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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64화 (1,16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64화

내실 (3)

무대로 선택된 장소는 대충 아포칼립스 세계관, 멸망한 로헨의 모습이었다.

현성이 때도 느꼈었지만 원래 세기말 감성의 꿈속 무대는 언제나 멸망한 모습이어야만 했다.

개연성이고 나발이고 일단 멸망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옳다.

온 세상이 잿빛노을로 물들어 버린 하늘, 썩어버린 대지와 악취로 오염되어 있는 공기.

희망이라는 단어가 사라져 버린 칙칙한 세상을 둘러보는 윌근본의 모습만 보더라도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성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신기한 일이로군요. 아니, 정말로 이게 꿈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당연히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일단 이곳이 정말 꿈속인지 의문을 표시하는 것이 먼저, 이후에는 정말로 이기영과 꿈으로 연결된 것이 맞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까.

물론 녀석이라면 금방 이 상황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현실감 있으니까.’

피부로 스치는 바람이나,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 나가고 있는 악취, 이기영의 목소리 같은 것들은 가짜라고 의심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평소에 자신이 꾸었던 꿈과는 확연하게 차이점이 있고, 그 위화감이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예민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아마 이곳이 지구였다면 작금의 현실을 부정했겠지만 윌근본이 스스로 발언한 것처럼 이곳은 지구가 아닌 로헨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세계였고, 녀석은 그 이세계에 빠르게 적응한 인간들 중 하나였으니 이런 현상에 곧바로 수긍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

“이곳은….”

“저도 어딘지 모르겠어요. 로헨이라는 것 외에는….”

“정말로 이상하군요.”

“네?”

“저는 이곳이 꿈처럼 느껴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동감 있고… 무엇보다 어째서 제가 이곳에 있는 건지….”

“…….”

“어쩌면 제게 주어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지금으로써는 저도 전후 사정에 대해 파악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제가 이곳에 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여신님의 안배일 수도….”

‘그런 거 없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이 이쪽에게도 이롭다. 굳이 개연성을 찾는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녀석과 꿈에 대한 토론을 나누는 것보다는 이 스토리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먼저였다.

윌리엄이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한 즉시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윌, 윌리엄 님.”

“네.”

“도… 도망쳐야 해요.”

끼릭. 끼릭.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끼릭,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아주 얇고 긴 악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꽈배기처럼 온몸을 꼬며 걸어오고 있는 모양새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한 비주얼.

눈은 아무것도 없는 듯이 텅 비어 있었고 입은 수백 바늘을 꿰맨 것처럼 봉해져 있었다.

도무지 어떻게 걸을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악마는 손가락을 지팡이 삼으며 주변을 살피다 천천히 이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

“도망치세요.”

윌리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아마….

‘저건 뭐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뻔하겠지. 단순한 악마가 아니라는 것 정도야 단번에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비주얼도 비주얼이고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할키우스 때와는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이기영 님. 여기는… 제가….”

라고 녀석이 말을 꺼낸 순간, 꽈배기의 손톱이 윌리엄의 배에 틀어박혔다.

“으아아아아아아!”

꽈배기 악마는 다시 한번 윌리엄의 몸에 다른 손톱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그것을 잡고 벌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근본이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비명 소리.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고통을 그대로 겪고 있을 테니 오죽할까.

‘하지만 견뎌내야 돼. 근본아.’

“끄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견뎌야 해. 견뎌야 성장할 수 있는 거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

이게 꿈속에서의 첫 번째 죽음.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탕거리는 소리 들려왔다.

‘이 새끼 일어났구나.’

몸이 반으로 찢긴 이후, 꿈에서 일어나 곧바로 이쪽을 찾아온 것이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다 내가 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문을 부수려고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깜짝 놀란 경비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문을 부순 이후에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기영 님.”

“…….”

“이기영 님. 들리십니까?”

창백한 표정으로 조용히 몸을 일으킨 것은 당연지사.

“네.”

“방금….”

“…….”

“방금 제가 이기영 님의 꿈속으로 들어갔었던 것 같습니다만 혹시….”

“혹시나 했지만… 정말… 정말 윌리엄 님이 제 꿈속으로 들어오신 거군요.”

“역시. 몸은… 괜찮으십니까?”

“윌리엄 님이야말로 괜찮으신가요?”

“네?”

이후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이는 것이 옳다.

“죄송해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어쩌면 제가… 윌리엄 님을 말려들게 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원래는 이런 꿈이 아니었어요. 윌리엄 님이… 거기서… 윌리엄 님이 들어오셔서인 건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증상이 더 심각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이상해요. 이건….”

“…….”

“제가 윌리엄 님께 말씀드린 게 문제일까요? 어쩌면 제가 무의식적으로 도움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그 악마는 도대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정확하게 정답이 무엇이라고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만 분명 뭔가가 바뀐 것 같습니다. 평범한 꿈이라고 하기에는 의심이 가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죽고 난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똑같았어요. 그 악마가 저를 탑 위로 끌고 올라갔고 내용 역시 같아요. 어쩌면….”

“…….”

“어쩌면 그 악마는 윌리엄 님을 밀어내기 위해 온 존재가 아닐까요?”

뭔가 있다.

꽃기영이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윌근본이 다시금 생각에 빠지는 것이 보인다.

만약 정말로 그 악마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악마라면…

어째서 이기영에 꿈에 불려온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일까?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어째서 꽃기영이 윌리엄에게 꿈에 대해 고백한 순간 무언가 달라졌을까에 대한 궁금증.

애초에 왜 이기영이 그런 꿈을 꾸게 되었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단순히 예지몽 같은 것이 아니다. 미래를 보여준다거나 내면의 무의식이 꿈으로 발현되는 것 따위도 아니다.

아마 윌근본이라면 이쪽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곧바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네.”

“아마 놈이… 이기영 님의 정신을 무너뜨리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거야.’

“이기영 님의 안에 봉인되어 있다는 그 ‘어떤 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존재가 이기영 님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더욱더 커졌다고 추측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매일 같은 꿈에 안 좋은 쪽으로 변화가 나타났다면….”

“그렇다면 윌리엄 님께서는….”

“제가 어째서 이기영 님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꿈속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적으로는 여신님의 안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기영 님의 안에 있는 어떤 것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진다면, 지금 펼쳐지고 있는 전쟁이 무의미한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여신님께서도 이번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시고 계신 것이겠지요.”

“…….”

“외부에서의 싸움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꿈속에서도… 싸워야 한다는 거군요.”

“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걸까요? 적은 강해요. 공포스럽고… 두려운 존재예요. 저는 혹시나 윌리엄 님이 다치시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현실에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일단은 내일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는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새끼. 덤덤한 척하네.’

아마 이쪽의 앞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름 덤덤한 모습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아마 녀석은 많은 사선을 겪어왔을 것이다. 그걸 얕보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로 뒈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천지 차이.

김현성처럼 죽는 게 차라리 나은 상황으로 수백 번 내몰린 것도 아닐 테니 이 새끼가 너무 온실 속 화초처럼 커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장담하건대 지금의 상황이 녀석에게 있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겠지만 녀석의 정신은 그때 겪었던 고통과 공포가 각인되어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곱게 죽은 것도 아니고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죽었다. 그냥 검으로 깔끔하게 잘린 것도 아니나 찢겨서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이쪽의 귀에는 윌근본이 내질렀던 비명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지났지만 녀석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

‘내가 너한테 걔랑 싸워서 이겨달라는 걸 주문하는 게 아니야.’

성장하라는 거지.

“…….”

“…….”

그리고 다시 밤.

“이기영 님. 도망… 도망치십시오! 으…아아아아아아악!”

“윌리엄 니임~”

악마의 손톱이 머리통에 박히는 것으로 두 번째 죽음.

조금 악마 같기는 했지만 두 번째부터는 한 번 죽었다고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사지가 갈라지며 세 번째 죽음.

“제길… 제길!! 끄으으윽….”

네 번째, 다섯 번째.

“끄르르르륵….”

목이 관통당하며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열 번째.

“어째서! 제기랄! 이 개자식! 아아아아아아악!”

열둘, 열셋, 열다섯, 스물, 스물일곱.

마침내 서른두 번째 죽음을 겪고 나서야 그날의 꿈이 마무리됐다.

당연하지만 다음 날 아침, 내가 본 윌근본의 몰골은….

‘이 새끼. 눈에 공포가 서려 있자너.’

그야말로 최악 그 자체였다.

사람 하나 폐인으로 만드는 것이 의외로 쉽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그 말끔했던 얼굴에 짙은 다크서클과 수심이 보인다.

굳이 속마음을 읽어보지 않아도 잠들면 다시 한번 그 지옥 속에 들어간다는 두려움이 보인다.

부쩍 꽃과 풍요의 여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시간도 많아졌다.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무척 예민하게 변한 것 같다.

차라리 정말로 죽어 이 모든 고통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쉽게도 녀석은 무한 회귀자였다.

적어도 이기영의 꿈속에서는 말이다.

‘한 오백 번 정도만 채우면… 반응이 오려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