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52화
작전명은 여명 (1)
‘여전히 쓰레기 같자너.’
어떤 형태로든 대륙에 진입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딸내미의 몸을 차지한 채로 대륙에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물론 당사자 간의 합의가 있었겠지만 너무 충격적인 방법이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누나 근데 도미는? 걔는 괜찮다고 해?
-그럼 싫어하겠어요? 사랑하는 엄마랑 매일매일 24시간 떨어지지 않고 착 달라붙어서 같이 지내고 있는데. 옛날처럼 험한 방식으로 길들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도미랑 얼마나 잘 지내는데요. 못 믿겠으면 바꾸어 줄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고….
-그리고 누가 누구 괜찮냐고 물어볼 상황이 아니지 않나? 지금 이 사달이 난 게 누구 때문인지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죠?
-…….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지. 그 당시에는 얼마나 개판이었는 줄 알아요? 사람들은 울고불고, 김현성 걔는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혼돈의 도가니였다고요.
-…….
-참. 뒤에 일어날 일을 신경 안 쓰는 게 문제라니까.
-누나는… 누나야말로 거기 다 정리하고 온 거 맞아? 누나까지 왔으면 우리 쪽은 누가 관리해?
-진 군사 있잖아요. 베니고어도 있고.
-진 군사 혼자 괜찮아?
-그건 모르죠. 근데 책임감 없는 양반은 아니라 괜찮을걸요? 오히려 욕심이 많은 쪽이라 문제죠. 아마 우리 없는 사이에 프로젝트 날치기로 두세 개는 통과시킬 텐데… 별로 걱정은 안 돼요. 사실 지금까지 진 군사가 낸 안건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반대를 위한 반대 때문에 가로막힌 게 많았지… 이제 진 군사도 꿈을 펼칠 때가 되기는 했어.
‘그렇기는 한데….’
-물론 진 군사 의사는 존중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불행해지는 꼴인데….
-걔는 욕심이 많은 게 문제기는 해. 언젠가는 그게 발목을 잡을 거야.
-아! 생각해 보니까 사하가랑 겔라도 영입했잖아요.
-아아, 맞네. 근데 누나.
-왜요?
-김현성. 걔는 누가 도와준 거야? 누나가 도와준 건 아니지?
궁금증에 입을 열어보기는 했지만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문제였다.
만약 누나가 도와준 게 맞으면 굳이 도미 몸으로 들어올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건 알아서 알아봐요. 나는 확실히 아니니까.
-아니, 그러지 말고….
-아니,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벨 이사나 까마귀 쪽이겠지만… 뭐 답은 누가 알겠어요?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요. 아무튼 간에 떡밥은 대충 뿌려놨어요.
-아. 기억의 구슬 조각?
- 네. 그거요. 설정 한 번 좋더라고요. 우리 꽃기영의 기억이 로헨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거. 김현성 쪽에서도 확실하게 입질을 한 것 같고… 타이밍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잿빛 노을 지역을 북쪽으로 틀기로 결정했거든요. 저는 외부에 나와 있어서 자세한 정황을 전부 전해 듣기는 힘들지만… 김현성 생각이야 안 봐도 뻔하니까요.
-…….
-지금 이 시기에 북쪽으로 영토를 늘릴 이유가 없으니까. 중앙은 조금 더 시간을 번 셈이죠.
-근데 거기는 다른 놈 구역 아니야?
-그러니까 좋다는 거죠.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북쪽에서 순순히 영토를 내어줄 것 같지는 않아요. 있지도 않은 기억의 구슬 조각을 찾으러 들어간다는데, 다른 대군주 쪽에서 얼마나 황당하게 들리겠어요? 우리 쪽에서도 이미 무력충돌이 있을 거라는 걸 상정하고 들어가고 있는 것 같고….
-으음….
-이런저런 상황을 전부 열거해 보면 로헨 쪽 인사들이 잿빛 노을 지역에 세이프티 존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봐요.
그래, 그런 것 같기는 해. 내가 괜히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자너.
곧바로 잿빛 노을 지역을 공략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세이프티 존은 만드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
현성이는 보통 악마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니까. 우리 쪽은….
‘혜지니를 상대해야 한다는 게 문제기는 한데….’
-아. 잠깐만요. 쓰로 얘가 또 질질 짜려고 하는 것 같은데. 위로 좀 해주고 올게요.
-…….
-얘가 부쩍 혼자 있을 때, 질질 짜려고 하더라. 아! 그리고 저희는 중앙으로 갈 것 같아요.
-그래? 그쪽에는 왜?
-임무 내려왔거든요. 꽃기영의 신병을 확보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기는 하지만, 기억의 구슬조각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져서요. 누군가는 외부의 정보를 취합해 전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대륙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들을 보고해야죠. 예를 들면 그래요. 오크가 갑자기 똑똑해졌다거나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럼 누나는 도시로 들어가겠네? 유력인사들한테 작업은 쳐놨고?
-물론이죠. 혹시 쓱싹 싶은 놈들 있어요?
-혹시 생기면 명단 정리해서 보내줄게. 아마 없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원정대 꾸리는 데 방해되는 놈들 있을까 봐 그러는구나?
-응.
-그럼 진행되는 거 보고 명단 보내주세요. 나 지금 도시 들어가거든. 애들 맛있는 거 먹이고 좀 돌아다녀야겠다.
-벌써?
-저도 바빠요. 누구 뒤봐주느라.
‘바빠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간만에 동심으로 돌아가 유희를 즐기는 것보다 바쁜 이유는 없어 보였지만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바쁘자너.”
빠르게 끊긴 대화가 아쉽기는 했지만 누나에게 빈정 상해 중얼거린 것이 아니었다.
이쪽 역시 최대한 빠르게 원정준비를 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다소 갑작스레 잿빛 노을 지역으로의 원정이 결정이 난 상황.
준비성이 철저한 꽃과 풍요를 비롯한 유력 패밀리아 쪽에서는 이미 언제든지 진입할 준비를 마치기는 했지만 문명에서 살다 온 내가 이 원숭이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개판이야.’
예상은 했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미개함. 혹성탈출에 등장한 침팬지들도 이놈들보다는 더 제대로 된 체계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한참 동안이나 수정 아닌 수정을 하고 있을 때,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자 최근 가장 많이 마주친 인사 한 명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밝은 미소를 선보인 것은 당연지사.
“아! 에밀리아 님.”
전 윌 근본의 부관, 현 꽃기영의 부관 에밀리아였다.
“업무 중에 죄송합니다. 지휘관님.”
“그냥 이기영 님이라 불러주셔도 돼요. 뭔가… 아직은 그 호칭이 부끄러워서.”
“합당하게 연합군의 지휘관 자리에 계시고 있는 겁니다. 조금 더 당당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건….”
슬쩍 이쪽을 바라본 이후에는 얼굴을 붉히는 모습, 아마 지금 수정하고 있는 작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에밀리아가 기존의 지휘체계와 작전을 가이드한 사람들 중 하나였으니까.
본인 입장에서는 나름 그럴듯하게 보였겠지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운 풋내기와 고이고 고인 고인물의 결과물이 같을 리 만무.
보는 눈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쪽과 자신의 차이를 여실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걸요. 기본 가이드가 없었다면 아마 한참 헤맸을 거예요. 에밀리아 님을 비롯한 분들이 이만큼이나 잡아주셨으니… 제 입장에서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던 거예요.”
“위로해 주시니 더욱더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너는 좀 낫다. 이건 부끄러움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성장의 여지가 있는 거야.’
눈앞에서 보여줘도 게거품 물고 염병 떠는 놈들도 많은데.
어느 집단이나 굴러들어온 돌을 싫어하는 법이다.
윌리엄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꽃과 풍요는 상황이 조금 나았지만 다른 패밀리아의 머리들까지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에밀리아처럼 생각이 있는 녀석들이야 말이 통한다.
비록 아카데미에서 한 번뿐이었지만… 로헨 대륙에 천재가 어떤 것 인지에 대해 보여준 적이 있었으니까.
범인은 감히 이해할 수도, 다가설 수도 없는 압도적인 지략과 지성.
사실 지금 작성하고 있는 매뉴얼도 마찬가지였다.
지휘체계부터 시작해 전술가이드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지 않았던가. 반응 또한 나쁘지 않았다.
‘천재 컨셉으로 기믹을 짜는 게 맞아. 그래야 그나마 비빌 언덕이 먹혀.’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런 종류의 시험대에 오를 때 불편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 누가 초보 감독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고 싶겠는가. 내가 이 새끼들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이기영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 시작되는 회의에서 느껴지는 다소 불편한 시선들 모두가 아마 그런 의미일 것이다.
“대단하군요. 이렇게… 단기간 내에…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다니.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피티에 대해서는 뭐라고 코멘트를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해요. 다나카 님.”
“아카데미에서의 일을 제 눈으로 직접 본 이후에도 반신반의했었고… 또 윌리엄 님의 말을 들은 이후에도 의심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천재라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하하.”
‘말은 이쁘게 해주기는 해.’
“하지만 불안함이 없다고 하면 거짓일 겁니다. 이기영 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번 작전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를 범하지는 않을지, 혹시나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아닐지, 불안한 요소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
“이기영 님이 만드신 작전을 그대로 유지하되, 총지휘관을 다른 분으로 모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쁘게 해석하면 능력 있는 대학원생의 고혈을 빨아먹는 교수를 데리고 오겠다는 소리였지만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벌써부터 공을 논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이기영 님을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논공에서 역시 총지휘관의 버금가는 성과를 얻을 수 있게 조치해 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게다가 이 정도까지 말해준다면….
‘부담을 좀 줄여주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고….’
책임을 피하게 해주겠다고 들리기도 하네.
원정 실패에서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한 번의 실수로 이 천재를 무너지게 놔두기보다는, 차근차근히 성장시켜 대륙의 대들보로 우뚝 서게 만들고 싶다는 녀석들의 꿈과 희망이 담긴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당연히 꽃기영이 물러서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다.
분명 이전의 꽃기영이었다면, 저들의 말에 적당히 수긍했을 것이 분명했다.
레이먼 볼트를 잃기 전의 그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강해져야 해.’
할아버지를 위해서.
‘물러서지 마. 이기영.’
언젠가 다시 만날 동료들을 위해서.
꽃기영은 포기할 수가 없다. 책임감과 부담감과 두려움 또한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기로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아주 오랜만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고개를 젓는다. 확신에 찬 얼굴로,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불안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윌리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갈아입은 옷만큼, 이기영이 내면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아니요. 제가 설계한 작전이에요. 다른 분께 책임을 맡길 수는 없어요.”
“…….”
“여러분들이 제가 만든 작전을 믿어주실 수 있다면… 저도 믿어주셔야 해요. 저는 경험도 부족하고, 대륙에 얼마 들어오지 않은 애송이지만… 저보다 이 작전을 더 잘 이해하고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저는….”
“…….”
“저는 천재니까요.”
“…….”
“그러니 아무 이견이 없다면 총지휘는 제가 맡겠습니다.”
“…….”
“작전명은 여명. 실행일은 삼 일 뒤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