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41화
몰락한 왕의 묘지 (7)
‘영감탱이 넋두리 들어주느라 몇 시간은 쓸 줄 알았는데.’
일찍 퇴근해서 기분 좋자너.
‘빨리 들어가서 커피 한잔하면서 쉬면 딱인데.’
몰락한 왕이 투머치 토커였다면 아마 꽤 괴로운 시간이 되었으리라.
우리 대륙이었다면 꽤 관심 있게 이야기를 들어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로헨의 황금문명이고 나발이고 이쪽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
남궁선이 그나마 귀를 기울이며 저들이 적어놓은 수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런 그녀 역시 현재는 찬란한 빛을 목도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와아아아….”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다 입을 막은 임채령. 아마 꽃기영의 표정을 본 것이 틀림없으리라.
던전을 공략한 환희, 단순히 아름다운 광경을 목도했다는 기쁨 때문에 내지른 탄성이었겠지만 23살의 여린 꽃기영이 죽음을 대하는 표정을 본 순간 그런 감정을 표출할 수 없었으리라.
“…….”
물론 정하얀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오, 오빠… 오, 오빠가 꽃… 꽃이 됐어.”
울 하얀이 꽃기영 폼을 본 건 처음이지?
“오, 오빠 몸에서 빛나는 꽃이… 나… 나, 나와. 소, 소라야. 이것 좀….”
‘소라 없는데….’
“오, 오, 오빠… 오, 오빠가 꽃이 됐어.”
빛으로 이루어진 화관을 쓴 채로 저주받은 이들의 마지막을 위하고 있는 모습.
손끝에서 퍼져 나온 빛은 어둠을 정화하는 것으로 모자라 묘지 곳곳에 빛의 꽃을 피운다.
빛의 꽃봉우리가 활짝 열리며 사라지는 모습은 내가 봐도 아름답다.
눈이 머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뿜어져 나온 빛은 오히려 편안하게 파티원들을 품에 안는다.
“따뜻해….”
‘아마 언데드 놈들도 따뜻하다고 느끼고 있을 거야.’
물론 신성력이 언데드들에게 상극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지옥불에 타는 고통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원념도 사라져가는 마당에 긍정적인 효과를 받고 있지 않을까.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광경에 저마다의 감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저… 드디어 깨달았어요.”
‘뭘 알아? 담혜야.’
“제가 이 파티에 들어온 이유… 요.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운명의 이끌림이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런 게 어디 있어?’
“…….”
“지금 이런 광경을 전하기 위해서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아요.”
‘그거 아니야. 너도 전투원이야. 너도 각성해야 돼.’
“이런 이야기들을 남기기 위해서… 그게 음유시인인 제게 주어진 역할인 것 같아요.”
노담혜가 갑작스레 음악을 켜기 시작한다.
‘아니 갑자기 왜 그래. 왜 급발진해.’
굳이 브금까지 필요한가 싶을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깔려오는 비지엠이 부담스럽다.
즉석에서 몰락한 왕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는데… 곧바로 시상이 떠오르지는 않은 모양, 다행히 파티원들은 별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게 해줘야지.’
예술인이라는 족속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새끼들은 지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솔직히 딱히 나쁘지도 않다. 어차피 꽃과 풍요의 성자는 떠날 테니까.
그를 그리워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는 건 여러모로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늙은 감성에게는 이게 취향일지도 모르지. 우리 할아버지 감상에 빠진 것 좀 보라고 오그라들기는 하지만 수요는 있자너.
조금 오그라드는 연출이었지만 한 발자국 뒤에서 상황을 지켜본다면 제법 봐줄 만하다.
말 그대로 망령들을 위한 진혼곡이 빛과 함께 석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중.
음악은 계속해서 메아리치며 겹겹이 들려오고 있었고 빛은 계속해서 묘지 안을 밝히고 있으니 누가 느끼기에도 거룩한 분위기가 장내를 휘감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고… 맙구나. 로헨의 후손들이여.
“…….”
-고맙구나….
형태를 유지했던 몰락한 왕과 그의 신하들이 푸른색 빛가루로 변해 흩날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3레벨 던전. 몰락한 왕의 묘지의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
떠오른 것은 작은 메시지였지만 아마 모두가 큰 성취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당장에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겠지만 괜스레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모두가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
꽃기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던전의 공략을 완료했네요.”
“…….”
“모두들 고생 많으셨어요.”
이후에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헤… 헤헤헤….”
“우와아아아아아아!! 언니! 언니! 우리가 해냈어요!”
“알, 알았으니까. 잠깐 떨어져. 채령아.”
“흐음… 다행이구나.”
“진짜 해냈어. 우리가 해냈다구요.”
물론 좋은 분위기에 초를 치는 녀석도 있게 마련, 아니나 다를까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는 우효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처구니없군. 고작 3레벨 던전이었을 뿐이다.”
“꼭 말을 그렇게 해야 되나요?”
“흥.”
“기념할 만한 일인걸요. 무엇보다 파티가 함께 모여서 던전을 공략한 거니까요. 시작이 반이에요. 결과도 나쁘지 않았고… 파티에 밀려 있던 숙제도 해결할 수 있겠네요.”
“…….”
“…….”
“숙제?”
“원정을 준비하면서 진 빚이 조금 있었거든요.”
“뭐?”
‘왜 기분 나쁜 것처럼 그래?’
“많지는 않아요. 합법적으로 빌린 돈이고요. 파티의 이름이 아니라 제 이름으로 빌렸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물론 빚을 갚아야 하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효열 씨가 가장 느끼고 계셨겠지만 파티의 전체적인 스펙업이 필요한 시점이었거든요. 원정 준비야 소규모 자금이지만 좋은 장비 같은 경우에는 대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골드가 소비되니까요. 레벨3 장비라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몰락한 왕의 묘지에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보상들이 있는 것 같아요.”
“…….”
“그리고 무엇보다.”
“와!!! 대… 대박! 대박!”
게니우스들의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도 성공했으니까.
이미 내 쪽에서도 3레벨 던전을 클리어한 것에 대한 축하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 다른 이들이라고 상황이 다를 리 없다.
우효열과 정하얀이야 굳이 게니우스들의 지원이 필요 없어도 성장할 수 있는 이들이었지만 다른 파티원들 같은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남궁선, 임채령, 레이먼 볼트, 노담혜.
그나마 남궁선이야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신성계열의 하급 잡신에게 지속적인 원조를 받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레이먼 볼트 영감도 게니우스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만큼 뒷방 늙은이 취급받고 있을 게 뻔했다.
임채령은 아예 게니우스의 관심을 받은 적조차 없었을 것이다. 노담혜는 비전투직군이었으니 논외.
말하자면 비교적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수많은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다.
우효열, 이기영, 정하얀이라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파티의 파티원.
떡상할 거라 예상 아닌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 무난히 3레벨 던전을 클리어하기도 하며 자신들의 가치를 입증했다.
마냥 버스를 탄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본인들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 게니우스들이 초조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아! 감사합니다. 500코인이나… 아… 1,000코인… 후원 너무 감사드립니다!”
“…….”
“고맙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는 조용한 빛 님. 더, 열심히 할게요. 아… 이렇게까지 후원해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
“감사히 받겠습니다.”
레이먼 볼트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보니 오랜만에 소통 아닌 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아아아앗! 뭐야아아아아아! 5,000코인! 5,000코인 뭐야아아아아아!!! 누구세요? 너무 감사해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게 당연한 거지. 특히 얘는 우효열이 훈련을 봐주니까.’
“헐. 헐! 뭐예요? 지금… 지금 저 이상해요. 우와! 우와아아앗!”
‘너무 호들갑 떨자너.’
물론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어? 어? 저? 저!”
“…….”
“저… 선택받은 것 같아요.”
“…….”
“잠깐, 잠깐 메시지가 너무 많이 와서… 잠깐만요. 잠깐. 저,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게니우스님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
“부파티장님. 어떻게 해요? 지금… 지금! 게니우스님들께서.”
‘이건 중요하지.’
“일단… 진정하시는 게….”
“아. 네! 진정… 진정해야죠. 진정해야 되는데 지금 계속.”
“혹시 몇 분이나 오셨나요?”
“잘 모르겠어요. 직접 저를 선택해 주신 분은… 열… 열세 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아니, 계속 늘어나고 있어서….”
“직업명이나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문의하는 게 좋겠군요.”
“그, 그래도 될까요?”
‘왜 안 돼? 지금은 네가 갑인데.’
“네. 꼭 그렇게 하셔야 돼요.”
[하늘의 문지기♥가 화염 속에서 불타는 새를 추천한다고 합니다. 플레이어 임채령에게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며 그가 다른 게니우스들과는 다른 특별한 선물을 줄 것이라 말합니다.]
[늙고 병들어 있는 성서가 화염 속에서 불타는 새와 플레이어 임채령의 궁합이 맞지 않을 거라 조언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습니다.]
[늙고 병들어 있는 성서는 플레이어 임채령에게 성기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고 중얼거립니다.]
[가녀린 촉수여왕♥이 플레이어 남궁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타락시키는 보람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황금색 성좌에 앉은 이♥가 플레이어 레이먼 볼트에 대해 묻습니다. 그가 혹시 다른 게니우스를 선택할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물론 아직은 더 지켜보고 싶다고 읊조립니다.]
[슬피 우는 파랑새는 플레이어 임채령에게 메시지를 보낸 게니우스들을 궁금해합니다.]
‘그래, 나도 궁금해.’
아니나 다를까 온갖 대환장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청탁 아닌 청탁을 하는 게니우스들도 있었고, 파티원들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는 녀석들도 많다.
누구는 괜찮다느니 누구는 이래서 안 된다느니, 저래서 안 된다느니 하는 메시지의 비율들이 꽤 많은 편.
오죽하면 노을빛의 마왕이 강림했던 순간과 비슷한 열기가 느껴질까.
하트를 달고 있는 양반들은 그나마 양반이다.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잡신들이 오히려 미쳐 날뛰고 있는 것을 보니 함정카드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첫 번째 게니우스님은 여섯 정령의 어머니세요. 직업으로 레벨 3의 정령도둑을 주신다고 하셨어요! 정령과의 친화력을 높여주는 반지도 선물로 주시겠데요!”
‘정령도둑? 이름만 들어도 엄청 근본 없어 보이는 직업 이자너.’
“그,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실프의 장화도 주신대요! 이걸로 끝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코인을 후원해 주시고… 직업도 레벨이 오를 때마다 계속 갱신해 주시겠다고….”
‘사은품이 많은 것 보니까 여간 불안한 게 아닌데?’
“두 번째 게니우스님은 화염 속에서 불타는 새 님이에요! 불길을 걷는 자라는 특수 직업을 내려주실 수 있으시대요! 우왓! 화염 마법 인첸트를 아무런 페널티 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
“세, 세 번째는….”
‘함정카드 가려 받는 것도 일인데….’
관심이 없을 것 같았던 우효열이 은근슬쩍 거리를 좁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령도둑이요? 꽤 괜찮아 보이기는….”
“그렇죠? 괜찮아 보이죠? 정령도둑!”
아니나 다를까 금방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흥.”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