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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60화 (1,15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60화

의혹 (4)

[꽃과 풍요의 성자를 바치십시오.]

“…….”

[그리하면 노을빛의 군주께서 당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시바….’

짙은 혐오감이 깃들어 있는 표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 속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하고 차오른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번 사태를 지켜보자고 생각했지만 마냥 이성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지가 않은 상황, 예상하기는 했지만 입안이 쓰다.

‘어떻게 확신하고 있는 거야? 아니, 어떻게 이걸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이미 저쪽에서는 확정된 사안인 건가?’

아마 김현성의 보증이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이쪽의 육체를 빼앗고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저렇게 반응할 만하겠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난 다 가지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쌓아왔는지 전부 다 알고 있는데….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상관 없는 걸까.

반문해 봤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본질이 타인이라면 이미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다.

단순히 흉내만 낼 뿐인 인형으로 느껴질 테고, 경우에 따라서는 분노마저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모종의 사건으로 원본이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라 착각한다면 더욱더 그리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기영 본인이 직접 더미를 대신 내세웠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건가? 시바. 이미지 메이킹을 너무 잘해둔 부작용인가?’

“…….”

아주 잠깐 호흡을 가다듬은 것은 당연지사. 굳이 동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당장 고민해 본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짭기영론이 우세하다고 여겨지는 시점이기는 하지만 명확하게 고개를 끄덕일 만한 상황은 아니다.

불쌍한 자기위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근거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들이 없다.

물론 몇몇 정황들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진짜면 너희들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진짜?’

두고 봐. 정말로 용서 안 할 거임.

괜스레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선희영이 다시 한번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21군단의 입장을 표명하기에 앞서, 우리들은 결코 로헨의 인류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지금까지 로헨에서 일어난 일들은 전적으로 저희들의 작은 오해였으며, 노을빛의 군주님께서는 위 지역에서 일어난 참사에 강한 유감을 표시하셨습니다.]

‘현성이가 강한 유감을 표시할 리 없자너. 저런 표현을 쓸 리가 없자너….’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저희 21군단은 언제든지 귀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꽃과 풍요의 성자는 양측에서 생긴 작은 오해를 풀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일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도, 저희 군단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 21군단은 로헨의 인류의 손을 들어 줄 수도, 손을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노을빛의 군주께서도 더 이상의 무의미한 싸움과 희생을 우려하시는바, 저희들은 이 문제를 폭력이 아닌 대화와 관용으로 풀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현실적인 판단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담담하고, 이성적으로 말을 내뱉고 있는 선희영의 주장과는 다르게 김현성이 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느껴진다.

구태여 보지 않아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은 느낌. 아마 극도로 흥분한 김현성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말이 내부에서 나왔을 것이 분명하리라.

피와 내장의 뭐시기에게 빙의했을 때만 해도 제정신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김현성 폭주고 나발이고 군단 재정도 말이 아닐 것 같자너.’

군단 입장에서도 일을 너무 크게 벌였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을 것이다. 북벌을 위해 위로 향하지만 않았어도 제법 여유가 있었겠지만 21군단 측에서도 양쪽에서 새는 수도꼭지를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 있는 여력이 없다.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이후 뒤처리에 대해서는 골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는 상황, 내실을 키울 시간이 없었기에 드러나고 있는 부작용이었다.

나였어도 이런 종류의 개수작을 활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간에 논란을 야기하기에는 충분한 상황이었으니까.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희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꽃과 풍요의 성자를 넘기는 것.]

“…….”

[다만 두 번째는 없다는 것을 명확히 공고해 드리겠습니다. 군단의 호의를 배신한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로헨의 작은 승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곳의 승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승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을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은 저급하고 무지몽매한 악마의 실패이지 군단의 실패가 아닙니다. 군단의 힘은 명백하게 로헨 인류의 머리 위에 있습니다.]

선희영이 조용히 손을 모은다. 그녀의 흐르는 머리카락이 점점 일대를 잠식하는 것이 느껴진다.

부드러움과 자애로움을 가지고 있었던 두 눈은 싸늘히 식어가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두 눈에 들어선 것은 악의와 증오, 무엇을 향한 악의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광기에 가까운 악의에 세인트 벨의 전체가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의 털이 쭈삣쭈삣 서는 것 같은 느낌. 오랜만에 바라보는 저런 눈빛이 소름 끼친다.

“…….”

“…….”

종국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눈으로 중얼거린다.

[호의를 배신한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래… 쟤도… 한 성깔 하기는 했어….’

[일주일.]

“…….”

[유예기간은 일주일입니다.]

이질적이다. 아마 모두가 그리 여기고 있을 것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는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다.

검은 신성력의 늪에서 언데드들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뼈만 남은 스켈레톤들이 아니라 기형적인 모습을 한 시체들이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공간을 가득 메운다.

우리 쪽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이명이 무엇이었는지 새삼스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

“케에엑….”

“케키케에에에에엑!”

버림받은 자들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몸을 일으키고 있다. 보고 있는 게 질릴 정도로 그 수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는 모습은 이성적인 판단을 상실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키에에에에에에게에에에에엑!!”

검은 수녀는 다시금 손을 모으고 있었다.

앞으로 죽어갈 이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이다.

‘시바. 시바. 얘들아 나 버릴 거 아니지?’

“…….”

‘윌리엄, 에밀리아. 나 버리지 않을 거지? 지켜줄 거지?’

저기 가는 건 말이 안 돼.

저기 가서 무슨 대우를 받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저기로 넘겨지는 건 흐름에서 이탈하는 일이야. 적어도 이 흐름에서 이탈하는 건 절대로 안 돼.

‘누가 뭐라고 말 좀 해봐.’

“…….”

“…….”

‘제발 누가 뭐라고 좀 해봐.’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들, 할키우스와는 질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직후에야 떨거지 한 명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어오는 것이 보였다.

“…….”

“…….”

“일, 일단…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좋겠군요.”

‘무슨 대책?’

“무슨 대책을 논의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근본아. 처음부터 그렇게 싸늘하게 나올 필요 없어요. 쟤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설마 미쳤다고 꽃기영을 제물로 내몰겠어?’

“논의할 게 있습니까?”

“아니… 그것은 아니지만… 방금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언데드 하며… 그… 그… 이상한 수녀를 말입니다. 시체들로 산맥을 만들 정도더군요. 대책 논의라 함은 당연히… 이기영 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세인트 벨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 향후 방향성에 대한 논의를….”

“…….”

“…….”

이 새끼들 눈치 보는 것 좀 보세요.

‘특히 아까까지만 해도 알랑방귀 뀌려고 대기하고 있던 놈들, 그래 시바 너희들은 진짜 소름이다.’

당연히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은 아니다. 사실 타이밍이 오더라도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세인트 벨 작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23살 꽃기영을 어떻게 팔아넘기자 말할 수 있을까.

어지간히 사회성 없는 또라이가 아니라면 곧바로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 제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떨지 고민하는 시간도 길어질 거야.

대충 보기에도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은 표정들이었으니까.

본인들이 어떤 것들을 상대하고 있는지, 승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난간을 헤쳐나가야 하는지, 드디어 알아차린 것이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기영 님.”

“…….”

“저런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래?

‘사실 말도 안 되는 요구인 것도 맞아. 쟤네들이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윌근본이 근본선언문을 외우자 아니나 다를까 들고 일어서는 떨거지들이 보인다.

“당연히 지켜드려야지요. 누가 뭐래도 이기영 님은 로헨의 보물이 아닙니까.”

“아무래도 악마 놈들이 겁을 집어먹은 모양입니다. 하하하. 이기영 님께서 플레이어들을 잘 이끌어 주시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기영 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주일이나 시간을 벌었다는 게 다행이군요. 우리들에게는 기회고, 저들에게는 악수입니다.”

근데 너희들 왜 불안해하는 것 같니.

물론 이쪽 입장에서는 고마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리라.

‘내가 그동안 인간불신에 걸렸었나 봐.’

벌써부터 초조해하는 놈들도 분명 보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가 이쪽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로헨이 하나가 된 것 마냥 서로가 서로를 독려하고 있지 않은가.

죽어도 악마들과는 타협하지 않을 거라 외친다든가. 끝까지 세인트 벨을 지켜내겠다든가 하는 고성 소리가 들려왔다.

분수에 맞지 않게 큰소리를 외치는 놈들도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두가 23살의 꽃기영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나 된 로헨.

“세인트 벨은 절대로 지지 않을 겁니다.”

나아가는 희망.

“언데드들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 봐야겠군요. 짧은 시간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원하고 원했던 뭔가 되는 분위기.

하지만 그 기대감 역시 박살이 날 수밖에 없었다.

“…….”

“…….”

“…….”

“…….”

대충 8시간 정도가 지난,

“윌리엄한테는 안 들켰지?”

“쉿. 오빠. 입 좀 닥쳐.”

“정말 악마 새끼들이 우리를 받아 줄까?”

“아니. 입 좀 다 물라니까.”

야심한 시각 새벽 3시 29분 즈음.

23살 여린 꽃기영의 침소에 침입한,

복면을 쓴 괴한들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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