능했잖아.’
아니, 기본적인 사회생활이라고 칭하는 것도 과소평가였다.
김현성은 한 길드의 길드마스터였고, 인류연합군의 주축 인물이었다.
조혜진의 도움을 받은 것이 유효했겠지만 어찌 됐건 간에 사회에 녹아드는 것으로 모자라 높은 지위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것은 당연지사.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 새끼 게니우스 라인은 어떻게 뚫은 거지?’
신성으로 퀘스트를 보내거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까.
‘지혜 누난가? 지혜 누나가 옆에서 손 좀 봐주고 있나?’
아니, 이 새끼 멍청한 건 맞는 건가?
그냥 머리 쓸 필요가 없었던 거 아닐까.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물론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발걸음이 점점 빨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얀 씨. 저기 저는 신전 좀 다녀와야 될 것 같아요.”
“저도 같… 같이….”
“아니요. 제가 안내해 드린 여관에 먼저 들어가 계세요. 꼭 해결해야 될 일이라….”
“…….”
“…….”
“부탁이에요.”
“…….”
“…….”
“빨, 빨리 오셔야 해요?”
‘그럼 늦게 오겠어?’
일단은 정하얀과 그녀의 서번트들은 빠르게 파티 하우스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워프게이트를 탄 이후에는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목적지는 간신히 워프게이트를 보유하고 있는 소도시.
‘그동안 정신이 없기는 했어.’
진작 신전에는 한번 들렀어야 했는데. 아카데미 졸업하고, 파티 꾸리고, 우효놈 케어하느라 시간이 없었다고.
흐름이 무난하게 진행되다 보니, 사실 깜빡 잊고 있었기도 했고.
“혹시 이기영 님이십니까?”
“…….”
‘여기는 신전이야 가죽 공방이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여신님께서….”
“…….”
‘규모도 꽤 크네?’
이쪽을 맞이하는 것은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추종자들, 어제의 사태 이후로 내가 자신들을 찾을 거라는 것을 예상했는지 그녀를 섬기는 패밀리아의 인원들이 달라붙고 있었다.
길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발을 내디딘다.
마치 대기업 총수를 보좌하는 여러명의 보좌관들마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뒤만 따라오는 모습.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는 늙은 장인 한명을 보고 있자니 이쪽에 대해서는 대충 언급을 한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내가 시바 지금 이 시점에 차가 넘어가게 생겼어?’
“혹시나 여신님께서….”
‘입 좀 다물어.’
“여신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희들이 만든 컬렉션을….”
‘쇼핑하러 온 거 아니구요. 근데 저건 좀 괜찮게 생기기는 했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오랜만에 불려보네.’
이쪽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늙은 장인은 샤넬리아 에르메스에게 전해 들은 게 조금은 있는 모양.
그녀가 신뢰하는 추종자인지 마지막까지 붙어 안내 아닌 안내를 하고 있었다.
“잠깐… 잠깐….”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하는 것만 같다.
목적이야 뻔했다. 이쪽의 화를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겠지. 아니면 나를 맞을 준비가 덜 되어 있다거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커다란 문이 있는 곳으로 당도하자 더 이상 나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무릎을 꿇는다.
당연하게도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는 신성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충 성소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장소, 늙은 장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공간, 평소였다면 그녀의 전언이 있기 전까지는 봉인되어 있는 장소였을 것이다.
거침없이 문을 열자 눈에는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본 따 만든 거대한 석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얘네들 좀 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니우스들이 시야에 비쳤다.
“…….”
“…….”
‘지들 잘못이 뭔지는 아는 모양이네.’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필두로 직접 강림까지 하신 모습들. 샤넬리아 에르메스야 본인의 성소이니 크게 제약이 없겠지만 다른 이들은 꽤 큰 코인을 소모하면서까지 모습을 드러내 주셨다.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을 전부 확인하기도 쉽지가 않다.
수는 100명이 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신성한 빛을 뿌리고 있는 놈들이 전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눈으로 목도하는 것은 장관 아닌 장관이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이제야 이 새끼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나 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왜 먼저 찾아올 생각을 안 하시고 다들 기다리셨을까?”
[…….]
[…….]
[연락을 취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통해 저희의 사정을 설명해 드리려고 했었지만, 혹여나 다른 게니우스들이 현 상황을… 깨닫게 될까… 뭐라고 말씀드릴 면목이 없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 와중에 파벌의 대표 정도로 보이는 녀석이 입을 열어온다.
이명이나 이름은 궁금하지 않았지만 파벌의 수장답게 가장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전투 계열, 어딘가에서는 꽃과 풍요만큼이나 대형 패밀리아를 거닐 만한 놈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당장은 여력이 없어 보인다.
‘투자한 게 많으니까.’
우효열의 회귀도 이쪽 파벌에서 주도했을 거고, 희생과 부활의 신을 이쪽으로 초대한 것에도 많은 코인을 투자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로헨 대륙을 위해 사활을 걸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결사단들이 이 자리에 모두 모여 있었다.
[아주 잠시만 시간을 주신다면 자세히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
근데 얘네들이 나를 너무 호구로 봤나 봐.
일단은 근처에 달려 있는 장식품같이 생긴 무언가를 땅바닥으로 패대기 쳐보자.
다른 것도 전부 엎어버려야지. 히스테리 한번 부려보자.
기왕이면 부수고 싶었지만 퉁 소리가 적막이 감도는 성소에 울려 퍼졌다.
물론 저 물건들이 박살 나느냐 나지 않느냐에 대한 여부는 상관없다.
어차피 희생과 부활의 신이 얼마나 화났는지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아마 여기서 고개를 숙인 놈들 전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
[…….]
침묵이 감돌고 있는 성소에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야. 이 새끼들아.”
[…….]
“지금 장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