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153화 (1,15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53화

작전명은 여명 (2)

“작전명 여명.”

“…….”

“…….”

“작전명 여명이라… 정말로 희망의 빛이 반짝하고 떠올랐으면 좋겠네.”

“이하동문.”

“사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불안한 게 사실이지만….”

“이하동문.”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은 겨우 3일이었고… 아니, 말이 3일이지. 실제로는 우리가 무슨 훈련을 받았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나.”

“…….”

“아. 기억나는 게 하나 있기는 하네. 우리 총지휘관님.”

“그만해요. 캐시. 이런 때에….”

“왜? 사실 아니야? 알레리아? 총지휘관님 보고 설레어서 잠 못 든 게 누구였는지. 내가 직접 말해줘?”

“캐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괜히 아헨델의 바람둥이라고 불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매일 함께하는 동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불평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던 ‘아헨델의 바람둥이’ 캐시는 수통 안에 몰래 챙겨온 럼주를 홀짝이며 음담패설을 주절거리고 있었고.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할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던 ‘일류 도박꾼’ 조니아는 그녀의 말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뭔가. 섹시하게 생겼다기보다는 야하다는 느낌 있잖아. 나 원래 마초 좋아하는 거 알지. 알레리아? 근데 우리 총지휘관님은 보자마자 무슨 생각을 들었는지 알아? 와. 이 새끼가 나를 유혹하고 있구나. 이런 느낌 뭔지 알지?”

“누가 누굴 유혹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느낌을 말하는 거야. 느낌을… 아마 나 말고도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 내가 장담하는데 그거… 요물이야, 요물…. 순진하고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으로 막… 유혹하는데… 하얀색 도화지를 더럽히고 싶다. 이런 느낌. 그거 뭔지 알지?”

“후우….”

“왜 그 전날에 훈련했을 때도 있잖아. 굳이 병사들이랑 같이 움직여 보겠다고 땀 뻘뻘 흘리면서 막….”

“경박해요. 캐시. 이런 때에 꼭 그런 말을 하고 싶어요? 총지휘관님께서는 어디까지나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훈련에 참가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거. 군기 위반이에요. 어떻게 총지휘관님한테 그런 말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당장 징계를 먹어도 할 말 없다고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소리지. 내가 괜히 이러겠어? 자꾸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나 섭섭해, 알레리아. 조니아.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이하동문.”

“이하동문이라고만 말하지 말고.”

“…….”

“잘난 외모만큼만 제대로 일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캐시.”

“정말로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해?”

캐시의 말을 부정하고 싶기는 했지만, 정말로 쓸데없는 걱정이라 치부하기는 힘들다.

그 꽃과 풍요의 보증이 있었다고 한들, 불안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번에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이기영 님께서는 천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지휘부에서는 이번 여명 작전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전이라는 것을 공지했었고, 그가 총지휘관으로 임명되기 이전에도 이기영 석 자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곤 했었으니 말이다.

‘천재군사.’

하늘이 내린 지성과 미모.

‘꽃과 풍요의 여신의 선택을 받은 성자.’

튜토리얼을 유례없는 성적으로 졸업했고, 그 관심에 힘입어 많은 이들의 귀추가 아카데미까지 주목되지 않았던가.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그의 모의전을 관람한 패밀리아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등장으로 인해 로헨이 완전히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평가가 나왔을까.

실제로 들려오는 소문 모두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한 번 눈으로 살핀 전장을 통째로 머릿속에 외워 넣는다든가. 실시간으로 뒤바뀌는 전장을 계속해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

처음 들었을 때는 로헨에서 영웅 만들기를 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게니우스를 상대로 코인을 뽑아내기 위한 호사가들이 소문을 계속해서 과장하고 퍼뜨린다거나 하는 것들은 의외로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3일 동안 총지휘관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어.’

훈련과 실전은 다르다. 그가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고, 대륙을 바꾸는 인재가 될 거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지만 그의 데뷔전을 함께하는 것과는 엄연히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로헨에 소환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병아리, 실전 경험은 손에 꼽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어린 23살의 나이.

훈련이라면 언제든지 함께해 줄 수 있었지만 그에게 목숨을 맡기고 싶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꽃과 풍요의 수장인 윌리엄이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까.

“운이 좋으면… 앞으로 로헨을 이끌어 나갈 영웅과 함께 데뷔전을 치렀다는 게 되는 거고. 운이 나쁘면 사상 최악의 멍청이들로 기억될 거야. 물론 윌리엄은 그중에서도 가장 병신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은데….”

“…….”

“아니,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지. 어쩌면 로헨이 끝장나 버릴지도….”

“그만큼 이번 메인 스트림은… 위험하니까요. 저도 불안한 게 없는 건 아니에요.”

“…….”

“능력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그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무대가 꼭 지금일 필요는 없을 텐데.”

“맞아.”

“근데 한편으로는 이런 시기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이번 메인스트림은 확실히 뭔가 다르잖아요. 선발대로 갔던 플레이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들은 이야기인데, 꽃과 풍요에서는 이번 원정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어요.”

“그래?”

“네. 총지휘관님께서 아직까지 불안요소가 있다고 판단하고 계셨나 봐요.”

“갑자기 마음을 바꾼 계기는 뭔데?”

“잿빛노을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정도밖에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기는 있으시겠죠. 위쪽에서도 정보를 풀고 있지 않으니…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지만… 분명히 이번 일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계실 거라 여겨져요.”

“하긴… 다른 애들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기는 하더라.”

“오히려 유약하면 유약하지 절대 그런 스타일은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지휘관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너무 사람이 좋기만 해서는 안 되는 자리이기는 하니까. 어린 것과 경험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그런 부분도 시험대에 세워질 거야. 버림 패로 쓰이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전쟁이라는 게 희생 없이 치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마 다들 공감하고 있을걸.”

“…….”

“천재라는 것과는 별개로 아직 지구의 물이 빠지지 않은 핏덩이라는 부분이 제일 걱정된다는 거지.”

마음으로는 부정하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부정할 수 없다. 이미 도열해 있는 병력들의 얼굴에 드리운 불안감은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출정식이네. 나는 이런 거 너무 귀찮더라. 도대체 왜 하는 건지.”

단상 위에서 어수선한 움직임이 보인 것을 확인한 캐시가 중얼거렸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기를 진작시켜야 하기는 하니까.’

“뭐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어쩌고저쩌고 하겠지 뭐.”

“정숙!”

“정숙!”

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윽고 잠잠해지기 시작한 장내에 기수들이 깃발을 들어 올린다.

쿵! 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으로 땅바닥을 두드리는 창병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자.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이기영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

신성력으로 휩싸인 채로 천천히 단상을 걸어 내려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빛으로 만들어진 화관은 긴장감과 공포, 불안과 걱정에 먹혀 버린 감정들을 정화해 주는 것만 같다.

‘뭐야….’

기품 있는 걸음걸이와 손짓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꽃과 풍요의 윌리엄 님과 에밀리아 님을 비롯한 타 패밀리아의 수장들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그밖에 없다.

심지어 저들마저도 로헨의 꽃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야기 속의 성기사단이 성자를 호위하는 것만 같은 광경, 빛으로 만들어진 꽃잎들이 하늘을 수놓으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로헨의 꽃은 지긋이 발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도열한 병력들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분위기에 모두가 할 말을 잃게 되어버린 것만 같다. 어째서 곧바로 단상을 내려왔는지에 대한 의문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저 길을 비켜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홍해가 갈라지듯 병력들이 반으로 갈라진다.

자연스럽게 열린 길을 향해 꽃과 풍요의 성자는 발걸음을 옮기며 모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잊지 않으려 눈을 마주치려 하는 것만 같다.

로헨을 위해 죽어갈 이들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리라.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이들이 희생당할 거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감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눈… 눈이 마주쳤어.’

마치 울음을 참고 있는 것만 같은 눈이었다.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의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길고 긴… 끝이 찾아올 줄 모르는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

“우리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잿빛이 찾아왔습니다.”

“…….”

“이 전쟁은… 이 싸움은 단순히 메인스트림이라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가족, 우리의 생이 걸려 있는 싸움입니다. 저는 로헨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심정으로 이 장소를 지켜왔는지, 이 일상을 되찾기 위해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 저 같은 이들이 안심할 수 있는 로헨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그것은 비참하고 힘든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

“그것은 외롭고 괴로운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

“우리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여러분들의 투쟁은, 로헨을 향한 열망과 열정은 분명 저 같은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뜨겁고도 뜨거웠을 것입니다.”

“…….”

“여러분. 이곳은 우리들의 고향이 아니지만, 우리들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선배들의 남긴 피와 긍지가 로헨에 녹아들었기 때문에 이곳은 우리들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웠기 때문에 로헨은 당신들의, 나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

“로헨은 일부 신들의 유희를 위한 놀이터가 아닙니다. 악마들의 공포와 학살을 위한 놀이터는 더더욱 아닙니다. 로헨은 우리의 삶이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우리의 생이 시작되고 꺼지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피를 흘려야 합니다. 고향을, 터전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

“…….”

“물론 두려울 것입니다. 전쟁과 싸움이 두렵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 역시 두렵습니다. 많은 것들을 잃을까 너무나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삶의 터전을 잃는 것입니다. 제가 고향으로 느끼는 이 장소를 잃는 것입니다.”

“…….”

“함께 싸웁시다. 우리들 모두가 로헨을 밝힐 수 있는 이들입니다.”

“…….”

“저는 여러분들이 잿빛으로 얼룩진 로헨을 밝힐 수 있는 사람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꽃과 풍요의 성자가 정면을 바라본다. 모두의 얼굴을 확인한 이후에는 망설임이 사라졌다는 표정으로 잿빛노을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웃긴 말이지만 로헨의 꽃이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단상 위에서 내려왔을 때와 지금의 모습이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

그의 눈에 깃들어 있는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뒤바뀐다.

우리들만 그에게서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우리들을 바라보며 확신을 얻고 있다.

“여러분들이 로헨을 밝힐 희망의 빛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명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제 앞에서, 제 뒤에서, 제 옆에서 함께 싸워주십시오. 희망의 빛이 로헨에 뿌리 내릴 수 있게 검을 들어 올려 주십시오.”

“…….”

“우리들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며.”

“…….”

“우리의 일상을, 삶을 되찾을 것입니다.”

담담하게 내뱉은 목소리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귀에 들려온다.

뇌 속을 헤집는 것 같은 목소리가 빛의 꽃잎과 함께 내려앉는다.

환한 빛이 다시 한번 터져 나온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른 것 같은 느낌,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악! 지휘관님! 지휘관님! 충성! 충성!”

‘캐시… 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