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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39화 (1,13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39화

몰락한 왕의 묘지 (5)

‘올드스쿨이기는 하네.’

다른 말로 하면 조금 촌스럽다. 당장 옆 동네 스미스 대령만 하더라도 손가락으로 마력총탄을 쏘아대는 판국에… 거대한 석궁 한 발을 쏘고 다시 한 발을 장전하는 모습은 너무 클래식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 로헨의 공학기술을 접목하거나 이곳에 자리 잡은 생산직 플레이어들의 손을 탔다면 조금 더 스타일리쉬해 보였겠지만 영감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

물론 레이먼 볼트 영감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여러 가지 기술들이 들어간다면 그만큼 잔 고장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정작 쓰고 싶을 때 사용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조금 귀찮아도 제대로 쓰는 게 맞다고 판단했겠지.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마력을 넣기도 편했겠고.’

조금 바꿔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굳이 다른 방식을 고집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묘지의 첫 번째 네임드 왕의 기사 어쩌구는 저레벨 던전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언데드 기사. 묵빛 갑옷을 입고 거대한 대검을 하나 들고 있는 녀석이었다.

2파티의 데뷔전으로는 꽤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대이기는 했지만, 애초 예상한 것보다 레이먼 볼트 할아버지가 재미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커덕.

피융!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력을 담은 거대한 단창이 석궁에서 쏘아지는 중.

화살촉 부분에만 마력을 담는 것을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 보였다.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적으니,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해 최대한의 효과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치명상을 입히기에는 무리가 있는 견제였지만, 첫 번째 보스의 움직임을 불편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공격이었다.

“어….”

“방심하지 말고… 한번 움직여 보자꾸나.”

“아… 네. 할아버지.”

노담혜야 깍두기 롤을 맡고 있으니 사실상 남궁채령 듀오와 볼트 영감 셋이서 공략해야 하는 네임드.

임채령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곧 안정을 찾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앞에 있는 할아버지가 너무나 침착하게 자신을 이끌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휘둘러오는 검을 침착하게 막는 방패. 가지고 있는 보조 무기 중에 선택한 것은 메이스였다.

한 손 검을 들어봤자 녀석의 갑주를 벨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구태여 많은 무기를 들고 다닐 필요가 있냐고 생각한 내 입장에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만든 선택.

갑옷 채로 썰어버리는 놈들을 하도 많이 봐왔지만 모든 모험가들이 같은 기예를 선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침착하네.’

처음 몰이사냥을 할 때도 느꼈지만 마치 교본과도 같은 방어술이다.

오죽했으면 박덕구에게 튜터로 붙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까.

‘돼지 새끼가 좀 보고 배워야 돼. 그 새끼는 그저 몸만 튼튼해가지고.’

최소한의 힘과 내구, 마력으로 최대의 효율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우리 돼지와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

오랜 경험 때문에 몸에 녹아든 움직임뿐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며 탱킹을 하고 있다는 느낌.

옆에 있는 임채령이 움직이게 편하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모습은 감탄이 다 나올 정도였다.

물론 박덕구 역시 나쁘지는 않다. 실제로 김예리와의 합격술은 이미 수준급에 들어선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파트너가 김예리가 아니었어도 녀석이 수준급에 들어선 합격술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강하기야 돼지가 더 강하겠지만….’

레이먼 볼트 영감은 베테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보 도둑을 군더더기 없이 이끌어 주고 있자니, 임채령 입장에서도 신이 나는 모양. 조금씩 조금씩 단검을 놀리며 언데드 기사를 귀찮게 만들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몰락한 왕을… 몰락한….

언데드 기사가 땅바닥에 검을 내리꽂은 것은 바로 그때.

“패턴이 뒤바뀐 모양이구만.”

관성으로 인해 몸이 튀어 나가는 걸 멈출 수 없었던 임채령의 뒷덜미를 잡은 이후에 자신의 뒤로 숨기는 볼트 영감, 남궁선은 기다렸다는 듯이 주문을 외운다.

콰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검에서 뿜어져 나간 기운이 남궁선의 보호막에 부딪혔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린 이후에는 신성한 가호는 산산조각이 나버렸지만 이후 쇄도한 기운은 저 세 명에게 위협을 끼칠 정도로 위험하지 않았다.

볼트 영감도 같은 판단을 했는지 방패와 몸으로 검은 파동을 가로막았다.

“할아버지!”

“걱정할 필요 없단다.”

“아….”

-몰락한 왕을… 위해… 그를….

“신성한 무기!”

이윽고 영감의 메이스에 반짝이는 신성마법이 깃든다. 그동안의 찜질로 인해 박살이 나기 일보 직전이었던 언데드 기사의 투구에 빛나는 메이스가 틀어박혔다.

콰앙!

“좋았어요!”

“…….”

갑주가 부서지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다시 메이스를 한 손 검으로 스왑해 놈의 머리를 날리며 마무리.

-그를… 구해다오….

언데드 기사의 중얼거림과 함께 임채령이 남궁선의 손을 잡은 채로 방방 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가 해냈어! 언니!”

‘정작 너는 별로 한 게 없기는 하지만.’

“할아버지. 할아버지 진짜로 세네요. 레벨4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셀 줄은 몰랐는데. 진짜….”

“허허허. 강한 건 아니지.”

“네? 무슨 소리예요? 할아버지가 다 한 것 같은데. 완전 상대도 안 됐잖아요. 저 언데드 기사는.”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이겨낼 수 없었을 거란다. 저 기사의 검은 파동을 막아낸 건, 선이고… 그를 끊임없이 견제한 건 채령이 네가 아니냐. 내 근력과 마력만으로는 아마 저 기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는 힘들었을 게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입을 연 것은 멀리서 그녀를 구경하고 있었던 우효열 이었다.

“그게 경험이라는 거지. 저 영감은 진짜 전사다. 천둥벌거숭이, 너와는 다르게 말이다. 제한적인 자원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거라는 걸 배웠으면 좋겠군. 레벨이 낮다, 스탯이 낮다는 변명이 되지 않아.”

“…….”

“주어진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전투가 시작되면 너 역시 네가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물론 저 정도의 경험을 단기간에 쌓는다는 건 쉽지 않겠지만 어떤 수단이 됐든 간에 숨겨진 한 수 정도는 만들어 놔야 해. 그게 네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그, 그럼 더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방법이야 많지. 게니우스의 선택을 받아 직업을 바꾸든가, 장비를 바꾸든가, 아니면… 죽을 만큼 노력하든가. 질문 자체가 당황스럽군… 하나하나 떠먹여 줘야 받아먹을 수 있나?”

“그건 아니지만….”

“너는 이미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있어. 어떻게 해야 쓸모 있어질 수 있는 것 정도는 스스로 생각해라.”

말이 길어졌지만 녀석의 조언은 이걸로 끝. 다시 관심 없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임채령도 무언가를 느낀 모양인지 조금은 조급한 표정으로 변한 것 같다.

이제 막 던전에 들어온 초보자에게 말한 것치고는 워딩이 센 것은 아닌가 싶어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볼트 영감이 입을 열어온 것.

“강해지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말이다.”

“네? 할아버지….”

“…….”

“…….”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꺾이지 않는 거란다.”

“…….”

“…….”

“아!”

‘너무 따뜻하잖아요. 할부지.’

“…….”

“고…마워요. 할아버지.”

뭔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우효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딱히 다른 말을 내뱉어 오지는 않았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우효야. 너도 좀 귀담아들어. 영감님이 좋은 말씀 해주시자너.’

정신력이라는 것은 스탯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마음가짐에 따라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승리를 쟁취하기도 하고, 기존 스탯 이상의 힘을 내기도 한다.

‘괜히 파티원들 멘탈 케어가 중요한 게 아니자너.’

가장 까다로운 던전도 정신계열의 몬스터들이 상주하는 던전이고 말이야.

우리 대륙 전설 등급 모험가나 영웅 등급 모험가들이 미끄러지는 경우를 살펴보면 정신계열의 보스가 던전 마스터로 자리 잡은 것이 대부분이다.

율리에나가 보스 몬스터로 있었던 저주받은 신단이 위와 비슷한 경우였었다.

그에 비하면 몰락한 왕의 묘지는 너무 편하지.

기믹이 있기는 했지만 파티원들의 수준이 높다면 크게 위협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 기믹을 대처할 만한 공략법도 존재한다. 3레벨, 희귀 등급 수준의 던전의 난이도는 보통 이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방금 저 언데드 기사가 하는 말을 들으신 분 있나요? 분명 몰락한 왕의….”

“아마 던전을 완전 공략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해 준 걸 거예요.”

“역시 이기영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셨군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어? 너무 뻔하잖아.’

“몰락한 왕의 묘지는 이름 그대로 몰락한 왕을 위한 장소였으니까요.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몰락한 왕을 섬기던 이들로 구성되어 있을 거예요. 방금 쓰러뜨렸던 네임드 역시 몰락한 왕을 모시던 기사였고요.”

“아.”

“어떠한 경로로 이 장소가 던전화가 진행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주가 걸렸다거나, 원념이 형상화되어 있다거나 하는 경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탁한 마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원념이 서려 있지는 않거든요. 몬스터들 역시 극단적인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요.”

“그렇군요.”

“이들은 몰락한 왕을 위해서 다시 일어난 이들이고… 아마 다시 잠들고 싶어 할 거예요. 몰락한 왕을 구해달라는 말 역시, 그가 다시 영면에 들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한 걸 테죠. 던전의 클리어 조건이 여기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나요.”

‘이런 저레벨 던전 디자인이야 뻔하거든.’

율리에나처럼 던전 마스터 본인이 미치광이라면 입구에서부터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경우가 많다.

계속해서 환각과 환청이 들려오고, 베이스가 되는 잡몹들도 지랄 같은 소리를 지껄여 온다.

사제의 정화주문으로도 제대로 정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걸 떠올려 보면 몰락한 왕의 묘지는 무난하다 못해 평화로운 수준이었다.

당연히 난이도가 높지 않은 만큼 던전 곳곳에는 힌트가 숨겨져 있다.

“오, 오,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여, 여기… 적혀 있어요. 저기 무구 보관함에 같이 있었어요. 왕의기사 하텔 헤리히의 수필이요.”

‘이런 식으로.’

“뭐라고 적혀 있었나요? 정하얀 님.”

“몰락한 왕이 묘지에 묻히고 나서…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여기에서 생활했었데요. 갇, 갇힌 건 아닌 것 같고… 자발적으로 이곳에서 생활한 것 같아요. 지상도 왔다 갔다 한 것 같고… 또….”

“…….”

“그가 얼마나 위대한 군주였는지에 대해 써, 써 있어요.”

존경심이 묻어나오는 글일 것 같자너.

아마 그것 말고도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많을 것이다.

벽면에 쓰여 있는 문양이나, 벽화.

풍화되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준 높은 언어학자나 암호해독가들과 함께 있다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보통 던전 탐험을 전문적으로 하는 마법사들은 고고학에도 손을 대기도 하니… 다른 방식으로 공략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별명과는 다르게… 많은 이들이 그를 진심으로 따랐었군요.”

“네. 그러니 지금부터 저희는 그들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이곳에 있는 거예요.”

“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남궁선의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몰락한 왕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로헨의 후손들이 찾아왔노라.”

“지금….”

“들어라, 몰락한 왕의 충성스러운 벗이자 신하들이여. 로헨의 후손이 묘지에 당도했노라. 그의 더럽혀진 명예를 씻기기 위해 로헨의 후손이 이 자리에 왔노라.”

-길을….

“어?”

-길을… 열어라.

“…….”

-길을 열어… 로헨의 후손들을 맞이하라.

“…….”

-몰락한 왕을 위해. 로헨의 후손들이… 드디어… 왕의 묘지를 찾아왔노라.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파티원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별로 황당하지도 않아.’

보통 던전들은 우회공략 루트가 있었으니까. 아마 노을빛의 마왕성도 우회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부터 알아내야 돼.’

-로헨의 후손들이… 드디어… 왕의 묘지에 발을 디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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