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30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동료 (15)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마왕이 시작됩니다.]
‘…….’
“이… 이 미친놈….”
자연스럽게 동쪽 지역으로 고개를 돌린 게 된다. 방금의 메시지가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잿빛의 해일이 몰려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마치 로헨을 집어삼킬 기세로 푸른색 하늘을 잠식하고 있는 모습은 세계 멸망의 신호탄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이 또라이 새끼.’
최소 몇 주가 걸릴 것이라 생각했던 작업, 녀석이 어떤 비자로 로헨 대륙의 입국심사장을 통과하게 될지 가정했던 경우의 수가 전부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애초에 비자를 발급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김현성이 아무리 미친놈이라 해도 설마 대군주가 가지고 있는 비자를 강탈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던질 거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 만약 운이 조금만 없었더라면….
‘뒈졌을 수도 있었어….’
김현성은 강하다.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상대이지 않은가.
50자도, 30자도 아니라 20자. 그것도 가장 첫 번째에 랭크되어 있는 21군단장과 혈투를 벌인다는 것은 녀석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에 보였던 상처투성이의 몸이 얼마나 전투가 힘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녀석이 아끼는 듀렌달도 파손되었거나 잃어버렸을 확률이 높다. 스쳐 지나갔던 영상에서는 검을 봤던 기억이 없었으니까.
머리가 지끈지끈거리기는 했지만 이것보다 더욱더 짜증 나는 것은 이 새끼한테 조력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최소한 21군단장과 김현성을 대면시킬 수 있을 만한 수완을 가지고 있는 조력자 말이다.
‘지혜 누나? 리무르아?’
아니면 벨리알 이 새끼. 그것도 아니면 미친 까마귀일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많았지만 적어도 김현성 혼자 일으킨 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아, 큰일 났다. 아… 아… 큰일 났다.”
계약서에 지장을 찍기 직전에 일을 터뜨렸다면 김현성을 로헨 침략의 신호탄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던 상황.
기껏 괜찮은 주를 사자마자 그래프가 떡락하는 걸 눈으로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뭐야….”
“노을빛의 마왕은 또 뭐야?”
“메인스트림이다. 떴다! 떴다고!”
“21군단장? 잿빛 하늘? 갑자기 시발 이게 무슨….”
“지금 당장 패밀리아에 연락해. 새로 들어온 정보가 있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연결됐습니다. 곧바로 복귀하랍니다.”
“제길… 이미 원정에 나가 있는 애들은….”
“예외는 없답니다. 전부 복귀하랍니다.”
“모험가 길드는 아직 조용해? 게니우스들한테 정보 받은 플레이어가 한 명도 없었어? 이렇게 갑자기 터지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아무도 몰랐다고?”
“신탁은? 최근 들어온 신탁은 없다고 하지 않았었어?”
“일단… 일단 복귀하랍니다. 그것 말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기랄! 일을 이따구로 처리하면… 어떻게 하라고 이번 원정 준비를 어떻게 했는데….”
“속보요! 속보!”
“…….”
“속보요! 패밀리아 지하세계의 왕에서 급하게 용병들을 구한다고 합니다! 4레벨 이상만 신청이 가능하고 정규 가입자들도 구인하고 있다고 합니다! 업계 최고 대우를 해드린다고 하니 모두들 신청해 주십시오! 모험가 길드에서 신청할 수 있습니다!”
“패밀리아 운명과 시간의 파수꾼에서도 용병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정규계약을 맺으신 생산직군 플레이어도 함께 구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바빠지겠구만 이거….”
“얼마 만의 메인스트림인지… 이거 몇 년 만이야?”
‘시바 개판이자너.’
“뿌슝 빠슝 빠슝! 게니우스님들 오늘도 시청해 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변신 TV에 최변신이라고 합니다. 네.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 아니, 방금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마왕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갑작스럽게 공개되어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지고 계실 텐데요. 정확히 배경이 숨어 있는 건지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별별 새끼들이 다 등장하자너. 진짜 시바.’
“네. 그래서 결론을 말씀해 드리자면 아직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노을빛의 마왕이 누구인지, 21군단 바신이 소멸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건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게니우스님들! 나가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니우스님들!”
도시 전체가 시장바닥이 되어가고 있다. 이상 현상에 겁에 질린 이들도 눈에 띄지만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오랜만에 찾아온 메인스트림을 환영하는 쪽이었다.
다급하게 중앙으로 연락을 넣고 있는 플레이어나 패밀리아의 호출을 받아 하우스로 급하게 돌아가는 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죽하면 떨거지 잡신들을 상대로 코인 장사를 하는 놈들도 속출할까. 영양가가 하나 없는 방송을 찾을 정도로, 게니우스들 역시 현 상황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거기 있는 거 다 주세요. 전부. 다 포션이었죠? 얼마예요?”
“가격이 조금 올랐수다.”
“괜찮으니까. 빨리 주세요. 빨리!”
심지어 사재기하는 놈들도 보이자너.
전쟁이 터져서 구호 식량을 사재기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포션 같은 개인 보급품이나 아이템들을 무작정 사들이는 이들, 메인스트림을 통해 한몫 단단히 잡겠다는 심산으로 보였다.
당장 본인들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대형 패밀리아에서 보급품들을 쓸어 담을 테니 지금 사 놓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이라 생각했겠지.
난이도가 높을수록 보상이 크니 욕심이 생기는 것은 이해가 간다.
‘지들이 뭐 이걸 클리어할 줄 알고 있자너.’
저레벨 플레이어들 역시 바빠 보인다. 마왕성이 아니라 그 근처에서 사냥이라도 해 기여도를 챙기겠다는 심산으로 보였지만 그게 가능할까?
‘절대로 가면 안 돼.’
현시점에서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이 가장 가능성이 큰 것도 맞다. 21군단 비자를 그대로 달고 왔으니 능력치 일부분이 너프된 상태일 테니까.
활동반경 역시 제한적이기 때문에 먹어볼 만한 떡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이점을 전부 상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정보가 부족했다.
애초에 기본적인 스펙도 부족하다. 로헨에서 대형 패밀리아라고 불리는 이들이 어느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우리 쪽에서 막 27군단 소환사태가 터졌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지 않았을까.
희라 누나가 각성하기 전, 정하얀이 워프 마법을 배우기 전, 김현성이 필살기를 배우기도 전이다.
저런 전력으로 노을빛의 마왕성에 입장하겠다는 것 자체가 개소리.
윌리엄은 쓸 만하기는 하지만 아직 애새끼에 불과하다.
다른 네임드들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우효열은 이제 막 입장한 상태였다.
김현성이 입장하자마자 27군단 소환사태를 만난 격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사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이 필요한 시점.
‘일단… 일단 하리젤로 가자.’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일단은 파티원들과 입을 맞춰봐야 했으니까.
곧바로 워프 게이트에 발을 디뎠지만 하리젤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메인스트림 때문인지, 대기자들이 꽉 차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의미 없게 몇 시간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하리젤로 향하는 게이트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야? 제길! 빨리 문 열어!”
“빨리 문 열라고! 제기랄!”
‘그런데 여기도 개판이자너.’
“좀 비켜!”
“아직 연락 온 거 없어? 거대 패밀리아 동향은?”
‘…….’
“하리젤에 있는 물자들 최대한 확보하랍니다.”
“뭐?”
‘이 시바 여기도 사재기하려나 보다. 이 새끼들.’
대형 패밀리아들이 자살특공대를 조직해 노을빛의 마왕성으로 쳐들어가든지 말든지 간에 전투식량이나 소모성 아이템들은 최대한 확보해 놓아야 한다.
“잡화점이고 시장이고, 노점상이고 텅텅 비었답니다. 선배.”
‘아 진짜….’
“제기랄… 위에 뭐라고 했어? 저 레벨 플레이어들이 가지고 있는 물자들도 확보한 거 맞아?”
“접촉하고는 있지만… 팔려고 하지 않습니다.”
‘니들이면 팔겠어?’
물론 대부분이 패닉바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시장도 바보가 아니라면 물자들을 쉽게 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격을 올릴 수 있는 만큼 올려서 조금씩 물량을 풀겠지. 뼈대가 튼튼한 대형 패밀리아들은 둘째 치고, 아마 중소형 패밀리아들은 이번 사태로 자금난을 겪을 것이 분명했다.
“오, 오, 오빠!”
“하얀 씨….”
인파를 헤치고 파티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정하얀.
갑작스레 안긴 그녀 때문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한쪽 구석에 정리되어 있는 보급품을 보고서는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먼 볼트 영감이 꼼꼼히 물자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반갑다.
‘믿고 있었다고요. 젠장.’
나이를 헛으로 먹은 것은 아니다. 레이먼 영감 덕분에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파티 하우스의 전경이 제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물자를 점검하고 있는 레이먼 볼트, 그리고 그 근처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정하얀의 두 보호자 남궁선과 임채령.
자신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들이었지만 나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할아버지.”
“그래. 볼일은 잘 보고 왔나? 음유시인을 데리고 온다고 한 것 같았는데… 조금 엉뚱한 사람들을 데리고 왔더구나.”
“네.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그보다 이 물자들은….”
“세상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아서… 일단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 구해왔지.”
“고, 고마워요. 할아버지.”
“허허.”
재롱 좀 부려드리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어요. 할부지.
“그런데요. 할아버지 혹시….”
“그 예의 없는 녀석이라면 위층에 있단다. 올라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위층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더구나. 손님들이 있는데도 말이야.”
영감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전에 본 적 있었던 하나가 시야에 비쳤다.
“어….”
“…….”
“노담혜 씨?”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그 녀석이 데리고 온다는 사람이 그녀였던 모양이야.”
‘역시 시바 내 눈은 틀리는 법이 없자너.’
얘도 1회차에서 뭔가 했을 줄 알았다니까.
“인사는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하는 게 좋겠네요. 저기 혹시 위층에 올라가 우효열 씨 좀 불러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제가요?”
‘그래 너.’
“부탁드려요.”
“제, 제가요?”
“부탁드립니다.”
“아… 네.”
영감이 분명히 손님들이라고 했었지?
노담혜 옆에도 세 명의 인형들이 보인다. 파티에 합류하기 위해 온 노담혜와는 다르게 저쪽은 진짜 손님들.
두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한 명은 꽤 낯이 익다. 아니, 낯이 익을 뿐이랴. 아카데미에서 수십 번도 넘게 마주쳤던 얼굴이었는데.
그래.
꽃과 풍요에서 온 녀석들이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이기영 님.”
“…….”
“…….”
“꽃과 풍요에서는 무슨 일로….”
“말씀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혹시 전하시려고 하는 내용이 이번 사태와 관련이 있나요?”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사실 지금 시작되고 있는 회의에 참석 의향을 여쭙고자….”
“아… 네. 일단은….”
위층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꺼져.”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어 보이는 우효열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