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50화
각자의 목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하는 클리셰 (1)
복장을 바꾸어 보도록 하자. 슬픔을 털어버리고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했다는 걸 가장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본래는 헤어스타일이라도 바꿔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아쉽게도 살짝 잘라내는 것이 한계였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조금 더 모험가스러운 복장으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슬픔을 딛고 일어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누가 뭐라 해도 이미지 변신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간에 기존의 애송이 꽃기영을 떠올릴 수 있는 장비들은 버린다.
전형적인 용병사제들이 사용하는 아이템으로 세팅하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스탠스를 취해줘야 했다.
물론 빠지지 않는 것은 레이먼 볼트 할아버지의 유산, 출처도 모르는 싸구려 목걸이를 빼놓을 수는 없다. 소중하게 목에 건 목걸이는 꽃기영이 그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게… 이런 게 중요해.’
전체적으로….
‘나쁘지는 않은데….’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노린 것처럼 목걸이가 포인트가 되어주는 것만 같다.
저 멀리서 보기에도 목걸이가 눈에 띈다. 수수한 외관과는 반대로 안쪽 주머니에 잉여 공간도 많으니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을 집어넣기에 딱 좋은 디자인.
이번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쳤기 때문에 로브 이외에 다른 아이템들도 제법 번쩍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너무 오바한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자너. 이 정도 이미지 변신은 있어 줘야지 슬픔을 이겨낸 거자너.
“…….”
“…….”
“이겨내셨군요.”
내 모습을 보자마자 윌근본이 중얼거린 대사였다.
꿋꿋한 표정으로 감정 한번 잡은 이후에는 녀석의 말을 받는다.
“사실 이겨낸 것 같지는 않아요. 여전히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슬프고… 무너질 것 같지만… 계속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
“제가 조금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었죠…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그동안 배려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윌리엄 님.”
“괜찮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드렸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한 제안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이기영 님께 더 어울리는 모습은 이런 모습인 것 같으니… 만약 이기영 님께서 제안을 받아들이셨다고 하더라도 아마 저 스스로가 한 선택이 맞았는지 계속 의문을 느꼈을 겁니다.”
그래. 녀석의 말대로 온실 속의 화초는 꽃기영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진열장에 잘 장식되어 있는 것보다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야생화가 더욱더 꽃기영답다.
‘윌근본 너… 알아줬구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구나.’
이쪽이 만들고 싶어 했던 꽃기영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오히려 이렇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니… 너무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조금은 안심이 되네요.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아 걱정했었는데….”
“염치가 없다니요. 비록 패밀리아 소속은 아니지만 이기영 님께서도 꽃과 풍요의 가족이십니다. 조금 더 이곳을 편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집으로,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로 말입니다.”
‘너 이 자식….’
조용히 웃고 있는 윌근본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보이는 진실된 표정에 미소가 절로 나온 것은 당연지사.
금고에 있는 재화들도 공유할 수 있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다시 한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염치가 없을까 죄송하다는 게 사실 이 부탁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요.”
“네? 그게 무슨….”
“사실은….”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부파티장님!”
“이기영 님.”
‘그래. 그래. 너희들 왔구나.’
들려온 목소리는 바로 임채령과 남궁선의 것.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반가워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의구심은 없다. 이 모든 게 다 레이먼 볼트의 유산이었으니까.
‘같은 아픔을 겪었으니까. 함께 슬퍼했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의 얼굴은 밝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긴 했지만 최소한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들 역시 이 아픔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당연히 장비도 많이 달라져 있는 것이 보인다. 원정에서 얻은 아이템들과 꽃과 풍요의 지원을 받은 아이템들,
하지만 아이템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효 파티원들의 눈빛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청춘은 한번 아파봐야 돼.’
스펙이나 레벨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닝 멘탈리티가 장착되어 있는 모습, 정신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보지도 않자너.’
“회복하신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채령 씨도 남궁선 씨도….”
“네! 저야 뭐 건강 빼면 시체잖아요. 몸은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아요. 부 티장님. 지금 당장에라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구요.”
“꽃과 풍요 여러분 덕분에….”
“그러니까 빨리 다음! 다음 계획은 뭔가요?”
‘왜 이렇게 진도가 빨라? 뭐 벌써 다음 계획을 말해달래.’
그래도 의욕적인 것은 좋다.
마침 우효 녀석도 벽에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중,
“흥.”
노담혜 역시 더 이상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의문을 표현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얀이는 계속 앉아 있었고, 마침 파티원들이 모두 모였으니 딱 사과를 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아무도 언급하기 싫어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계속 덮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일단 파티원분들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
“…….”
“네? 갑자기….”
“이 앞 전에 일어났던 사고에 대해서요. 명백히 제 미스였다고 생각해요.”
“그… 그게 어떻게 이기영 님 잘못인가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라고… 아닌가요?”
“이유야 어찌 됐든 간에 작전의 실패는 지휘관의 책임이에요. 저는 여러분들을 전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파티원분들의 체력 상태나 정신력을 고려하지 못한 채로 펼쳐진 작전이었어요.”
“에이. 그건 말도….”
“할아버지를 잃은 것 역시 제 책임이에요. 제가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분명히 아무 희생자도 없이 하리젤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 거예요.”
단호하고 꿋꿋한 목소리는 갤러리들의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남궁선이 뭔가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 재빠르게 선수를 친다.
“그리고 더불어…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드릴게요.”
“…….”
“절대로. 두 번 다시는 절대로 이런 실패는 없을 거예요.”
“…….”
“…….”
“흥. 전보다는 눈빛이 조금 나아졌군.”
“…….”
“조금은 쓸 만해진 듯한 느낌이야.”
“아 말 좀 예쁘게 하세요. 진짜. 꼭 저렇게 틱틱대면서 말해야 직성이 풀린다니까. 이미 효열 오빠가….”
“내가 언제부터 네 오빠가 됐지?”
“어제부터요. 어제.”
“어처구니없군.”
“내일 부파티장님 일어서면 바빠질 테니 준비하라고 말한 게 누군데요. 글쎄요. 부파티장님. 어제 효열 오빠가 파티하우스까지 빌린 거 있죠.”
‘뭐라고?’
“헛소리. 자그마한 저택을 하나를 빌린 것뿐이다. 짐이 쓸데없이 많아지니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을 뿐이야.”
“에이….”
“다른 무엇보다 네 훈련을 봐줄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네 그 쓰레기 같은 무기술을 조금이나마 사람답게 만들려면 집중해야 할 장소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연무장이 딸린 저택을 빌릴 이유도 없었겠지.”
“효열 씨도 조금… 솔직하지 못한 면이 있죠.”
“…….”
남궁선까지 은근슬쩍 우효 녀석을 먹이는 것처럼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보육원 아이들에게 파티하우스의 관리를 맡기셨거든요. 후훗….”
“흥. 어제도 말하지 않았나? 그 밥만 축내는 꼬맹이들이 놀고 먹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 파티 하우스가 아니야. 그냥 저택을 임대한 게 전부다.”
‘레이먼 볼트 효과 한번 끝내주자너.’
어디서 노전사 딱 3명, 4명 정도만 더 구하고 요단강으로 밀어 넣으면 더 좋아지겠어. 아주. 100명만 더 있었어도 벌써 로헨은 구하고도 남았겠어.
그만큼 놀라운 상황이기는 했다. 본인 말로는 여관을 빌렸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인력까지 이쪽 인사를 쓴다는 것은 정규파티, 아니, 패밀리아를 구성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구속되거나 발 묶이기 싫어했던 그 우효 녀석이 맞는지 의심이 되는 수준의 변화였다.
“값싸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다. 자금 상황이 여유롭지 않은 이 파티에게는 딱 어울리겠지.”
“하지만….”
“그만 더 이상 그것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나?”
“네?”
“이 천둥벌거숭이의 말을 반복하기는 싫지만 이 파티의 다음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 그거 중요하지. 안 그래도 그거 이야기하려고 했어.’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자면 파티의 성장이에요. 던전 공략, 네임드 몬스터 사냥, 고레벨의 퀘스트.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해요. 그리고.”
“…….”
“앞으로 3개월간의 원정에 저와 하얀 씨는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잠깐의 침묵.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뭐라고?”
물론 가장 큰 의문을 표시한 것은 우효열이었다.
‘이 새끼 눈빛 흔들렸다.’
“이건 윌리엄 님께 방금 드리려고 했던 말씀과 일맥상통해요. 이런 방식으로 말씀드리게 돼서 죄송해요. 윌리엄 님.”
“아. 그럼 그 부탁이라고 하셨던 게.”
“예. 당분간 저와 하얀 씨는 파티에서 빠져 꽃과 풍요와 함께 앞 전선에서 활동하려고 해요.”
“그게 무슨 미친.”
“모두 쉬쉬하고 있지만 저희가 마주쳤던 천사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들은 분명히 저를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다들 알고 계시지 않나요?”
“…….”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분명히 저를 아버지라고 불렀고… 저를 찾고 있었어요.”
“…….”
“짧은 시간이지만 그 비밀을 파헤쳐 보려고 해요. 무엇보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한다면 분명히 다시 한번 그들을 마주칠 확률이 높아요. 빠르게 성장해야 하는 파티에 짐이 될 수 없어요. 가능하다면 제가 그들의 이목을 끌어올 수도 있겠죠. 여러분들이 성장하기 편한 방향으로 말이에요.”
“그건.”
“두 번째로는 제 부족함을 실감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
“저는 경험이 필요해요.”
“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경험이요. 저는 더 이성적이어야 하고, 더 냉철해야 해요.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해요. 이… 파티에서는 그걸 배울 수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예요.”
효열아.
너 혹시….
섭섭한 거 아니지?
“저는 경험이 필요해요.”
상처받은 거…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