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38화
몰락한 왕의 묘지 (4)
당연하지만 황급하게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였으니까.
이기영에게 허락된 시간이 2년에서 3년 정도라는 것은 우효열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옳다는 것은 아니었다.
꽃기영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무기로 사용했다.
우효열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밝힌 것은 녀석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도,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편의를 노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짐이었기도 했고, 일종의 계약이기도 했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겠다고, 절대로 허투루 시간을 쓰지 않겠다는 엄포이자 의지의 표현이었다.
우효 녀석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꽃기영은 홀로 간직하고 있던 비밀을 내뱉는 것으로 녀석과 계약 아닌 계약을 했다고 판단했다.
제한된 시간이라는 것을 무기로 녀석과의 협상을 매듭지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꽃기영은 시한부라는 사실은 약점이 아닌 강점이었으니까.
‘시간 관계상 조금 더 줄여야 돼.’
본래는 2년에서 3년 정도였지만 김현성의 등장으로 인해 약 1년 반 개월 남짓으로 설정이 변경됐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짧을 수도 있다.
대외적으로는 몸을 혹사시킨 것이 수명이 줄어든 원인이었지만 꽃기영은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남아 있는 하루하루를 전력으로 부딪치고 싶어 한다는 비사가 숨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침을 멈추고는 다시 우효 녀석을 바라본다.
타오르는 불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새끼의 눈이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다른 반응을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힐끔 혈흔이 묻어 있는 손바닥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 혹시라도 본인이 이쪽을 걱정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싫은 모양인지 곧바로 시선을 돌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
“네?”
“…….”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싱겁기는 시바.’
“그것보다 아까는 뭐라고 말씀하셨죠?”
“…….”
“파티는 어땠는지 제가 물어봤던 것 같던데. 대답해 주신 거 아니었나요?”
“…….”
녀석은 조용히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나쁜 것 같지는 않다고 이야기했다.”
“네?”
“파티에 대해 말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아. 네… 그랬었죠.”
“만족스럽다는 말은 아니다. 가능성이 보인다고 말하는 게 맞겠군. 물론 그 천둥벌거숭이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 것치고는 제법 열심히 훈련을 봐주시고 계신 것 같던데….”
“앵무새마냥 쫑알쫑알거리는 게 귀찮았을 뿐이야. 정확히 말하면 훈련을 봐주고 있다고도 볼 수 없지. 얻어가는 건 그 멍청이의 몫이니까.”
“하지만….”
“무슨 말이 듣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내 솔직한 감상이다. 기본기가 안 되어 있는 놈들도 많지만 네가 어떤 팀을 꾸리고 싶어 하는지는 이해가 가더군, 물론 착각하지 마라. 계속해서 이 파티를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마음에 들잖아.’
다른 요소들을 전부 배제하고 효율만 보더라도 파티 플레이가 솔로 플레이보다 효율이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녀석이 1회차 때 어떠한 경위로 실패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분명 녀석의 고집이었다.
그 김현성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구태여 녀석이 파란 길드원들을 부관 삼아 로헨에 강림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새롭게 다가왔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만큼 편했잖아요.’
“그렇게 느껴주신다니 다행이네요. 적어도 방해는 하지 않은 것 같아서….”
“겸손 떨 필요 없다.”
“네?”
“인정하기는 싫지만 네놈은 유능하니까.”
“…….”
“천재라고 불리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야.”
‘얘가 갑자기 얼굴에 금칠을 해주자너.’
녀석이 의외의 대사를 쳐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얼마나 남았지?”
이미 입 밖으로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짝 후회하는 것 같은 분위기, 구태여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을 물어본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아마.”
“웃기는군.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
“…….”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말하지.”
“네?”
“네놈이 당장 내일 뒈지든, 내일모레 뒈지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네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다. 적어도… 전에는 그랬지. 하지만 이렇게 한배를 탄 이상, 네놈이 멋대로 죽어버리는 건 곤란해.”
‘너….’
“게니우스 놈들이 네게 무슨 계약을 들이민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네 같잖은 설득 때문에 많은 계획을 수정했다.”
“그건 죄송하지만….”
“뒈지더라도… 네놈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끝마치고 죽으란 이야기다.”
‘이 새끼 진짜 싸가지 없이 말하자너.’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 위로처럼 들릴 수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머릿속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꽃기영은 녀석의 투정을 위로라고 해석했다.
그렇게 간단히 죽어버리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면 기분 탓일까.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제가 할 일은 전부 끝마칠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죠.”
“흥.”
“당신이야말로 꼴사나운 모습 보이지 마세요. 당신이 놀라 자빠질 정도로 좋은 길을 제시해 줄 테니까요.”
말 속에 뼈가 있다. 아주 약간의 라이벌 의식, 그리고 동질감.
기분이 나쁘다는 듯 툭툭 쏘아 대기는 했지만 어느새 꽃기영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그려진다.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의 마음의 문이 아주 약간 열린 것 같은 느낌.
내가 생각해도 시기가 너무 빠른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효 새끼와 꽃기영은 서로를 인정하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제발… 너도 입꼬리 살짝 올리고 있을 거지?’
“두고 보라고요.”
‘너도 왠지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지? 아름다운 라이벌 같은 느낌이었잖아. 우리 방금 살짝 서로를 인정하는 스탠스로 들어선 거 아니었어? 나만 느끼고 있었던 거 아니지?’
“흥.”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본 우효 새끼의 얼굴, 새벽 감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효열의 입꼬리 역시 조금은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거야. 우효야.’
“두고 보겠다.”
유대감 작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궤도에 들어섰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이래서 개인 면담이 중요해.’
뭔가 리프레쉬 된 것 같고, 새로운 목표의식이 생긴 것 같잖아.
이쪽뿐만이 아니라 우효 녀석까지 부지런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원래부터 부지런한 편에 속하기는 했지만 이 의미 없는 던전 행에 조금 의욕적으로 변한 듯한 느낌.
물론 녀석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별다른 변화처럼 보이지 않았겠지만 이쪽은 확실히 체감할 수 있는 변화였다.
이후 원정 진행에서 조금씩 말을 덧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넌 네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천둥벌거숭이. 네 역할은 몬스터를 정면에서 붙들고 있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후우….”
“아, 뭐예요! 정확히 설명해야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죠.”
사냥이나 훈련 도중 임채령에게 말을 건네거나.
“몰락한 왕의 묘지는 고작 3레벨의 던전이다. 언데드들이 황금문명시절의 무구들을 장비하고 있다고 해도, 고작 레벨3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
“쓰레기 같군.”
당연히 침묵하는 시간이 더 길다. 평소처럼 기본적인 원정 진행은 여전히 이쪽이 하고 있었지만 가끔 우효열이 튀어나와 한마디씩 건네는 빈도가 무척 많아졌다.
새로운 방진을 시험해 볼 때도 제법 적극적이었던 것 같고… 파티원들의 장비에 관해 입을 열 때는 이쪽도 조금 놀랐을 정도였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너무 빈약해.”
“또 잔소리하게요?”
“무장이 너무 빈약하다 이 말이다. 도둑 직군이라고 해서 방패를 가지지 말라는 법은 없어. 특히나 너처럼 애매한 수준일수록 작은 소형 방패라도 착용해 보는 게 좋을 거다. 거기 너, 사제도 마찬가지다.”
“네?”
“남궁뭐시기. 그래. 너도 방패를 장비해 보는 걸 고려하는 게 좋을 거다. 저 마법사는 상관없다만, 네 주문 시전 속도는 너무 느려, 아마 레벨4 던전만 들어가도 제대로 주문을 욀 수도 없을 거다. 실수하면 죽는 건 너야.”
“…….”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 놓는 게 좋아.”
“조언… 감사드립니다.”
“답답해서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을 뿐이다.”
의도야 어찌 됐든 우효 녀석 역시 이 파티를 파티다운 파티로 만드는 데 관심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으윽… 부파티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실제로 후위들도 기본적인 장비를 맞추는 게 유행하고 있는 추세라고 들었거든요. 임채령 님이야 전위로 뛰는 만큼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이후에 레벨이 쌓인다면 없어도 극복할 여지가 있겠지만 있으면 무조건 한 번은 도움이 될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도둑이 방패라니… 으으….”
“시작은 손바닥만 한 소형 방패로 충분할 거예요.”
“그 정도라면….”
“시험은 다음 석실에 들어가서 해보는 게 어떤가요? 우효열 씨는 참가하지 않는 걸로 하고요.”
“에엑. 다음에는 첫 번째 보, 보스방 아니었어요?”
“고작 레벨3 던전이라 이야기했다. 천둥벌거숭이. 던전 마스터도 아니고 고작 던전의 잡네임드를 상대로 겁을 먹는다면….”
“겁을 먹기는 누가 먹었다는 거예요? 저는 그냥… 저는 레벨2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어서.”
“파티의 전위가 누구인지 잊은 건가?”
우효열이 내뱉은 말에 임채령이 조용히 레이먼 볼트 영감을 바라본다.
레벨4 전사.
생사의 위기를 몇 번이나 헤쳐온 베테랑.
비록 나이가 들어 일선에서 밀려났다고 한들, 그 경험과 레벨4라는 타이틀이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거대한 체격, 수십 년간의 근력 운동으로 다져진 몸. 무거운 중갑과 거대한 석궁, 그것보다 더 커다란 방패에 보조 무장까지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이 없다. 마치 평범한 옷이라도 걸친 것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아마 몇 번의 사냥이 끝난 현시점에 우효열 역시 깨달았을 것이다.
레이먼 볼트를 단순히 파티의 연장자로서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알아볼 수 있다.
‘베테랑 중에서도 제법 괜찮은 베테랑.’
크기가 조금 작지만 어느 한 곳 모난 점이 없는 육각형 탱커. 특히나 전술 이해도가 높다는 것은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일 만한 부분이었다.
“부탁드려요. 할아버지.”
“허허허.”
“…….”
“허허… 그럼… 오랜만에 힘 좀 써보도록 할까.”
[던전, 몰락한 왕의 묘지의 첫 번째 보스. 왕의 기사 하텔 헤리히 와 조우합니다.]
시작은 커다란 석궁, 마치 투창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화살이 왕의 기사에게 쏘아졌고,
콰직 소리와 함께 화살이 적의 견갑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