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159화 (1,15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59화

의혹 (3)

만약 내가 이전에 만들어놓은 더미기영이 맞다면 더미월드 때의 기억이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더미현성을 비롯한 더미월드의 모든 것들을 떠올려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지금의 이쪽에게, 그것들은 프로그램 덩어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아예 새로운 개체를 만들었다는 가정도 할 수 있겠지만 전자나 후자나 결과는 같다.

꽃기영을 로헨에 고립시키기 위한 것.

네게 남은 건 이것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수단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리라.

‘미친놈들.’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이 건에 대해 이야기했을지 생각해 보면 기가 차 말도 나오지 않는다.

본인들의 입맛에 맞고, 반항할 수 없는 완벽한 인형을 만들어냈다. 당장 내가 느끼기에도 손발이 묶인 듯한 느낌이지 않은가.

꽃기영은 김현성, 정하얀을 비롯한 이들에게 손을 댈 수 없었고….

내가 진짜 이기영이라는 일말의 가능성도 열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쪽이 진짜 이기영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스스로에게 장난을 치는 것은 예전에도 한 번 해본 일이었고, 짭기영론 보다는 개연성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 찐기영론도 생각해 봄 직하니까.

무엇보다 로헨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족쇄에 걸렸다는 게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시바. 시바. 시바.’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고 여기게 된다.

유희처럼 느껴졌었던 로헨에서 맺은 인연들에게 집착하게 된다는 게 당황스럽다.

오죽했으면 녀석들이 이 몸을 설계할 때 감정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까.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거야.’

대륙에서 얻은 내 것이 이제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공허함, 애초에 내 것이었던 적도 없었다는 불안감이… 이런 상황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제길….”

“이기영 님.”

“…….”

“이기영 님?”

“…….”

“윌리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이기영 님?”

벌컥 문을 열린 것은 바로 그때.

자연스레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윌리엄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괜찮… 괜찮으십니까?”

‘뭐가?’

“…….”

“네?”

조금 일그러진 표정이 눈에 띈다. 녀석의 얼굴에 당혹감이 감돈다. 그만큼 이쪽의 상태가 안 좋아 보일 수도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녀석 나름대로 이유를 찾고 있는 듯한 느낌, 어째서 내가 몇 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은 비통해 보이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이 뭔가 병신 같다.

위로에는 소질이 없는지 한참이나 이쪽을 살펴보던 녀석은 조용히 눈치를 보며 방 안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깨진 창문이나 유리 잔 같은 것들, 그나마 멀쩡했던 신전 안인 것 같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방 안이 꽤 엉망인 것처럼 보인다.

신학서적들이 갈기 갈기 찢긴 채로 널브러져 있었고 방 안에 성한 게 별로 없어 보였다.

마치 누군가 히스테리라도 부린 것 같은 모양새.

이런 곳에서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으니 걱정하는 게 당연하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녀석을 맞이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고 느껴지는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일단은 아까의 스탠스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처연하고, 사연 있는 것처럼, 슬프고, 뭔가에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는 섣부르게 이쪽을 위로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유를 묻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녀석이 말을 꺼낸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직후, 어색한 침묵에 내가 다 불편함을 느낄 즈음이었다.

“이기영 님.”

“…….”

“제 입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

“제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

“물론 한참 과거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저 역시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몇 번이나 무너져 본 경험이 있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조금 방탕한 생활도 했었고…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한때는… 알콜 중독 문제를 겪은 적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근본은 아니었구나. 근데 알콜은 안 된다. 그거 위험한 거야.’

“플레이어이기 이전에 지구의 인간으로서 로헨은 너무나 외로운 곳이더군요. 마치 저 혼자 세상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이었으니까요.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도, 서로를 다독여 줄 수 있는 이들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럴 만해….’

“상투적인 말이지만 꽃과 풍요를 만난 이후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소속감이 이런 환경을 이겨내기에는 무척 중요하더군요. 가족 말입니다.”

“…….”

“네. 저는 그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고, 그들도 저를 가족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그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저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미래에 대한 꿈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기쁨, 슬픔, 아픔을 공유할 수 있다는 이들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

“사연을 나누어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구나 각자의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기영 님. 슬픔을 나누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이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나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제가 맞는 판단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지금 이기영 님께서 힘들어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

“이기영 님이 꽃과 풍요의 가족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윌근본 너….’

“그저 그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마. 기대고 싶어지자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튀어나오자너.

슬그머니 손을 내미는 것이 보인다. 본인의 설득이 먹힌 것 같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

분하지만 정말로 어느 정도는 먹혀든 것 같다. 평소였다면 콧방귀를 뀌며 넘어갔겠지만 저 손길을 외면하는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째서 이러는지에 대한 이유도 묻지 않은 채, 그저 슬픔에 공감해 주겠다고, 당신은 우리의 가족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어떻게 저걸 외면할 수 있을까.

심지어 녀석으로서도 의혹이 생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23살의 꽃기영이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할키아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그저 넘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진짜 이기영은 무엇인지, 이 사람이 21군단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마왕을 관통하는 커다란 키가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이쪽을 몰아붙이듯 취조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역시 근본은 근본이야.’

녀석이 그만큼 이쪽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처음에는 혼자였습니다. 이기영 님.”

당연히 손을 잡는 것이 맞는 선택지, 너무 청승을 떠는 것도 보기 좋지는 않다. 일단 세인트 벨을 정리해야 했으니까.

“…….”

“…….”

“지… 지금 당장은 말씀드리기 쉽지 않아요.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모두 단편적인 사진들 같은 느낌이라….”

“꼭 이기영 님이 겪고 계신 일들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윌리엄 님. 그저… 지금은 믿어달라는 것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이미 믿는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네… 분명히… 그러셨죠.”

“이기영 님께서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시면 됩니다. 무슨 일이 있든, 어떤 일이 생기든 간에 꽃과 풍요는 이기영 님을 지지하고 그 옆에 있을 겁니다.”

‘너 이 새끼 진짜 왜 이렇게 감동을 줄려고 그래.’

원래 약해져 있을 때 이러면 거절하기 힘들자너.

머릿속이 복잡한 것은 여전했지만 일단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건 간에 이쪽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흐름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그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윌리엄 님. 현재 세인트 벨은….”

“이기영 님이 말씀하신 대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농성 준비하고 있어?’

“미리 살펴주셨다니 안심이 되네요. 아무래도… 이곳은 로헨 최후의, 아니, 인류 최후의 보루가 될 장소이니만큼….”

“예. 기술자들과 마법사들, 석공들이 빠르게 성벽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약간의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분위기도 무척 고무적입니다. 작은 승리지만 이 걸음이 그 어떤 것보다 큰 발자국이라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느꼈다니 다행이네요.”

“더불어….”

바깥으로 나가자 이번 작전의 중요인사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윌리엄 쪽을 바라보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래야지. 내가 보여준 게 있는데.’

“대승이었습니다. 이기영 님. 하하하하핫. 대승입니다.”

“그리 느끼셨다니 다행이군요.”

“처음에는 세인트 벨 탈환 작전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결국 꽃과 풍요의 성자께서 자신을 증명 하셨군요.”

“…….”

“병사들도 모두 이기영 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헹가래라도 쳐주게?

그럴 만도 해. 전쟁영웅이잖아.

생환한 병사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다가오는 것을 상상하면 조금은 기분 전환이 될 것 같기도 했지만….

“저… 윌리엄 님.”

“네.”

“도시 앞에… 아니…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적의 사자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런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이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좁은 복도를 빠져나간다.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다. 뭔가 심각한 일이 터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놈들은 없다.

‘사자?’

이쪽 역시 마찬가지.

물론 세인트 벨은 잿빛노을 지역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게 완전히 이 곳을 보호해 준다는 약속은 되지 않는다.

김현성 측에서 어떤 걸 준비했든 간에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피드백에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겁게 올린 발걸음.

이제 막 지어지기 시작한 낮은 성벽에 올라 정면을 바라보자.

“…….”

오랜만에 보는 얼굴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선희영….’

긴 수녀복을 입고 조용히 손을 모은 모습. 이전과의 차이점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땅에 끌릴 정도로 길어졌다는 것.

아니, 저건 머리카락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검은 신성력의 폭포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흑색의 무언가가 찰랑거리는 것이 보인다.

아마 모두가 내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저건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알 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쪽은 반가운 마음이 앞서기는 했지만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조금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

선희영은 마치 나를 벌레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무가치한 것을 쳐다보는 표정으로 말이다.

[…….]

“…….”

[꽃과 풍요의 성자를 바치십시오.]

“…….”

[그리하면 노을빛의 군주께서 당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