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51화
각자의 목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하는 클리셰 (2)
파티원들의 성장 방향 같은 경우에는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다.
일단 임채령은 3레벨 직업 단검 무법자에 익숙해지는 것이 먼저.
기본적인 내실을 다진 이후에는 내정되어 있었던 정령도둑이나 거룩한 밤의 도둑 같은 직업으로의 전직을 노린다면 충분히 상위 플레이어의 자리에 안착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된다.
‘남궁선도 대충 결정이 났고.’
조금 의외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체력과 방어력을 보강해 성기사 루트를 타는 것으로 결정이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사제로서는 상위의 플레이어로 성장하기 애매했기 때문에 선택한 방향이기도 하겠지만….
근력, 내구, 체력 능력치가 괜찮은 만큼 나쁜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를 지지해 주고 싶을 정도, 애초 이후 영입할 인선이 어떨지, 실제로 영입할 것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애매한 전위의 보강이 꼭 필요한 시점이었다.
기존에 있던 사제가 성기사로 성장방향을 결정했다면 박수를 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노담혜가 조금 애매하기는 했지만…….
‘지가 데려온 만큼 알아서 잘 성장시키겠지 뭐. 생각보다 안 터지면 노전사 한 명 더 영입해서 보내버리면 되자너.’
절차가 조금 복잡하기는 했지만 노전사 희생 코스는 믿고 먹을 수 있는 코스였으니까.
물론 이쪽이 파티를 이끈다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그녀들을 성장시킬 수 있었지만, 우효열 혼자서도 충분히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거라 판단이 섰기 때문에 던진 발언이었다.
아니,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떨어져 있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이다.
품에 안고 옥이야 금이야 키우는 것도 좋기야 하겠지만 어려운 시기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야말로 파티원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지름길이다.
박덕구도, 김예리를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 역시 그랬다.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고 이끌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품에서 떠나보내 스스로에 대해 파악하고, 스스로 방향성을 결정하게 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마침 딱 각자의 목표가 뚜렷해진 타이밍이 아니었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우효열의 탈주 가능성이었지만 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탈주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소속감이 생겼지? 그렇지?’
레이먼 볼트의 유지는 꽃기영에게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갑작스레 유기당한 들개에게 미안해지기는 했지만 파티원들의 성장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부분.
모르긴 몰라도 이쪽의 말을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외적으로 드릴 수 있는 지원은 최대한 드릴 거예요. 성장 로드맵이나 던전에 대한 정보, 보급 물품이나 성장에 따른 아이템 지급도 준비할 거고요. 당연히 새로운 파티하우스에서도 계속해서 머무를 계획이에요.”
“…….”
“저도 외부 활동이 필요하고, 파티 역시 계속해서 원정을 다녀야 하니 마주칠 시간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 같은 파티니까.’
“하지만 부파티장님. 저희는… 어떻게 하나요. 아무리 그래도 부파티장님이 없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채령 씨. 선 씨나 채령 씨의 성장 방향성은 확실하게 잡혀 있으니 효열 씨가 조금만 잡아주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효열 오빠 하나로는 영… 불안한데….”
그래 불안하기야 하겠지. 저 꽉 막힌 놈이랑 같이 다닌다니 얼마나 머리가 아프겠어.
“효열 씨를 조금 더 믿으셔도 돼요. 그렇죠? 효열 씨.”
‘너 회귀자자너. 내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기연 좀 먹일 수 있는 기회야.’
너도 좀 성장하고 적어도 레벨 5는 찍어야지 어떻게 이야기가 되지. 그렇지 않아? 나머지 얘들도 적어도 레벨 4까지는 키워야 되지 않겠어?
조금 딱딱하게 굳은 얼굴, 얼떨결에 자리에 함께 있게 된 윌근본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표정이었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릴 수도, 말리지 않을 수도 없다. 명분은 이쪽에 있었고 녀석 역시 내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3개월이라고 했나?”
“최소한으로 잡은 시간이에요. 어쩌면 조금 더 길어질 수도 있어요. 정확한 시기는 제가, 그리고 여러분이 준비가 됐다고 느껴질 때까지예요.”
“…….”
“…….”
“흥.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이 새끼 애써 쿨한 척하는 것 같자너.’
“네 말대로 그 녀석들은 틀림없이 네놈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묻지. 혹시 그것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나?”
‘짐작 가는 게 있겠어?’
“아니요. 정확히…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듯한 느낌은 들어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현재 로헨은 비틀려 있어요.”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의 의미예요. 무언가 어딘가가 비틀려 있어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본래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유도, 증거도 충분하지 않지만 그냥 알게 돼요. 지금의 대륙이 비틀려 있다는 걸 말이에요.”
“…….”
“…….”
당연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리라. 작금의 모든 상황을 압축해 주는 문장이었으니까.
1회 차와는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2회 차를 떠올려본다면 더욱더 그렇다.
노을빛의 군주, 3명의 천사. 검은 용 위에 올라탄 여인. 회귀자가 알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
녀석 스스로도 의문을 느끼고 있었겠지만 이번 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모든 사건의 회오리 속에 이기영이 있다는 것 하나.
말 그대로 이 모든 것들이 어쩌면 이기영과 연관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부정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구태여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해가 가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많다는 것은 기분 나쁘겠지만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키가 눈앞에 있다.
이쪽 대륙에서도 유행하는 고전 소설의 전형적인 클리셰.
세상의 운명을 등에 진 성자 같은 컨셉이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윌근본에게도, 우효열에게도, 이기영은 버려야 할 패가 아닌 지켜야 할 패였다.
‘나… 언제나 사건에 중심에 있자너.’
“…….”
‘이기영한테 로헨의 운명이 달려 있자너.’
혼란스러운 기억, 시한부, 아버지, 나도 이해할 수 없었던 퍼즐들이 흩어져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퍼즐을 맞추는 건 내가 아니었으니까.
‘기영이가 아파하면 세상이 멸망하자너.’
이런 감성도 괜찮아 보인다.
당연히 효과도 좋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당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어쩌면 로헨의 운명이 우리 기영이에게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립니다.]
[거룩한 밤의 여주인♥이 3명의 천사. 21군단장. 아버지. 어떤 연결점이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갤러리들이 떡밥 굴리기에도 딱 좋지.’
[심연 속에 가장 낮은 심연♥이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지, 어째서 로헨에 이렇게 많은 비틀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사건들이, 초월자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려 한다고 말합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동의합니다. 어쩌면 게니우스들 역시, 허락된 범위 안에서 힘을 모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단체로 지랄병이 난 것 같다며 이죽거립니다.]
“죄송해요. 중요한 시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저도 마음이 너무 불편하기는 하지만….”
“사과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네놈 따위는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었다.”
“…….”
이 새끼는 왜 말을….
“그래서… 기준이 어떻게 되지?”
“네?”
“네놈이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만한 정확한 기준 말이다.”
“아….”
“…….”
“강해져야 해요. 최소한, 우리가 마주했었던 천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일은 아니군.”
확신에 가까운 대답. 다소 불안해했던 파티원들도 조금은 안심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겠다.”
“네? 벌써요?”
“머뭇거릴 이유가 있나?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가이드 라인은 필요 없다. 네놈은 네놈만 신경 쓰도록. 혹시나 비틀림에 대해 알게 되거나 무언가 알아낸 것이 있다면 곧바로 연락하는 것으로 하지. 그럼 가겠다.”
“어? 잠깐만요. 효열 오빠. 작, 작별인사는….”
“흥.”
더 이상 볼 필요 없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던 임채령과 노담혜도 꾸벅 인사를 하며 방문을 박차고 나가는 중.
정하얀은 그 와중에 남궁선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제법 정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뭔가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것 같은 장내, 윌근본이 조심스레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기영 님….”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 제가 너무 무례했나요? 의사도 묻지 않고 너무 혼자 결정한 것 같아서….”
“아닙니다. 이기영 님이 함께해 주신다니… 꽃과 풍요에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네.”
“이렇게 갑작스레 함께한다고 하실 줄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방금 전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
“다른 무엇보다 비틀림에 대해 따로 조사해야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느끼게 됐어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뭔가가 있어요.”
“…….”
“단순히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겠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어쩌면 제가… 이번 메인스트림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너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거야. 보고를 들었으면 당연히 그렇게 느끼겠지.’
이제 막 대륙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는 성자 느낌 나구 막 그러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윌근본, 한 대륙의 운명이 23살의 여린 성자에게 달려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이었지만 녀석은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걸 예상했다는 듯이, 조금은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자에게 다가올 비극을 미리 알기라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야생화에게 너무나도 커다란 짐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녀석은 다소 서글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말씀은….”
“…….”
“…….”
“네. 잿빛노을 지역으로 향해야겠어요. 최대한 빠르고 조심스럽게 말이에요.”
“역시 그렇군요.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도박이었다. 사실 현 시점에서 잿빛노을 지역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이쪽이 괜히 들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없었던 보험이 생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
-그 할아버지 죽은 건 슬슬 이겨내는 타이밍인가 봐?
-이겨낸 지 좀 됐지. 그런데 누나.
-왜요?
-도미 몸에 들어간 건 두 번째 였지?
-글쎄요.
-기분은 좀 어때?
-말해 뭐 해요? 끝내준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