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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49화 (1,14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49화

마음이 꺾였지만 이내 일어서게 되는 클리셰 (2)

“네놈은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처박혀 있을 생각이냐?”

“…….”

“이기영.”

“…….”

‘우효열 너 이 새끼.’

“…….”

‘성장했구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우효열이었다. 이틀 동안 뭘 하다가 여기에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찾아온 것으로도 녀석이 성장 아닌 성장을 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확실히 성장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얘 의외로 건강한가 봐.’

물론 녀석이 무너질 만한 요소는 없었다. 둠기영 때의 김현성과는 달리, 레이먼 볼트는 녀석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동료로서 인식하기는 했겠지만 함께한 시간이 짧으니 유대를 느낄 시간도 짧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나 1회 차에서 많은 죽음을 겪어봤을 테니, 이번에도 그저 흘러가는 죽음이라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었겠지.

물론 그 희생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이번 사건은 녀석이 이 파티에 애착을 가지게 하기 위한 버튼이 되기에 충분했었던 것 같다.

‘눈빛이 많이 좋아졌자너.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무슨 썩은 동태눈깔 하고 있었는데.’

인간불신이었던 녀석에게 어느 날 다가온 ‘여기는 내게 맡기고 도망가.’ 사건.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것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임채령의 한 방 먹였다도 있었고, 남궁선의 자기희생 주문 디너쇼도 준비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모두가 같은 위기를 겪었다. 마음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공통으로 소중히 하던 것을 잃었고 함께 무너져 내렸다. 녀석은 파티원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기영이 가장 안쓰럽게 보였겠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 맞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당당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주제에 이쪽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

지금 우효열이 이쪽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우효열을 올려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책감, 죄악감, 무력함,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23살의 꽃기영은 회피하고 싶어 하고 있다. 아마 우효열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흘러나온 목소리.

“겨우 이 정도였나?”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대사. 많이 본 것 같은 씬이었다.

‘그딴 상투적인 대사밖에 못 던져?’

“네놈은… 겨우 이 정도였나?”

“…….”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

“그 건방진 모습은 어디로 간 거지?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알고 있는 거냐.”

“…….”

“기대하지 않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군. 쓰레기가 되어버렸어.”

당장에라도 자리를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과 대사.

하지만 녀석은 얼굴을 구기고 제자리에 조용히 서 가오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이쯤에서 이기영 또한 대사를 던져주는 것이 옳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도 한계가 있거니와 이기영 역시 녀석에게 적의를 느끼기에도 충분한 개연성이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레이먼 볼트를 버린 것은 이기영의 판단이 아니라 우효열의 판단이었다.

물론 이성적인 기영이는 녀석의 판단이 최선의 판단임을 알고 있었지만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이성적인 판단에만 따를 수 있을까.

단지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스스로도 자신에게 낼 화를 우효열에게 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데리러 왔다. 이 이상 지체하는 것은 시간이 아까우니까.”

‘그래 그 말이 맞기는 맞아. 하루하루가 아깝기는 해.’

“저… 저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당신… 당신이….”

할아버지를 죽인 거예요.

“나는….”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

모두 당신 탓이야.

너무나도 비겁하고 저열한 감정.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말들이 계속해서 입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이 입을 열어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이다.

“다음 계획은 뭐지? 파티원을 보강할 생각은 있나.”

“지금… 그게….”

‘그게 인간이 날릴 수 있는 대사야? 할아버지가 죽은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빠진 자리에 사람을 채워 넣는 것이 먼저다. 네놈이 계획한 파티에 필요한 인선은 네놈이 직접 꾸려야 하지 않나? 그게 약속이었다.”

‘어떻게 시바 할아버지의 온기가 식기도 전에 거기에 다른 놈들을 박아요.’

“이상한가?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던 것은 네놈이었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를 설득한 것도 네놈이었다. 이렇게 주저앉는 걸 본다면 그 영감이 퍽이나 좋아하겠군.”

‘이익.’

이쯤에서 하얀이 추임새랑 같이 발작 버튼 한번 눌리고. 용기를 냈다는 듯이 또박또박 입을 열어보자.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내가 틀린 말을 했나?”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우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당신이… 당신이 뭘 안다고….”

막말도 해 야지.

받아랏!

“소중한 사람을 가져본 적도 없는 당신 같은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

“…….”

“그래 나는 모른다.”

“…….”

“하지만 네놈이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게 그 영감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단 말이다.”

“당신 같은 사람이… 당신 같은 사람이….”

“…….”

“나가세요.”

“뭐?”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가요.”

“포기하는 건가?”

“포기가 아니라….”

“웃기는군. 고작 여기 숨어 있으라고 그 늙은이가 네놈을 구한 것 같나? 입단신청서? 한번 실패했다고 그대로 도망쳐 버리는 건가? 후방업무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지껄일 생각도 하지 마라.”

“…….”

“겨우 그걸로 전부 내던져 버리는 거냐고 물었다.”

“아무 상관 없으니까 나가라고!”

우효 녀석은 말주변이 없다.

말은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툭툭 쏘아대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당연히 어떻게 이쪽을 설득시켜야 할지 난항을 겪고 있을 게 분명했다. 곧바로 인상을 찌푸린 녀석이 선택한 것은 행동하는 것.

갑작스레 이쪽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방문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하는 녀석이 눈에 보인다.

“이거 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질질 끌다시피 이쪽을 밖으로 끌어낸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꽃기영의 눈에,

천천히 단검을 휘두르고 있는 임채령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걸 보여주려고 그런 거니? 효열아?’

“…….”

“…….”

땀에 젖은 얼굴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단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절해 보인다.

아마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이리라.

‘됐다. 시바.’

이건 됐다.

이건 될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임채령 님. 일단은 몸을….”

“재활 훈련이에요! 어차피 상처도 다 나았잖아요. 하아… 하아… 그리고 꽃과 풍요에서 직접 단검술을 배워볼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그것도 일대일로. 선생님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요.”

“죽을 고비를 넘긴 지 이틀 만에 재활 훈련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임채령 님.”

“아 몰라요. 몰라. 지금 아니면 훈련할 시간도 없다고요. 아직 단검술도 다 못 익혔는데… 곧바로 실전에 투입하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해야 돼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일단은 휴식하는 것이 먼저라 이 말입니다.”

꽃과 풍요의 레인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려온다. 언제나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밝게 웃는 그녀였지만 얼굴에는 수심이 드리워져 있다.

레이먼 볼트의 사망, 자신에 대한 무력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여러 가지 감정으로 얼룩진 얼굴 위에 밝은 미소를 쓴 가면이 얹어져 있다.

이쯤 되면 이기영 역시 자세를 고쳐 잡을 수밖에 없다. 우효열도 그걸 알았는지 부여잡고 있는 손을 내려버렸다.

“…….”

“…….”

녀석은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긴다.

당연히 나 역시 녀석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보인 것은 남궁선 이었다.

뜻밖에도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방패술을 배워보라는 우효열의 조언도 조언이었지만… 체력훈련도 하고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아마 그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만약 내가 지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준비가 되어 있었더라면… 아무도 잃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임채령보다는 상태가 좋았는지 제법 본격적으로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단기간에 모든 걸 흡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체력과 방패술에 중점을 두려는 모양, 4레벨 전직은 성기사 쪽을 노려봐도 괜찮아 보일 정도였다.

물론 안기모처럼 안정적인 육각형이 아니라 하자가 있기야 하겠지만 레이먼 볼트가 나간 빈자리를 조금은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노담혜마저 간단한 마법과 체력단련을 병행하고 있는 상황.

예상했지만 모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우효 녀석마저 한 발 나아가지 않았던가.

혹시나 파티원들에게 들킬세라 조심스레 움직이며 우효 녀석을 바라본다.

‘이거 보여주려고 부른 것 맞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냐는 듯이 말이다.

“저는….”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녀석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보여줄 게 남아있나 싶기는 했지만 일단은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정석, 임채령, 남궁선이 있었던 훈련장과는 다르게 한참이나 걸어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어딜 가는 건가요?”

“…….”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리고 마침내 녀석이 발을 멈췄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잠깐 누구인지 헷갈리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고아원의 아이들.

레이먼 볼트가 돌봐줬었던 고아원의 아이들이었다.

“아! 형이다!”

“형!”

“오빠 왔어!”

감동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싶다는 듯이 뛰어 들어오는 아이들.

당연하지만 꼬맹이들의 악의 없는 ‘그 대사’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어디 있어?”

애들아… 그런 말 하면 형 감정이 요동치잖니.

‘나 울어도 돼? 그러라고 여기 불러온 거지?’

조용히 눈물을 쏟으며 녀석들을 꽉 껴안는다.

이건 분명히 감동적인 상황이었다.

상처받은 영혼이, 마음이 꺾인 평범한 사람이 다시금 살아나갈 용기를, 동기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레이먼 볼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모험가를 은퇴하려 했을 때 눈앞에 들어온 아이들… 도저히 포기할 수 없을 때 자신의 희망이 되어준 아이들.

지금 그 아이들이 이번에는 23살 꽃기영의 앞에 서 있다.

“흐윽… 흐으으으윽….”

“오빠… 왜 울어? 울지 마….”

“흐윽… 흐으으으윽… 흐으으으으윽….”

“울지 마아… 히잉….”

“흐으으윽….”

우효열은 중얼거렸다.

“유지는 이어지는 법이다.”

“흐으으윽… 흐으으으윽….”

“끈은 이어지는 법이야.”

녀석답지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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