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35화
몰락한 왕의 묘지 (1)
“이기영 님….”
“…….”
“괜찮으십니까? 이기영 님?”
“…….”
내가 표정이 좀 안 좋기는 했나 봐.
너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너.
심지어 안절부절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 혜진이 생각하면서 입 좀 다물고 있었다는 게 윌근본의 여린 가슴을 움직인 모양.
조금 의아했던 것도 잠시, 조금 더 침묵을 지키며 녀석을 살피자 이 새끼가 어째서 이쪽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이 힘드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누구도 이기영 님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보잘것없는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
“모두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잿빛노을 지역에 붙들려 있는 생존자들을 두고 온다는 걸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수 있겠네.’
어둠 진화한 우리 혜지니 때문에 잠깐 혼란스러워 녀석이 이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다시금 침울한 표정을 장전한 것은 당연지사.
슬픈 눈동자와 아련한 표정을 짓고서는 윌리엄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이후에는 투명한 눈물을 곧바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들을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꽃과 풍요의 성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당당한 척, 강한 척하기는 했지만 천재군사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은 지구 생활의 때가 벗겨지지 않은 23살의 여린 이기영.
그들을 외면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윌리엄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해….’
이렇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게, 지킬 수 있다는 힘이 없다는 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너무나도 분할 수밖에 없었던 시점이었다.
무력감에 이를 악물게 되고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는 상황,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삼켜보지만 도저히 삼켜지지 않았다.
이미 이해하고 있는 일이었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것 정도야 초보자의 시련 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휘감는 좌절감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기영 님….”
녀석과 함께 온 에밀리아 역시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 겪을 수밖에 없는 성장통이었지만 시기가 너무 이르다 생각하는 것일까.
“괜찮아요. 에밀리아 님….”
물론 이 정도야 입술을 꽉 깨물고 이겨내는 것이 국룰이다.
“…….”
“이렇게 마냥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요.”
“힘드시다면…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굳이 이기영 님께서….”
“아니요. 저 역시 로헨의 일원이고… 꽃과 풍요의 일원이에요.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번 일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요. 게다가… 다른 분도 아니고 윌리엄 님께서 도움을 청하셨는걸요.”
곧바로 집중하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집중하는 거 좋아.’
우효 녀석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표정, 단어 하나라도 빠뜨릴까 걱정하는 것처럼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금은 일단 전력을 보전하고 성장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최소한 꽃과 풍요의 우방 패밀리아 만이라도….”
“예.”
“장기전이 될 거예요. 아니, 적들이 단기전을 원하더라도 우리는 장기전을 도모해야 해요. 지금 당장 원정대를 보낸다는 건 너무… 너무나 무모한 싸움이 될 거예요. 아마 저들은….”
“말릴 수 없을 겁니다.”
“어렵겠지만 부탁드려요.”
특히나 프랑스아즈라고 했나? 걔는 비웃지도 않더라구. 걔는 꼭 챙겨줘.
외신전을 대비해 아군 측의 전체적인 스펙을 올렸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도 한소라를 봉인해 정하얀의 각성을 촉발시키지 않았던가.
문제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 아닐까. 전체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네임드들이 몇몇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노을빛의 마왕성에 비하면 안타까운 수준이었다.
‘이쪽에서도 시간을 최대한 질질 끌 만한 컨텐츠를 마련해야 돼.’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메인스트림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위기에 집중하게 만든다면 어떨까.
그게 아니라면….
저쪽에서도 시간을 허비할 만한 컨텐츠를 마련하면 돼.
김현성은 내가 어느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최단루트로 잿빛노을 구역을 확장시키려고 할 가능성이 높으니….
이기영의 기억의 구슬 파편이 로헨 대륙 어딘가에 숨어 있다든가 하는 떡밥들을 최대한 뿌린다면… 몇 달 정도는 끌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윌리엄 님.”
“예.”
“…….”
“저… 이기영 님. 곧 던전 공략에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는 없으니까요. 저도… 최대한 로헨의 힘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죠.”
“그것이 이기영 님의 뜻이라면….”
아쉽기는 할 거야. 그냥 싸돌아다니지 말고 같이 원정 준비만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우리 애들 키워야 되기는 하니까.
단순한 레벨 업이라면 이렇게 공을 들이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회귀자는 알아서 성장하게 되어 있으니까.’
우효 녀석은 어차피 무럭무럭 자라는 게 예정되어 있다. 그게 빠르고 느리냐의 차이지.
중요한 것은 녀석과 유대감을 쌓는 것에 있다. 윌리엄이 아니라 우효열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우효열이 끝까지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김현성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녀석도 녀석 나름대로 성장기대치가 높기는 했지만, 가면의 영웅이 심혈을 기울여 수십 년간 키워온 김현성을 어떻게 이길 수가 있을까.
구태여 방법을 찾는다면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녀석과 커넥트 되는 수밖에 없다.
우효열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김현성의 패턴이나 습관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만큼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대감을 기반으로 발동되는 고유능력이니까.’
그게 지금 내가 녀석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유였다.
“…….”
“…….”
“…….”
“….”
“그래서 다녀온 회의는… 어땠지?”
“1차 원정대는 전멸했어요. 패밀리아 지하세계의 왕에서 2차 원정대를 비롯한 구조대를 꾸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 그들 역시 전멸할 가능성이 높아요.”
“꽃과 풍요는?”
“원정에 참가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참가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늦게 합류하게 되겠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현시점에서의 메인스트림은 독이 든 성배나 다름이 없어요. 구태여….”
“신경을 쓰지 말라고 말하는 건가?”
“아니요. 로헨의 정세에 관심을 가지는 건 중요해요. 당신이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눈앞에 있는 던전에 집중하자고 말씀드린 거예요.”
“…….”
“…….”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고작 3레벨의 던전이 아니었나?”
“첫 원정이니까요. 안전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싶거든요.”
‘근데 이 새끼랑 친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아무튼 간에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게 꽃과 풍요를 거절하고 이쪽에 합류한 이유였으니까.
조금은 긴장한 듯한 파티원들의 표정이 괜스레 눈에 들어온다.
레이먼 볼트 영감이나 하얀이, 우효열 같은 경우에는 별생각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남궁선과 임채령는 눈에 띄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임채령 같은 경우에는 던전에 가 본 적이 없었으니 더욱더 긴장되겠지.
심지어 노담혜 얘는 어째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지 않은가.
한 발자국 앞으로 옮기자.
[레벨3 던전 몰락한 왕의 묘지에 진입합니다.]
하는 익숙한 알림이 들려왔다.
몰락한 왕의 묘지라는 네이밍답게 기본적으로 지하 묘지의 형태를 하고 있는 던전, 애초 던전의 입구도 지하석실 같은 모양이었으니 예상할 수 있는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동굴에 있는 것처럼 울리는 목소리는 덤. 조용히 입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가 울리고 있는 탓에 파티원들이 쉽게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미 사전에 브리핑을 드렸지만 한 번 더 브리핑을 하는 게 좋겠네요.”
“…….”
“어려운 던전은 아니에요. 일단 파티원들의 합을 맞추는 게 먼저일 거라고 생각해서 비교적으로 레벨이 낮은 던전을 선택하게 됐어요.”
“…….”
“몰락한 왕의 묘지는 과거 로헨 대륙, 황금문명이라 불렸던 시기에 만들어진 던전이에요. 실제로 앞서 이 던전에 진입한 적이 있었던 이들은 수 명의 고고학자들을 비롯한 원주민 모험가 파티였고요. 드물게도 수십 번을 넘게 드나든 던전이었고…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었죠. 아마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었다고 판단한 거겠죠.”
“…….”
“아직 플레이어가 나타나기도 전의 이야기지만, 이 장소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는 고작 세 명이었어요. 몰락한 왕의 묘지는 그들의 경험을 적어놓은 수필, 당시 고고학자들의 연구일지, 몰락한 왕이라고 불렸던 이에 대한 역사서에 기초하고 있죠.”
“…….”
“재미있는 것은 생존자들이 가장 주의할 점에 대해 이리 서술했더라고요.”
“…….”
“‘몰락한 왕을 깨우지 말 것’이라고 말이에요.”
“…….”
“일종의 기믹이죠. 몰락한 왕의 묘지의 목적은 몰락한 왕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에요. 왕의 보물이 들어있는 석실에 들어가 보물을 얻는 것만으로도 던전은 클리어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을 거예요. 먼 과거에 이곳을 연구하던 고고학자들은 던전을 안정화시켰다고 생각했지만….”
남궁선이 중얼거렸다.
“몰락한 왕을 깨워 버리고 말았군요.”
“예.”
“이렇게요.”
“네?”
-페 게레이나 투토 라 게레피타 아타에.
짧은 주문을 외운 직후.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하지만 파티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잠깐 멈칫한 이후에는 다시.
쿵! 쿵! 쿵! 쿵!
어디에선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한다.
쿵! 쿵! 쿵! 쿵! 쿵!
키에에에에엑! 하는 울부짖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당장 앞을 식별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멍청이는 없다.
‘신나게 뛰어오고 있자너.’
“아… 어?!”
겁먹은 얼굴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임채령. 아직도 무슨 일인지 감을 못 잡은 노담혜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방패를 툭툭 두드리는 레이먼 볼트 영감이 한숨을 크게 내쉬며 몸을 일으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침내 네 발로 뛰어오는 인간형의 언데드들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
정하얀이 주문을 외웠고.
녀석들이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을 느리게 만든 것처럼 녀석들 모두가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본적인 방진부터 설명해 드리는 게 좋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