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61화
의혹 (5)
‘참 이 새끼들도 너무한다. 진짜… 너무해.’
어디를 가나 기회주의자들은 있게 마련이었지만, 고작 8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렇게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모두가 하나 된 로헨의 온기가 식기도 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한편으로는 이곳에 찾아온 이 새끼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21군단이 보여준 공포 때문에 일을 벌인 것도 있겠지만 아마 이렇게 움직인 근거는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다소 이성적으로 말을 꺼낸 선희영의 전략이 먹혀들었고, 최소한이지만 협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놈들을 이곳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 분명했다.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대충 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명 작전 전부터 이쪽에게 호의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왔던 놈, 승전에 기뻐하며 손바닥을 비벼가며 아부를 했던 놈들.
애초에 말단 놈들이 꽃과 풍요의 눈을 속이고 이곳으로 올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별 볼 일 없는 놈들로 구성하지도 않았겠지.
담담한 표정을 보이는 와중에도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하… 이 쓰레기 새끼들 이거.’
“…….”
“깨어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제길.”
“…….”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소리 지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기영 님….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기 싫다면 말입니다.”
“…….”
‘그래도 정관예우는 해주려고 하나 봐.’
무식하게 입을 막으며 곧바로 납치를 진행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또 아닌 모양, 무척 당황하고 있는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이쪽이 깨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 컸겠지만 아마 그것보다는 꽃기영이 의연한 태도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이유가 더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려고 했다면 곧바로 우악스러운 손길이 이쪽을 덮쳤겠지만,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으로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보이는 꽃기영의 얼굴을 본 순간 계획이 망가졌음을 직감한 것처럼 보였다.
민망한 침묵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녀석들은 서로 눈치를 살필 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미담 각이다.’
전쟁터에서 피어나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오래오래 전해질 수 있는 감동실화.
죄를 저지르러 온 범죄자 새끼들에게 교훈을 준 것으로 모자라 그들을 용서한 성자의 서사 중 하나로 들어가기에 충분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수면마법으로 재우거나… 기절을 시키거나. 여기서 이럴 시간도 없어. 빨리… 움직여야 된다고….”
이빨을 털 수 있는 타이밍이 지금이 아니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소용없을 거예요.”
“허튼짓하지 마십시오. 이기영 님.”
“당신들이 이곳에 온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이러지 말고 일단 데려가자니까? 제길. 괜히 말 섞지 말자고….”
“악마들은 결코 인간들과 타협하지 않아요. 저를 데려가든, 데려가지 않든 간에 그들이 로헨을 침략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들 역시….”
“입 다물어, 이 새끼야.”
“조금만 더 이성….”
“재잘재잘. 재잘재잘. 혓바닥은 길어가지고… 이 새끼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로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햇병아리 같은 새끼가… 뭘 안다고….”
‘시바. 미담 각은 개뿔.’
아무래도 양아치 같은 새끼 한 명이 끼어 있는 것 같다.
“분명히 폭력은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런 게 뭐가 필요해? 어차피 이 지랄 하고 여기 온 이상 우리는 끝난 거야. 여기서 죽든지, 저기 가서 죽든지 하나라고. 나는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높은 곳에 걸어보려는 거야. 너도 봤잖아. 그 언데드… 여기서 전부 개죽음당하고 싶어?”
“…….”
“로헨도 지킬 수 있을지도 몰라. 출정식에서 이 자식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는 우리 고향이라고. 여기 있는 이 햇병아리가 우리 마음을 알 것 같아? 이 새끼는 아무것도 몰라. 여기 온 지 1년도 안 되는 놈이 우리 심정을 어떻게 알겠냐고. 가족들은… 친구들은… 자식들은… 전부 어쩔 건데… 이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야. 차라리 이러는 게 나아. 뭐 하나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내 말이 틀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전부 살 수 있는 길을 택한 거라고.”
“…….”
“까놓고 이야기하자, 우리. 여기 이 햇병아리가 중요해? 아니면 로헨이 더 중요해?”
“…….”
“…….”
‘설득당할 거야? 겨우 저걸로?’
“죄송합니다. 이기영 님.”
‘진심이야?’
“이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저희는 로헨의 멸망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뭔가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아니, 떨어지지 않는다기보다는 이 양아치가 계속해서 입을 막고 있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진짜 외지인 서러워서….’
로헨 텃세 무섭네 무서워. 무섭다 못해 괜히 센치해지자너.
전체가 아닌 일부의 의견이다. 그중에서도 쓰레기 같은 놈이 내뱉는 개소리였지만 꽃기영이 로헨의 일원이 아니라는 소리가 거슬리기는 했다.
물론 원래부터 소속감이라고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짭기영의 입장에서는 마음 붙일 곳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21군단으로 향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흐름을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직접 가서 부딪쳐 보는 게 문제 해결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김현성과 대화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선희영하고는 말이 통할지도 모르지.’
이성을 되찾은 그녀에게 상황을 잘 설명한다면 조금은 태도를 바꿔줄 가능성도 높다.
‘아니.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설정상 지금의 꽃기영은 기억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기억에 혼선이 있다 정도로 끝내는 게 좋지 않을까. 이기영과는 별개로 파란은 기억의 구슬을 찾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기억 구슬이 돌아오는 대로 조금 씩 정보를 풀고, 이후 방향에 대해 함께 토론한다면 그나마….
일단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 무리하면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선희영을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선다.
간단한 인식저해 마법과 눈을 가리고 있는 천 때문에 제대로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몸은 계속해서 어디론가 옮겨지는 느낌이 드는 중.
그렇게 한참이나 달리고 있었던 때였다.
쿠웅!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
“뭐야! 뭐… 뭐야… 갑자기….”
“아?”
“저…기… 저희는….”
“전투 준비… 전투 준비해! 제기랄!”
쿠웅!!
콰드드드드드득!!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도망쳐! 제기랄!!”
“제길… 제길!!”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디론가 굴러떨어진다. 나를 붙잡고 있는 놈 중 한 명이 이쪽을 놓친 것이 분명한 상황.
정신없이 몸이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정의는 승리하자너.’
뒤늦게 찾아온 추격대에게 발목을 잡힌 걸까?
아니면 하얀이?
윌근본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나?
그게 아니라면 이미 내가 잿빛노을영역에 발을 디딘 것일 수도 있다. 저 멍청한 놈들이 임무를 완수한 이후 팽 됐다고 봐야지.
선희영이라면 이 새끼들 참교육하는데 전혀 거리낌 없었을 것 같고… 애초에 저 약속을 믿는다는 것부터가 멍청하다는 증거라고 봐야지 뭐.
“으아아아아악!”
“살려… 주십시오. 저희가….”
“꽃과 풍요의 성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분명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겁니다. 꽃과 풍요의 성자를….”
“꽃과 풍요의 성자를 데리고 왔단 말입니다! 제길!”
“제기랄!!”
“…….”
“…….”
점점 들려오지 않게 되는 목소리, 죽은 건지, 죽지 않은 건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상황이 대충 정리가 된 것처럼 비쳐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쪽을 안아 드는 것이 느껴진다. 들려오는 대화를 생각해 보면 정하얀이나 윌근본, 로헨 쪽 인사들은 아닌 것 같고…
혹시 현성이가 찾아왔나? 갑작스레 이쪽이 찐기영이라는 걸 깨닫고 회개하러 온 건가?
이후 천천히 안대를 벗겨내는 손길.
깜깜했던 시야가 걷히자 위기에서 이쪽을 구해준 이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혜지니?’
“…….”
온몸을 갑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 푸르스름한 색의 투구가 안면을 가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나를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등 뒤로는 길다란 창이 매달려 있었고, 체형 역시 익숙하다.
‘혜진이 맞아?’
“당…신은….”
‘구하러 와준 거구나. 네가.’
“…….”
갑주를 입고 있는 인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이쪽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땅바닥으로 내려놓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넘어질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행동들이 전부 조심스러웠다.
‘너….’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었지만 누가 보기에도 이쪽을 아끼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지금 이 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지도 않은 모습.
말하는 방법을 까먹은 것처럼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말을 걸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넌… 더미였구나.’
물론 이것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일단 눈으로 보이는 증거가 너무나 명확하다는 게 그렇다. 단순화 된 패턴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대로 된 육체를 부여받지 못한 것같이 느껴진다.
저 갑주 안에 육체가 있는 것인지도 의문스러울 지경, 대화를 할 수 없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녀 쪽에서 입을 닫고 있는 건지… 의뭉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쪽을 바로 세운 그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내가 조금 민망해질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
그녀는 손을 들어.
어깨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내 얼굴을 확인한다.
조금씩 조금씩 손이 떨리는 것 만 같다. 따뜻한 손대신 차가운 갑옷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지금까지 받았던 일들로 받은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금이지만 마음의 안정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조혜진은 이쪽의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야 왜 그래. 적응 안 되게….’
이번에는 뺨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
손바닥을 뺨에 얹은 채 엄지손가락을 계속해서 움직이며 볼을 어루어 만진다.
‘어떻게… 얘… 얘 나 좋아하나 봐.’
물론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더미혜진으로 추측되는 상황이지만 더미의 데이터 기반은 원본이 아니었던가.
혹시나 조혜진이 김현성을 좋아한다는 것도 전부 연막이 아닐까. 이기영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한 작전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결국 친구를 사랑해 버리고 만 것일까.
“…….”
“…….”
강아지가 뺨이나 손을 핥아주는 것처럼 굉장히 정성스럽게 얼굴을 어루만지는 모양새.
웃기지만 갑옷 뒤에 있는 얼굴이 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
“…….”
‘혜진아… 너… 나 좋아해?’
남모르게… 사랑을… 키워왔던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