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55화
작전명은 여명 (4)
-윌리엄 님.
“네.”
-좌표 전송했어요. 지금부터는 제 말에만 집중해 주세요. 다른 건 생각하실 필요도 없어요.
“이기영 님. 전방에….”
-무시하셔도 돼요. 작전은 지금부터 시작….
검은색의 기운이 위를 향해 쇄도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무시해도 된다고?’
직격타에 맞는다면 이기영 님이 계신 지휘부가 반파될 수도 있다. 말은 쉽지만 무시할 수 없을 리 만무,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검을 뻗어 검은색 기운을 베어낸다.
어떻게 생각하면 명령을 무시한 셈이다. 정신이 퍼뜩 들어 막 변명을 쏟아내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
“…….”
-하아… 무시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처음 들어보는 것만 같은 조금은 신경질적인 목소리.
“죄송합니다. 하지만… 방금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째서 저걸 무시해도 된다는 것인지, 도대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뭔지, 익숙하지 않은 수신기가 자꾸만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거 안 되겠네요.
“네?”
-분명히 의심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 깊게 생각하지 말고, 명령을 최우선으로… 라고… 말한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아니요. 처음부터 이런 식이면… 조금 곤란해서….
“…….”
-후우…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 하라면 하지. 이 새끼 은근 실망이네.
“네? 이기영 님?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단… 그럼 믿음을 드리는 게 먼저겠네요. 가벼운 테스트 한번 해볼까요?
“테스트라 하시면….”
-눈앞에 뭐가 보이세요?
들려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전방을 바라본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계속해서 난전을 펼치고 있는 두 집단이었다.
검과 창이 오가고 마물들과 인간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전장. 눈앞에 보인 것은 전쟁터였다.
-걸어가 보시겠어요?
“네?”
-눈을 감고 걸어보세요.
“…….”
-조금 이상한 요구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겐 중요한 부분이에요. 저도 윌리엄 님을 신용하고 싶거든요. 일일이 설명을 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요. 그래서… 지금부터예요. 가능할까요?
“네,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의 말대로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다. 곧바로 눈을 감는다. 순식간에 시야에 깜깜해진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여러 가지 소음들이 더욱더 자세히 들려온다.
“밀어붙여!”
“키에에에에에엑!”
“방어마법! 마법! 사제는 어디 있어?”
“명령 떨어졌어! 이동한다! 우리는 이동한다!”
“전선은 어떻게 해? 분대장!”
“명령이다! 이동!”
“크르르르르륵.”
콰아아아아아아앙!
-멈추지 말고 걸어가세요.
철퍽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피슛 하는 소리와 함께 끈적한 액체가 얼굴에 묻은 것만 같다.
저 멀리서 들려오던 소음이 이제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함과 비명, 괴성과 함성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 느낌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아니, 두렵다는 말이 더 어울리리라.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전장의 한 가운데에 있었으니 어떻게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문득 이기영 님이 아카데미의 모의전에서 보여준 모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보여줬던 쇼맨십과는 달리, 지금 자신이 자리한 곳은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는 전장이었다.
그런 일말의 불안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이유는 그를 믿고 있기 때문.
마음을 다잡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이 새끼들아!!”
“쿠르르르르륵.”
“바다의 가호!”
그리고.
-이제 눈을 떠보시겠어요?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뜬 순간, 거대한 마물의 입이 자신을 덮치듯이 돌진해 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걸으라는 명령이 회수되지 않았으니까.
그때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를 든 거한이 마물이 밀어내는 것이 보였다.
“뭐야.”
“…….”
“여기서 멍하니 뭐 하고 있어? 윌리엄 죽고 싶어?!”
“헨리?”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한 건가?’
“마침 잘됐다. 윌리엄. 여기 좀 어떻게 해봐!”
“아니. 헨리. 내가 받은 명령은 그게 아니야.”
“…….”
“…….”
“아. 그런가? 그럼 조금 이따가 보자고.”
어처구니없는 말에 헨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멍하니 전장을 산책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만큼 이기영이라는 지휘관을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 당연할 것이다. 녀석은 전투가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신기한 상황을 겪어왔을 테니까.
의심은 확신으로, 확신은 맹신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건… 이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리라.
말 그대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주 내에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말 그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누군가 커다란 마력을 쏘아 보내는 것이 느껴졌지만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긴다.
처음에는 몸이 반응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나 다를까 악마들이 쏘아낸 기운은 너무나 허무하게 자신을 빗겨 나간다.
마물들이 뱉어낸 기분 나쁜 독 덩어리들 역시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피해가고 있다.
마법의 벽이 자신을 가로막든, 커다란 신전의 파편이 떨어지며 그것을 가로막든, 전위가 앞을 가로막든 간에 적들의 공격이 이쪽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도대체… 뭐야. 이건… 무슨 마법을 부리고 있는 거야.’
오죽했으면 그가 이상한 종류의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까.
눈에 보이지 않거나 느껴지지 않는 신성력, 혹은 어떤 이능이 자신의 몸에 감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적의 공격이 자신에게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느껴지는 것은 목소리뿐이었으니까.
-이제 믿어주시는 건가요?
“아니요. 저는 이기영 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진짜로 준비되셨나요?
“네.”
-좌표는….
“길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혹시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길이 맞습니까?”
-…….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말을.”
-아니요. 잠깐 놀라서…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으신 것 같아서.
“그렇다면.”
-네. 지금 윌리엄 님이 보고 계신 게 길이에요. 변수만 조정해 드릴 테니 그대로 나아가시면 될 것 같아요.
“예.”
길이 보인다.
자신이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만 같다.
“밀어!!”
“키에이으아아아아악!”
방패로 몬스터를 밀어내고 있는 전사가 만들어준 길, 고위마법이 한바탕 마물들을 휩쓸고 난 이후에 생겨난 길, 신전이 무너지며 자연스럽게 열린 길.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신이 확인한 길이 맞다는 듯이 올라가고 있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주변의 풍경이 빨라지고 있다.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볍다. 마치 전장에 자신과 이기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새인가부터 주변의 소리가 잘 들려오지 않게 됐다.
아니,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더욱더 적절한 표현이리라. 귀로 들려오는 목소리 외에는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길고 넓게 펼쳐져 있는 전장, 자신의 숨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려온다.
발걸음을 내딛는 소리, 검을 뽑고, 휘두르는 소리, 눈앞에 있는 적의 목이 날아가며 허물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적의 주문을 외우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캐스팅을 끊거나 피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아군의 보호마법이 쏟아진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딱 하나였다. 그저 빠르게 목적지로 도달하는 것 하나.
길이 안내하는 곳까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
-움직이세요.
“네.”
-잠깐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지원이 필요한 병력들이 보이네요.
“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즐겁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마치 전장의 신이 된 것 같지 않은가.
아마 지금 자신은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얼마 만인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틀림없이, 바보처럼 웃고 있겠지.
-이제 보이죠?
“네.”
-윌리엄 님은 더 강해질 수 있어요.
“네.”
-제가 느끼기로는 그래요. 좋은 눈을 가지고 있으신 것도 그렇고, 새로운 걸 많이 알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마침내 검에 묻어 있는 혈흔을 한 차례 털어내며 시선을 올리자 이형의 거대한 괴물이 눈에 띄었다.
[우습구나. 어리석은 필멸자여.]
“…….”
[자신의 주제도 모르는 핏덩이가 감히 피와 내장의 할키아스에게 감히 도전하려 하는가.]
고위악마에 걸맞게 오만함이 보인다. 자신이 인간에게 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만 같다.
자신 역시 녀석을 단신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기영 님과 함께라면 가능해.’
그렇게 커다랗게 보였던 녀석이 이제는 작아 보인다.
[죽여주마. 필멸자여. 노을빛의 군주, 악마 21군단의 할키아스에게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렸던 바로 그때였다.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던 녀석이 별안간 땅바닥에 머리를 찍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반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누구라도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갑작스레 땅바닥에 머리를 찍는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건….”
뿐만이 아니라 몸을 웅크리며 덜덜 떨고 있다. 절대로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녀석이 머리를 박고 난 이후였다.
무언가에 영향을 받은 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것만 같다. 점점 호흡이 망가지기 시작할 때 즈음에 녀석이 다시금 입을 열어왔다.
[노, 노을빛의 군주시여….]
“이…기영 님.”
[노, 노, 노을빛의 군주시여… 어, 어떻게 저 같은 미천한 아랫것을… 찾아와 주셨습니까.]
“이건… 저….”
-당황하지 않으셔도 돼요. 윌리엄 님. 21군단장은 마왕성에서 움직일 수 없어요. 아마 메시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네.”
[네. 현, 현재… 로헨의 벌레들이… 제가 있는 도시를…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노을빛의 군주시여. 제발… 자비를….]
“…….”
[눈앞에 있는 인간의 목이라 말, 말씀하셨습니까?]
“…….”
[네. 네… 제, 제 모든 것을 걸고 노을빛의 군주께서 원하는 것을 가져가겠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가져가겠습니다. 그러니….]
피와 내장의 할키아스가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보인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잿빛노을을 받아들이는 것만 같은 모양새.
점점 더 부풀어 올라 거대해지는 몸은 아까보다 더욱더 괴기스럽게 보인다.
단순히 겉모습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노을빛의 군주님께서… 힘을… 크키카카카카아아아악! 힘을! 내려주신다!! 힘으을!!]
“…….”
[나는 피와 내장의 할키아스! 나느으은! 피와 내장의 할키아스으! 키키킥끼키키키킥!]
그 강대한 기운에 몸이 잠깐 굳어 있었을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윌리엄 님. 이길 수 있으세요.
확신을 담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