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63화
내실 (2)
설정이 조금 과하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다.
천재기는 천재인데 천재인 걸 나는 또 제대로 몰라, 1티어 게니우스라고 부를 수 있는 꽃과 풍요의 여신이 아끼는 선택받은 성자고, 인성은 말해 뭐해 천사나 다름없지.
꿈과 희망과 도전정신이 가득 차 있는데 또 순수해. 상처를 조금 자주 받기는 하는데, 얘가 또 쓸데없이 꿋꿋하기까지 해.
그런데 이 몸에는 알 수 없는 힘이 도사리고 있대.
윌리엄은 이기영이 기억상실증에 대해, 시한부 수명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위와 같은 이유만으로도 설정이 과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양심 없기는 해. 80년대에 90년대에 나온 캐릭터였어도 에바라고 욕먹었을 거야.’
세기말 감성이 판치던 그때 그 시절을 기준으로 잡아도 과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한 캐릭터 설정이었다.
하지만 과할 때는 확실하게 과해야 한다. 애매하게 과하느니 아예 과한 캐릭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덜 부자연스럽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부끄럽지만….”
“…….”
“로헨에 온 이후로 매번 같은 꿈을 꿔요. 미친 사람이 하는 말 같겠지만!”
“이기영 님. 이곳은 로헨입니다. 매일 같은 꿈을 꾼다고 하는 건 결코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만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 여기는 로헨이지.
“그… 렇군요.”
“무슨 말씀을 해주시든 간에 진지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실은… 저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으니 말입니다.”
“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어쩌면 이번 메인스트림은 이기영 님께서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리젤, 그리고 세인트 벨에서 일어난 일까지. 갑작스럽게 나타난 21군단은 이상할 정도로 이기영 님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 많았으니까요.”
“아….”
“제 생각이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마치 이 로헨이 이기영 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이기영 님이 로헨에 들어오신 이후에 말입니다. 틀림없이, 틀림없이 이기영 님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리라. 그만큼 23살의 꽃기영은 설정 과다로 질식하기 직전이었으니까.
‘솔직히 이 정도면 내가 주연이라고 두 팔 벌리고 소리치고 다닌 수준이야.’
“말씀하시기 힘드시다면 다음에 말씀해 주셔도….”
“아니요. 저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
“제 몸에 ‘어떤 것’이 봉인되어 있어요.”
당연하지만 흑염룡 따위가 아니다.
“네?”
“꿈은 제가 그걸 인지하면서부터 시작돼요. 기형적으로 생긴 거대한 탑 위에 제가 매달려 있고, 수천, 아니, 수만의 악마 군세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어요. 사제복을 입은 악마들이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와요.”
“…….”
“아버지가 오리라. 아버지가 오리라. 보잘것없는 그릇에 갇혀 있던 아버지가 드디어 우리 곁에 강림하리라.”
“그건….”
“꿈 속의 저는 알고 있어요. 제가‘어떤 존재’를 봉인하고 있는 그릇이고, 지금 이 그릇이 깨지려고 한다는 걸 말이에요. 탑 위에 있는 저는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죠. 몸 속에 어떤 것이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없게 하기 위해서요. 그게 불가능 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
“초조함과 두려움에 맞서 싸우지만 꿈의 내용은 항상 같아요.”
“…….”
“누군가가 제 목을 긋고.”
“…….”
“저는 쓰러져요.”
“…….”
“그리고 제 몸에서 빠져나가는 피들이 작은 홈으로 빠져나가며 문양을 그려요. 기괴한 탑은 어느새 제 혈액으로 그려진 문양으로 가득 차고, 탑의 밑에 있는 이상한 제단에는 계속해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죠. 한 인간의 몸에서는 나오는 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양의 혈액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떨어져요. 그것이 작은 호수가 될 때까지 악마들은 노래를 부르고 제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진행하죠.”
침 넘기는 소리 들리자너. 묘사가 좀 꼼꼼하기는 했어.
“마침내 탑에서 흐르는 피들이 제단 위에 모두 떨어졌을 때, 제가 확인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몸을 일으켜요. 보는 것, 아니, 그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두려운 어떤 존재가요. 수많은 악마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수많은 죽음과 수많은 공포와 수많은 죄가 그것의 새로운 부활과 탄생에 기뻐하는 것이 느껴져요.”
“이기영 님께서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아마 죽지 않았을까요. 꿈에서의 저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었던 그릇이었으니까요.”
바하무트의 악마의 씨앗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 몸속에 봉인되어 있다는 설정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자위했었지만… 어쩌면 이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상황을 보고 있던 갤러리들의 메시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어째서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당신을 걱정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어쩌면 우리 기영이의 몸에 고대의 악마가 봉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립니다. 고대의 대군주, 혹은 그 이상의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당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너무 갑작스럽지 않느냐 반문합니다. 고대의 악마가 지구의 인간에게 봉인되어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개연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밤의 여주인♥이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불결한 것을 봉인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 대륙과 차원은 자신들이 바라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사건들이 벌어지는 곳이며 당신에게 악마가 봉인되어 있다는 이야기 또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향후 당신에게 벌어질 일들과 당신이 감내해야 할 고통과 아픔을 걱정합니다.]
[황금색 성좌에 앉은 이♥가 어쩌면 로헨뿐만이 아니라 전 차원에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는 사건이라고 이번 일을 걱정스러워합니다.]
[삐뚤어진 수호자가 당신이 죽으면 전부 해결될 일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심연속의 가장 낮은 심연♥이 일부 게니우스들에게 말을 아낄 것을 종용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말하는 것은 엄연히 로헨의 법칙에 위배되는 일이며, 멈추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위에 회부할 것이라 경고합니다.]
[초승달 아래에서 우는 늑대가 이 건은 허투루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특수한 상황인 만큼 예외조항을 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로헨의 법칙에 예외 따위는 없으며 자신의 계약자들은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말합니다.]
여론은 나쁘지 않다. 어쩌면 게니우스들 중에서 찐기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쳐지나가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세인트 벨로 자리를 옮기는 와중에도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이는 윌근본.
그나마 성장 가능성이 느껴지는 녀석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일단 이 문제는 저희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 누구에게도 이걸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이기영 님. 일단은 저와 이기영 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면 합니다.”
당연히 외부에 유출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장 녀석만 해도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지 않았던가.
로헨을, 아니, 차원 전체에 위협을 끼칠 수도 있는 존재가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이기영 님을 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단… 일단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전까지는 세인트 벨의 수성전 준비를….”
설마 손절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얘가 이빨 턴 게 있는데 나를 손절하지는 않을 거야.’
아마 녀석으로서도 생각할 만한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이기영 안에 있는 것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까지 생각해 봄 직하다.
물론 나는 우리 윌근본을 믿지만….
‘그래. 얘는 손절하고 이런 거 할 줄 모르는 얘야.’
얘는 기본적으로 바른생활 사나이에다가 근본선언문을 여러 번 외칠 정도로 근본이 넘치니까.
로헨을 지키겠다고 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흔들릴 만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인트 벨을 제대로 통제해 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어수선하고 묘한 긴장감과 두려움이 도시 안에 감돌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안정된 것처럼 보인다.
“이쪽에 방벽 좀 더 올려야 돼.”
“마법사 불러올까?”
“아니… 석공들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야.”
예정되어 있었던 성벽을 올리고, 수성전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 윗대가리들이 이 말도 안 되는 협상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하기 이전에 일개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 와중에 윌리엄은 잡아온 범죄자 새끼들을 비밀리에 신전에 방생하는 한편, 쌓고 있는 성벽에 대한 검수나 함께 온 윗대가리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될 장소입니다. 절대로 이곳을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네.”
“지원군은….”
“최대한 빠르게 오더라도 일주일 이상이 걸릴 거라고 합니다. 아헨델을 비롯한 많은 도시에서….”
“그렇군요.”
“그보다 윌리엄 님. 혹시 간밤에 소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약속도 지켜주고 있는 것을 보면 이번 일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겠지, 어쩌면 암암리에 소문이 퍼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간밤에 꽃과 풍요의 성자가 납치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들을 용서하기로 결정했다는 소문을 말이다.
‘미담이야.’
누군가는 멍청한 선택이라 욕할 수도 있어도 또 누군가는 꽃기영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은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죄인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겠지.
공포도 전해지 듯, 이런 종류의 분위기도 전해진다.
세인트 벨의 여명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희망.
어쩌면 인류가 다시 한번 이번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공통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동질감.
많은 회의가 있었지만, 이기영을 넘기자는 뉘앙스의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약속한 시간까지 오 일이 남은 시점,
눈을 감은 이후 내 꿈속에 들어온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
“윌리엄 님?”
“이기영 님? 갑자기… 이기영 님이 맞으십니까? 여긴 도대체….”
“네. 제가 맞아요. 윌리엄 님.”
살짝 주변을 둘러본 이후 눈치 빠르게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는 녀석.
“여기는…. 이기영 님의 꿈속이군요.”
시간 관계상 윌근본과의 강화 스토리는 꿈속에서 찍어야 했다.
최대한 빠르게 말이다.
-이거면 된 거죠? 오빠?
‘응 고마워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