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67화
붉은 꽃 (1)
-오빠… 근데 윌근본한테 시한부 설정은 언제 풀 거예요?
“나중에. 그리고 그런 건 막 억지스럽게 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자연스럽게 푸는 거지.”
-모두가 행복했답니다, 같은 미래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데. 쟤도 참 불쌍하다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긴요. 어차피 여기 마무리되면 오빠는 로헨에 볼 장 다 본 거잖아요. 여기는 신성 빨아먹는 공장 정도로 생각한 거 아니었어요?
“그렇기는 하지.”
-그래서 불쌍하다는 거예요. 만약에 여기 일이 잘 풀려도 쟤들 입장에서는 모두가 행복한 엔딩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요. 제가 장담 하나 할게요. 아마 여기 일 전부 끝나면 쟤 다시 알콜 중독자 될걸요. 아니 지금부터 이미 시작됐을 수도 있어요.
‘그건 그렇기는 해.’
물론 이쪽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로헨을 구하는 대가가 알콜 중독이라면 무척 수지맞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그것도 녀석이 이걸 이겨냈을 때의 이야기였다.
‘여기서 무너지면 죽도 밥도 안 되자너.’
물론 분위기는 긍정적이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서사는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간 사례로 알 수 있었으니까.
마음먹기에 따라 사람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김현성을 통해 입증된 이론.
재능이 있는,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놈들일수록 육체적인 벽을 넘는 것보다 정신적인 벽을 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국룰이 아니었던가.
이미 인간으로서의 한계의 끄트머리에 있는 이들일수록 더욱더 그렇다.
체력 단련이나 검술 훈련같이 꾸준한 자기 계발이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종류의 강화 방법은 아니다.
벽에 부딪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적인 훈련이 아닌 무언가였다.
윌리엄에게 필요한 것은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벽을 넘어서는 것. 이 이상으로 녀석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을 거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성적인 성격이 문제기는 해.’
말 그대로 윌리엄은 너무 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것은 녀석의 강박증에서도 잘 드러난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방안은 항상 정리되어 있어야 했으며, 계획한 하루의 루틴을 벗어나는 것을 껄끄러워했다.
당연하지만 전투에서도 녀석의 그런 성향이 여실히 잘 드러난다.
근본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릴 정도로 정돈되어 있는 검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새끼의 검술은 마치 교과서처럼 느껴질 정도.
괜히 초반의 우효열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다.
기본기에 충실한 템플러 젠과도 확실히 다르다.
이런 말 하면 미안하지만.
‘넌 그동안 너무 곱게 컸어.’
온실 속의 화초. 부잣집 도련님이 귀족검술을 배운 것처럼 느껴진다.
이 새끼는 조금 굴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자기 자신이 유약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고, 시궁창도 한번 굴러봐야 했다.
아득바득 이를 악물고 추하게 바닥도 구르고,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결벽을 어느 정도는 내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 팔 한쪽이 날아가더라도, 상대의 목을 날리고 말겠다는 독기와 악의가 필요했다.
‘물론.’
이 새끼 정체성은 그대로 살리고 들어가야 했지만 말이다.
“이기영 님. 이쪽으로.”
“네.”
‘이성적인 건 네 장점이기도 해. 무작정 버리라는 게 아니라. 안고 가져가야 되는 거야. 어떻게 해야 좋은 방향으로 가져갈 수 있는지는 네가 고민해야 돼.’
“장소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장소로 말입니다.”
“네.”
“여신님의 신전에서 녀석을 맞이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네. 물론이에요.”
“신전 옆 길목에서 싸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몸을 피할 수 있는 장소로 향하는 것이 어떨까요? 넓고 엄폐물에서 싸우는 것이 조금 더….”
“아니요. 이기영 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그 악마와 마주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는 저보다 월등히 강합니다.”
“…….”
“계속해서 피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제가 녀석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 맞아. 그런 도전 정신 좋아.
“최소한 제 검으로 놈의 손톱을 막아낼 수 있다면….”
“할 수 있을 거예요.”
‘꼼꼼한 것도 섬세한 것도 네 강점이니까.’
흔치 않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이들은 보통 섬세함을 내려놓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윌리엄의 검술은 섬세하고 기계처럼 정확하다.
손톱을 검으로 막아낸다는 건 바늘로 바늘을 막으라는 것같이 터무니없는 기예를 요구하는 것이긴 했지만 애초에 그걸 위해 설계된 빌런이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번 기획의 핵심이었다.
윌근본이 녀석을 마주한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다시 1회 차.
악마가 다시 한번 손톱을 쏘아 보낸다. 윌리엄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로 그 손톱을 직시한다.
검면으로 막는다면 검이 부러진다는 것은 그간의 경험으로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점은 면이나 선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마력을 응집한 점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최소한으로 몸을 보호할 마력도, 고속이동을 위한 마력도 모조리 버린다.
찌르기 한 번을 위한 마력이 녀석의 검 끝에 응집한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손톱이 뻗어 나온 순간 녀석 역시 검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2회 차.
1회 차와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녀석은 머리에 손톱이 박히는 순간까지 그것을 끝까지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자신이 저걸 볼 수 없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3회 차.
윌리엄은 초조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망치거나 다른 선택지를 고수하지 않았다.
4회 차.
이전과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5회 차.
이전과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11회 차.
이전과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23회 차.
이전과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35회 차.
이전과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48회 차.
이전과 결과가 다르지 않았다.
115회 차.
“하하하하하하하!”
윌리엄은 자신의 점으로. 녀석의 점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116회 차.
같은 것을 실패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115회 차 때 느꼈던 그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 녀석은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악마를 맞이했다.
117회 차.
윌리엄은 다시 한번 자신의 점으로 녀석의 점을 막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비록 이후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윌리엄의 눈은 정확하게 놈의 손톱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톱이 눈으로 파고들 때까지 윌리엄은 눈을 감지 않았다.
182회 차.
진도가 도통 나가지 않아 지친 것처럼 느껴졌지만 눈빛에는 변함이 없다.
“모두가 행복했답니다, 로 끝날 겁니다. 분명히 말입니다.”
“예. 저도 믿어요.”
210회 차.
윌리엄이 녀석의 폐에 검을 쑤셔 넣었다.
스스로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 볼 수도 없었던 공격이 이제는 녀석의 눈에 보인다.
반응할 수 없었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게 됐다.
윌리엄은 점점 확신을 가지게 된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요행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점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33회 차.
무대가 바뀌었다. 다만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뒤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총 10개의 손톱을 점으로 막아야 하는 윌근본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뒤로 발걸음을 옮기며 윌리엄은 계속해서 녀석의 점을 막았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나머지 세 개의 손톱을 막지 못해 심장에 구멍이 뚫린 윌리엄은 분명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마치 ‘시간은 내 편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시간은 녀석의 편이었다.
287회 차.
스타일이 바뀌었다. 다만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죽음을 반복하고 목표가 눈앞에 있다 보니 조금은 호전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뼈를 주고 살을 취하는 방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녀석에게 바라는 것이 그런 독기이기도 했지만 내가 원한 것은 마음가짐이지 행동거지가 아니었다.
329회 차.
악마와 만나기 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꽃과 풍요의 여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생에 대해서.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에 대해서.
전쟁이 끝나고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녀석은 물끄러미 검을 바라봤다. 이 이상 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399회 차.
“알 것 같습니다.”
“네?”
“어째서 여신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낸 것인지 말입니다. 이것 또한 제가 이겨낼 시련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게 두려웠던 죽음이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닿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결코 자만하거나 현재의 상황을 낙관적으로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느껴져요.”
“저는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자만이나 오만이 아니었다.
431회 차.
윌근본이 놈의 목에 검을 꽂아 넣었지만 윌리엄의 점은, 녀석의 숨을 끊어놓기에는 부족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피에 흠뻑 젖어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다만 눈동자는 죽지 않는다.
백 합이 넘어가는 혈투 동안 윌리엄은 악에 받친 고함을 외치며 검을 내질렀다.
점과 점이 부딪치고 무언가가 공기를 뚫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한 발자국만 더, 한 걸음만 더, 다가서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444회 차.
많은 변화는 없었다. 다만 녀석은 한없이 차분해졌다. 조용히 검을 바라보고는 확신에 찬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이때부터는 유효타를 먹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이 통하지 않자 윌리엄은 더욱더 극단적으로 모든 마력을 점에 집중시켰다.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서서히 깨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478회 차.
더 이상 악마의 점은 윌리엄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윌리엄은 조용히 녀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489회 차.
변화는 없었다. 윌리엄은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녀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녀석이 내게 말을 걸었다.
“조금만 더 해봐도 되겠습니까?”
녀석은 자신이 악마를 죽일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이걸 하는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윌리엄은 조금 더 얻어갈 것이 있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나도 녀석의 말에 동의했다.
“네. 물론이에요.”
491회 차.
윌리엄은 검을 내질렀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고… 녀석은 죽었다.
492회 차.
윌리엄은 검을 내질렀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고… 녀석은 죽었다.
493회 차.
윌리엄은 검을 내질렀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고… 녀석은 죽었다.
497회 차.
윌리엄은 검을 내질렀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고… 녀석은 죽었다.
500회 차.
윌리엄은 검을 내질렀다.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은 죽었다.
501회 차.
윌리엄이 검으로 붉은색의 꽃을 그렸다.
녀석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웃었고. 녀석도 웃었다.
윌리엄이 검으로 붉은색의 꽃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