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56화
작전명은 여명 (5)
“윌리엄 님. 이길 수 있으세요.”
“…….”
“…….”
‘시바 못 이길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레벨 업 할 줄은 생각 못 했는데….
“자신을 믿으세요.”
너무 믿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조금은 의심해야 할 것 같은데….
“…….”
“…….”
순간적으로 윌리엄과 병력을 빼는 건 어떨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에바야. 완전 에바야.’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동료를 잃어버린 꽃기영의 성장, 천재군사와 로헨 연합군 사이에 일어났었던 작은 신경전과 마찰.
모두가 희망찬 미래를 그리게 만들었었던 출정식, 악마군단과의 격돌과 영웅들의 활약,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엑스트라들의 세세한 사이드 스토리들이 모두 이 전장에 녹아들어 가 있다.
꽁지를 내리고 도망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벌여놓은 상황, 이대로 패배한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아니, 내 체면이 문제가 아니다. 희망차게 내디딘 한 발자국이 미끄러진다면 로헨을 다시 도약할 힘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전장에 선 이들의 표정만 봐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가.
‘시바.’
이 새끼들 질 거라고 생각 안 하고 있자너. 기대도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너무 기대하고 있는 것 같자너.
“꽃과 풍요의 성자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 모두 힘을 내도록!”
“예스! 캡!”
“예스!! 캡!!!”
환희에 찬 얼굴들,
“밀어붙여! 조금이다! 이제 조금이야! 이 멍청이들아!”
“그래요. 이제 한 걸음이에요. 캐시.”
“내가 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씨발! 이길 줄 알고 있었다고!”
“이게 로헨이다. 이 악마 새끼들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인류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표정들.
출정식 전 까지만 해도 희망이고 나발이고 없었던 놈들은 패배 자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당장 슬로건으로 내건 작전명만 해도 여명이 아니었던가.
희망의 불씨를 이제 막 태우기 위한 스토리텔링에서 어떻게 회군이 있을 수 있을까.
‘차라리 전부 뒈지는 꼴이 있어도 희망의 불씨는 살려야 돼.’
윌근본이 몸이 부서지고 폐인이 되더라도 무조건 이겨내야 하는 상황.
“윌리엄 님은 이길 수 있으세요.”
-네. 이기영 님.
출혈이 조금 뼈 아프기는 하지만 윌근본 하나로 희망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면 대충 수지가 맞는 장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이쪽 지역 관리자를 처리한 게 아니라 엄연히 노을빛의 군주의 힘을 받은 피와 내장의 할키우스를 상대하는 일이었으니까.
할키우스의 상태를 보면 김현성 역시 충동적으로 큰 출혈을 감수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충동적으로 소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자너.’
소환사태, 메인스트림, 그리고 인간 공장으로 얻은 수익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들어갈 비용 역시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괜히 남은 2마리의 대군주들이 김현성처럼 날뛰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21군단의 소환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노을빛의 군주의 소환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27군단 때 벨리알이 움직이지 못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악마든 신이든 소환의식으로 대륙에 떨어졌다면 행동하는 모든 것에 막대한 비용이 부과되는 것이 국룰.
김현성 정도의 거물이라면 시스템이 상정한 세금도 부과된다. 대륙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 하나하나가 전부 비용이라는 거다.
내가 21군단을 지휘했었다면 일단 내실을 다지는 것에 집중했을 것이 분명, 우리 현성이 입장에서는 내실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내실은 다지고 움직였어야 했어.’
잿빛노을 지역을 무분별하게 넓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 대군주의 영역까지 침범해 전쟁까지 일으키려고 하는 상황.
간이 10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악마전쟁에서 이길 거라는 보장도 없고, 영역을 넓히는 투자가 계속해서 성과를 거둘 거라는 보장도 없다.
이 두 개에만 집중하기에도 모자란 타이밍에 웬 개뼈다귀 같은 놈에게 세금까지 무시하며 많은 비용을 투자했으니 이쪽 입장에서는 오히려 호재인 셈이었다.
[노을빛의 군주님의 히히히힉! 위대함을 맛… 맛보거라! 어리석은 필멸자들이여!! 키키킥키키키킥!]
‘이 새끼 완전히 미쳤나 봐.’
[노을빛의 군주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나르을! 나를 지켜봐 주고 계신다!! 키카키키키킥!]
‘왜 이렇게… 킥킥대?’
[노을빛의 군주께서! 피와 내장의… 할키아스으를 지켜봐 주고 계신다!!!]
문제는 지금 당장 이걸 소화시키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윌근본이 로헨 대륙의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피와 내장 어쩌고에게 평균치보다 높은 힘을 부과한 것처럼 보인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몸, 단순히 근력과 마력이 뻥튀기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모든 스탯이 상승한 것처럼 보인다.
징그러운 외관은 더욱더 징그럽게 변했고 심지어 고유능력도 개화한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평범한 고위악마에 불과했던 녀석이었지만 지금은….
‘도노반?’
27군단 사천왕 중 최약체였던 도노반. 우정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녀석보다 조금 더 강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당시에는 1차 각성 김현성이 새로 배운 노을빛 베기로 녀석을 해치울 수 있었지만 윌리엄에게는 아직 그런 것이 없다.
그래도.
“상대는 불안정한 상태예요.”
-네.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본인이 소화시킬 수 없는 힘을 부여받았어요. 정신은 이미 망가졌고, 육체도 마모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직… 새로운 힘에 적응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요.”
-예.
[짓이겨주마! 더러운 벌레 같은 놈!! 키크크큭키킥!]
힘에 취해 휘두를 뿐인 주먹이었지만 평범한 플레이어에게는 그저 그런 공격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공기가 찢어지는 것처럼 들려오는 파공성.
압도적인 힘, 상상하기 힘든 속도와 범위, 거대한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온 피와 내장들이 철퍽거리며 닿는 모든 것들을 부식시킨다.
액체 형태로 이루어진 공격은 검사가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공격 중에 하나다.
나만 없었다면 말이다.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 빠르게 의사를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퀘스트로 회피 루트를 보내고.
[도망 다니는 꼴이 쥐새끼 같구나! 키킥! 키키키키킥! 공포에 떨다 죽어라!]
공격 루트도 안내한다. 몸이 커진 만큼 때릴 수 있는 범위는 넓다.
[간지럽구나! 간지러워! 이게… 이게! 노을빛의 군주님의 힘인가!]
“공격하실 때마다 떨어져 나오는 살점에 주의하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기영 님.
“장기전이 될 거예요.”
-네.
‘이거… 이거 되겠어.’
할키우스 놈 생각보다 더 멍청해.
멍청했기 때문에 여기서 집 지키는 개 노릇을 하고 있었겠지만 잿빛노을 파워를 섭취한 이후에는 백치와 비슷한 상태가 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힘에 취해 분별없이 팔을 휘두르는 모습, 전투패턴 자체도 단순한지 몸을 던져 깔아뭉개기를 시도하거나 본인의 내장을 집어 던지는 원시적인 전투 형태를 고수하고 있었다.
물론 넓은 범위로 떨어지는 산성들이 재앙처럼 느껴졌겠지만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심지어 녀석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쯤은 김현성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현성아. 투자를 할 때는 잘 알아보고 하라 이 말이야. 기분 나쁘다고 투자하고 기분 좋다고 투자하고 그러면 안 된다니까?’
[짓눌러주마! 나는… 피와 내장의 할키우스! 피와 내장의 할키우스!]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자신의 공격이 먹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몸의 너비를 점점 키워온다.
마치 해일처럼 보이는 듯한 공격, 피와 내장의 파도가 윌리엄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지만 너비가 커진 만큼 얇아졌다.
[노을빛의 군주께서 나를… 신뢰…하시고… 계신다.]
“충분히 뚫어낼 수 있으세요.”
이번에는 확신이었다.
찌르기는 녀석의 특기였으니까.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검술의 준비 자세를 펼치는 녀석, 검을 든 손을 살짝 뒤로 뺀 한 발을 내디딘다.
느리게 보였지만 순식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빠른 움직임. 찌르는 검과 하나가 된 것처럼 녀석이 마력을 온몸에 감싼 채로 피와 내장의 파도를 뚫어내고 있었다.
피부가 조금 녹아내릴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던져볼 만한 한 수였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파도에 균열이 생기며 윌근본이 반대쪽으로 튀어나온다.
연출하기에 따라서 꽤 멋있게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었지만 꾸밈없는 근본은 폼을 잡을 생각도 없다고 판단한 모양.
곧바로 검을 바로 잡은 이후, 어느샌가 다가온 붉은색 가시들을 뚫어내기 시작했다.
[간지럽다. 간지럽단 말이다… 나는… 피와 내장의… 할키… 벌레 같은 노옴!!]
“이길 수 있으세요.”
-네.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신을 믿으세요.”
-네.
근데 네 화력으로는 결정타를 날리지를 못할 것 같네.
괜찮아. 다구리 치면 되니까.
할키우스와 윌리엄이 서로 뒤엉킨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상황, 전장은 계속해서 격변하고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윌리엄과 집중하고 있었던 할키우스와는 다르게 유능한 꽃기영은 세인트 벨의 전장도 차근차근 잡아먹고 있었거든.
“로헨이 아직 지지 않았음을 악마들에게 똑똑히 보여줘라!”
“꽃과 풍요의 성자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너 할키우스 같은 대사 치지 마.’
“빛이여! 빛이여!”
곳곳에서 사제들이 외우고 있는 정화주문들이 터져 나온다.
이쪽 역시 다르지 않다. 꽃 폼으로 전환한 이후에는 잿빛노을을 밀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신성력을 뿜어낸다. 모두들 꽃기영의 직접적인 등장에 힘을 얻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제들이 목이 터져라 주문을 외운다. 세인트 벨에 있는 신전 곳곳에서 빛기둥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
“빛이다! 빛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
흥분한 게니우스들의 목소리들도 계속해서 터져 나오고, 로헨 떨거지들의 함성 소리가 귀가 터질 듯이 들려온다.
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곳곳에서 뿜어져 나온 빛기둥이 점점 잿빛노을을 몰아내고 있다.
세이프티 존이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었지만 절대로 걷히지 않을 것 같았던 우중충한 노을이 걷히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게… 여명.”
“희망은 이곳에서 시작될 거예요. 캐시.”
“응. 나도 보고 있어. 알레리아.”
“이 장소는 분명히 역사 속에 남을 거예요. 꺼진 빛이 다시 켜진 곳으로요.”
그리고,
이제는 윌리엄에게서 시선을 뗀 할키우스가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로 말이다.
아마 김현성이 녀석의 몸을 빌려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너.]]
‘현성아? 멀리서도 보였어? 그런 건 어떻게 했어? 그런 것도 할 줄 알았어?’
[[기영 씨가 아니구나.]]
‘어?’
“…….”
[[…….]]
‘뭔 소리야… 이 새끼는.’
[[넌… 누구지?]]
“…….”
[[넌 누군데… 기영 씨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너무나 뜻밖의 개소리에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넌. 누구야.]]
“…….”
[[…진짜 기영 씨는 어디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