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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40화 (1,13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40화

몰락한 왕의 묘지 (6)

쿵! 쿵! 쿵!

오랜 시간 동안 켜지지 않았던 횃불이 몰락한 왕의 묘지의 불을 밝히자 로헨의 후손들을 향해 창을 치켜드는 언데드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벽면 곳곳에서 타오르고 있는 푸른색 빛이 언데드들을 비추는 모습은 조금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들의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안광은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이쪽을 존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겁의 시간 동안 예언의 사제를 기다려온 바하무트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들 역시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 오랜 기다림을 대변하는 것처럼 왕의 수하들의 모습 곳곳에는 공손함이 깃들어 있었다.

-로헨의 후손들을….

“…….”

-로오헨의 후손들을 위해 길을… 열어라.

“…….”

-로헨의 후손들이 찾아왔노라.

심지어 이쪽을 마중 나오고 있는 네임드 몬스터들의 모습은 가관.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는 언데드는 통칭 국정마법사 체인버닝. 몰락한 왕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와 함께 묻히길 원했다는 몰락한 여왕 페렐 디자이어.

그 외에도 던전의 주요 네임드 몬스터들 역시 로헨의 후손들을 위해 도열하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부파티장님….”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에요. 이기영 님. 제가 오랜 시간 동안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건,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가요? 이게 도대체….”

‘그래. 이런 걸 어디서 봤겠어.’

놀랍게도 로헨에도 던전 로그나 모험일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미개한 놈들도 기록이라는 걸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 얼마나 놀랐던가.

물론 우리 쪽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제도적으로 기록실을 만들고 일부를 제외한 모든 모험일지를 공개 전시해 많은 모험가들이 읽기를 장려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놈들은 모험일지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편이었다.

시중에 풀린 일지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록 방식 또한 미개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상황이 이랬으니 발전이 있을 리 만무, 로헨 놈들은 던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던전은 사냥터가 아니에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예요. 베이스가 되는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길을 뚫고, 네임드 개체와 마주하고,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거죠.”

남궁채령 듀오와 레이먼 볼트 영감까지 이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우효열 역시 관심 없는 척 언데드들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있지 않을까.

“보통 던전은 서사가 깃들어 있는 장소에 생성되는 경우가 많아요. 로헨 대륙의 역사나, 신화, 혹은 그 이전 문명의 이야기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전설 같은 것들이요. 물론 이 몰락한 왕의 묘지도 마찬가지고요. 황금문명의 몰락한 왕의 이야기는 로헨에 실재하고 있었던 역사였으니까요.”

‘제작자 입장에서는 원가 절감을 해야 되니까.’

굳이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를 이용해 던전을 만드는 것보다 기존에 있던 것들을 써먹는 게 훨 싸게 먹히자너.

“…….”

“던전을 공략한다는 의미는 위에 말씀드린 이야기에 얽혀 있는 문제는 푸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엄밀히 따지면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것도 문제를 풀이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게 올바른 풀이 방법이라고 볼 수는 없겠죠.”

“그… 그랬군요.”

“물론 모든 던전이 새로운 공략방식이 있다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몰락한 왕의 묘지는 마무리할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상상하지도 못했었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제 눈을 믿을 수가 없군요.”

‘그래. 제작자의 관점에서 보는 거랑 플레이어 관점에서 보는 거랑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어.’

던전 공략 전문가들이나, 던전 공략 지원팀 같은 것들을 두지 않는 얘네들의 입장에서는 패턴이나 기믹을 분석하고, 몬스터의 종류와 네임드 개체의 숫자 정도를 정리하는 것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 파티들은 던전 안에 숨겨져 있는 히든 아이템 따위를 보스한테 집어 던지면서 나아갔겠지만….

아무리 유능한 파티라고 한들, 어른의 사정이 얽혀 있는 제작자와는 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레벨 5 이상의 던전이었으면 이 정도로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을 거야.’

몬스터들도 다양해졌겠고, 네임드 개체들의 자아를 조금 신경 써줬겠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네임드들의 기억이 풍화되어 높은 등급 판정을 받는 게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두더지 성녀처럼 대륙의 주요 서사도 아닌 모양이고… 투자할 가치가 없는 서사라는 거겠지.

“그럼 지금 일어나고 있는 메인스트림도… 기존 로헨 대륙에 있었던 서사들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시바.’

“아마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특히 메인스트림으로 지정될 정도의 던전이라면… 로헨 대륙을 관통하고 있는 커다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어쩌면 고서에 적혀져 있지 않은 전설일 가능성도 높겠죠.”

“조금 새로운 관점에 대한 이야기 로군요. 던전이 문제를 푸는 장소라니… 생각해 보니 비슷한 내용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심지어 일각에서는 언어학자, 마도공학자, 고고학자 같은 이들의 원정을 장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발전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는 했었던 모양이네.’

당연히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느니, 생존성이니 스펙이니 하는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레이먼 볼트 영감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사이, 이쪽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임채령이 우효열에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진짜 놀랍지 않아요? 부파티장님. 엄청 똑똑한 것 같은데.”

“저 정도도 하지 못하면 같이 다니는 의미가 없겠지.”

“말 좀 예쁘게 해줘요. 참. 진짜 성격 이상하다니까.”

“흥. 너만 할까. 남에게 감탄할 시간에 본인 실력이나 신경 쓰는 게 좋을 거다.”

“으윽… 진짜… 두고 봐요.”

“언젠가는 한 방 먹이겠다고? 그 말을 하려고 했나?”

“얄미워 진짜.”

“흥.”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파티는 계속해서 묘지를 거니는 중.

아까까지만 해도 이쪽을 죽일 것처럼 달려드는 이들이 무릎을 꿇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몰락한 왕을….

-모올…락한… 왕을….

-왕을… 위하여….

점점 더 몰락한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좁았던 길을 지나오자 꽤나 넓은 지역이 눈에 보인다.

굳건히 닫혀 있는 문을 중심으로 화려한 문양과 세월에 풍화된 깃발들이 시야에 비쳐온다.

저 문 너머에 몰락한 왕이 있다.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덩치를 지닌 경비병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깜짝 놀란 파티원들이 어떻게 하냐는 듯이 내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중, 해야 할 일이야 뻔했다.

“할아버지.”

“크… 흠.”

레이먼 볼트 영감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언데드들에게 무기를 건네기 시작했다.

다들 불안한 얼굴들.

“이, 이거 정말 줘도 되는 거예요?”

“저들의 왕을 만나러 가는 일이에요.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겠죠?”

“불… 불안한데….”

‘사람들 참….’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덩치 큰 언데드들이 무기를 회수하고 나서야 닫혀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왕을… 뵙습니다.

-왕을 뵙습니다.

-왕을….

눈에 들어온 광경은 커다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역겨운 언데드였다.

기본적으로 해골바가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흐릿한 형체의 투명하고 푸른 빛이 그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레이먼 볼트 영감과 같은 연배로 보이는 할배. 위로 삐죽 튀어나온 긴 왕관을 쓰고 있었고, 눈에 띄는 무장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저 유령 할배의 겉모습보다 눈에 띄는 것은 몰락한 왕의 석실에 준비되어 있는 보상들이었다.

‘저거 다 주려나.’

“몰락한 왕을 뵙습니다.”

“몰, 몰락한… 왕을 뵈어요.”

우효 녀석은 왕이고 나발이고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있다.

혹시나 불경하다 개지랄을 떨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몰락한 왕의 원념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수 있도록 세팅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NPC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건 또 아닌 모양, 제법 유려하게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낮고, 음산한 목소리.

-지… 지이임… 짐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느냐….

“…….”

-짐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느…냐….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몰락한 왕이시여. 그 찬란했던 황금문명도, 몰락한 왕을 비롯한 여덟 명의 왕에 대한 기억도… 현재의 로헨에서는 잊혀진 역사입니다.”

-모든 것이… 부질없구나….

“…….”

-황금문명을 지키고자 했던 짐도… 짐을…배신한 여덟 왕의 대한 복수심도… 모든 것이… 부질… 없구나…

“…….”

-짐은… 지쳤다. 번뇌와 원념에 대한 허무에… 이 모든 것들이 의미 없게 느껴지는구나….

“…….”

-지금은 그저… 그저 이 못난 왕을 믿어주는 충성스러운 벗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심어주고 싶을 뿐이다. 내 신하들이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여… 짐은… 짐은 그대들을 환영하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진실을… 알리라… 부탁하지 않겠다. 무엇이… 진실인지… 짐조차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으니… 역사가 짐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후손들에게 주어진 일이다. 과거의 망령은… 과거의 망령일 뿐이니….

“…….”

-로헨의 후손들이 승자의 역사만을 기억하지 않도록… 짐과… 짐의 벗들의… 수기를 세상 밖으로 가지고 가겠다. 약조하거라.

“제 모든 것을 걸고 약조 드리겠나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

-이제는 눈을 감고 싶구나.

천천히 의자 위에서 허물어지는 몰락한 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원념들도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아마 바깥에 있는 이들 역시 같은 현상을 겪고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죽음을 기다려온 왕과 그의 수하들이 바라고 바라왔던 마지막이었다.

당연히 꽃기영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마주한다. 이미 죽어 생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들이었지만, 이들의 마지막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빛 타이밍이야.’

허락된 것은 이들이 가는 길을 위로하는 것 하나. 그냥 빛 뿜어주기.

누가 보기에도 신성력으로 이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비칠 것이다.

헛된 원념 때문에 현세를 떠돌아다니는 이들을 위한 마지막 위로.

한 걸음을 옮기자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길을 비키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우효 새끼마저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왕의 뼈다귀만 남은 발등을 이마에 대고 조용한 죽음을 애도한다.

“…….”

꽃과 풍요의 신도들이 길 잃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찬란한 빛이 몰락한 왕의 석실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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