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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69화 (1,16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69화

붉은 꽃 (3)

‘좋아.’

큰 환호성이 전쟁터에 울려 퍼졌고.

불안함과 걱정으로 물든 병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타이밍 진짜 좋았자너.’

쓸데없이 늘어지는 연설보다 효과가 더 좋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당연지사.

안 그래도 이런 이벤트를 원하고 있던 차였다. 전쟁터에서 사기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본 드래곤이 나온 이후 바닥까지 내려간 사기를 원상복구 시키는 데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수성전이 아니라 대회전이었다면 지금 당장 전 병력을 적군을 향해 돌진시키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분위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멍청한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곧바로 하얀이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하얀 씨.”

“……!!”

그녀가 준비한 주문을 외운 직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만들어진 구체.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고 있는 불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걸음을 옮기고 있는 버림받은 자들을 순식간에 집어삼킨다.

구체에 닿기도 전에 버림받은 자들이 불에 타 없어져 버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 살상력이나 파괴력은 간단한 원형구체 같지 않다.

아니, 오히려 형태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화력 자체에 집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원소로 어떤 형태를 갖추는 것을 즐기는 것과는 정반대.

정하얀은 이미지 하지 않는다. 화염으로 만들어진 호랑이, 뇌전으로 이루어진 늑대, 바람으로 만들어진 새 따위를 만드는 것보다는 형태가 단순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즐긴다.

구체, 원뿔, 네모로 만들어진 순수한 마력의 집합체의 밀도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정말로 작은 태양이 떨어진 것만 같은 광경.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폭발음과 함께 빛이 번쩍였다. 어림잡아 병력의 1/3을 녹여 버린 것 같은 신위에 아군 병사들의 눈에는 다시 한번 희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륙 기준 스펙으로는 유성 떨구면서 차도 마시고 그랬었는데.’

로헨 패치를 받은 정하얀은 아직 그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없는 모양, 물론 효과는 충분하다 못 해 넘친다.

언제 병력이 줄었냐는 듯이 끊임없는 물량이 계속해서 검은 늪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공포에 질리거나 희망이 없다는 눈은 더 이상 없다.

“이길 수 있어….”

“전투 준비! 화살 장전해라! 이 새끼들아!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놈 여기에 있나!”

“이길 수 있다고! 이 새끼들아! 집중해! 온다! 온다!”

“발사.”

“발사!!”

이윽고 아군 마법사들과 궁수들이 쏘아 보낸 화살과 마법이 지면에 내려앉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음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버림받은 자들 역시 점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적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이지를 상실한 인형들은 몸으로 마법과 화살을 막아내며 성벽을 향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는 중.

피해는 컸지만 선희영이 그냥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병력들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근거는….

‘치유되고 있구나.’

언데드들이 힐을 받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지만 아마 선희영은 그런 기믹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대륙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제 중에 하나였으니 말이다.

‘말이 다섯 손가락이지 사실 엘레나랑 얘 말고 딱히 인물도 없자너.’

성녀급의 힐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하다.

대마법사의 반열에 든 마법사들과 비슷한 보호마법, 삼류 모험가를 일류 모험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버프마법.

버림받은 자들 전체가 선희영의 비호 아래 움직이고 있다면 1인으로 세인트 벨을 침공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버림받은 자들의 몸은 계속해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대미지를 받은 이들이 다시 한번 몸을 움직이고 검은색의 희미한 보호막이 버림받은 자들을 감싸 안았다.

방패를 든 개체는 방패를 앞세워 앞으로 나가고, 덩치가 커다란 이들은 화살이나 가벼운 마법 같은 것들을 씹으며 선봉에 나서기 시작했다.

심지어 기본적인 진영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희영 역시 조혜진과 이쪽과 마찬가지로 병법을 알고 있는 길드원 중 하나.

능력치가 행정업무에 조금 더 치중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쪽과 조혜진이 없을 때면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사람이었다.

길드원들이 많아지고, 길드가 점점 덩치를 키우면서 조금 덜 주목받기는 했지만, 그녀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까다로워.’

무척 까다로운 상대라는 생각이 든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적군이 성벽으로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방해요소들이 있었지만 선희영은 우습다는 듯이 버림받은 자들을 들이밀며 세인트 벨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버림받은 자들이 출입구가 없는 성벽과 부딪친다.

직군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화살과 기름, 성수 등을 떨어뜨리고 있다.

선희영의 치유 주문으로도 상처가 수복되지 않는 언데드들은 그대로 허물어져 다른 버림받은 자들이 올라갈 수 있는 계단으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에엑!”

“꺼져 이 새끼야!”

“화살! 화살 더 가져와!”

“2구역 성벽 파손. 마법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시위 당겨! 손을 멈추지 마라! 이 자식들아!”

“쏴! 쏴!! 뭐 하고 있어! 신병! 제기랄! 죽고 싶어?!”

“지원 요청! 지원 요청한다! 움직여! 움직여!!”

게다가 곳곳에 끼어있는 네임드 개체들이 벌써부터 성벽 위로 올라온 것이 눈에 띄었다.

‘시바.’

“윌리엄 님.”

“네.”

이미 네임드 개체들이 있을 거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새끼들… 달라….”

“밀어내!”

“너무 빨라! 제기랄!”

수성전이 시작된 지 이제 막 한 시간, 벌써부터 여기저기에서 고성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대로 투항하는 것이 나은지 진지한 고민이 들기는 했지만….

“여기다! 이 더러운 새끼들!”

사람이 꼭 죽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는 것은 이쪽을 납치하려고 했던 복면을 쓴 괴한들, 지금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몸을 내 던져가며 성벽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거야.’

“뒤를 부탁한다. 카셀….”

“으아아아아!”

마력 폭탄으로 몸을 감싼 채로 적 개체에게 돌진하는 녀석, 팔다리마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적의 다리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 근성.

“로헨을… 로헨을 지켜줘. 반드시….”

“제기랄! 제기라알!! 이 언데드 새끼들아!”

대놓고 위험지역에 배치시켜 놓았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희생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뒈지면 어떻게 할까 걱정했던 것과는 반대로 전 복면 쓰레기들은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윌리엄은 김현성이었다면 성벽 전 범위를 커버할 수 있었겠지만 녀석은 김현성이 아니다.

각성 이후 강해진 것은 맞았지만 이런 종류의 전투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필연적으로 다른 놈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녀석의 손은 섬세하고 기계처럼 정확하기는 했지만….

‘체력이랑 민첩이 아쉬워.’

이동 루트를 최소화한다고 해도 윌리엄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 자체가 좁다.

한 번 써 본 녀석들 중에 가장 느린 타입이 라파엘이었는데 심지어 이 새끼는 라파엘보다도 느리다. 날개가 없는 게 결정적이기는 했지만 발이 느린 것은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가 되지 않았다.

‘오래 써먹지는 못할 것 같기는 해.’

물론 다른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기영 님.”

“네.”

“…….”

“가요.”

“꽃과 풍요다! 길을 열어!”

“길을 열어라! 꽃과 풍요야!”

패밀리아의 일원들의 손발이 잘 맞는다는 것 정도는 인정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김현성이 파란에 녹아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니, 무리하면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김현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길드원 중, 아니 대륙 어떤 모험가를 데려와도 김현성과 발을 맞출 수 있는 모험가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윌리엄의 느린 발은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의 중심을 잡아주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진영 자체는 원숭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한 차례 수정 작업을 거친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 우리는 파티가 아니라 패밀리아 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이 집단은 한 몸처럼 움직인다.

서로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

어떤 타이밍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모두가 이해하고 있다.

이런 집단은 컨트롤하기 편하다. 한 명만 목줄을 제대로 채워놓으면….

‘나머지가 알아서 다 따라 들어오거든.’

윌리엄을 움직였을 뿐이다.

하지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윌리엄을 지원해주는 패밀리아의 일원들이 시야에 비친다.

화살, 마법, 주문, 동선이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전위들은 윌리엄을 따라붙어 방패로 길을 연다.

결과적으로는 조금 느리지만 관통력 있는 확실한 점이 시야에 비친다.

붉은 꽃이 그려질 때마다 길이 열리고,

“에밀리아!”

“응.”

“윌리엄 님이 간다. 움직여! 쉬지 마!”

이미 약속된 행동들이 계속해서 따라온다.

하나하나가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파란 길드와는 조금 다른 색채.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에는 비교 자체가 힘들기는 하지만 굳이 한 팀을 꼽는다면….

‘우리 애들이 더 잘하기는 해.’

구태여 김현성이 집단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더라도 파란 길드는 강하다. 이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지만 말이다.

하얀이와 김현성은 사실상 논외, 박기리 삼 남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합이지만 너무 지들끼리 노는 경향이 있다.

조혜진도 사실상 유니콘에 탑승하면 묶기 어려워지고… 극단적으로 파티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엘레나도 써먹기 어렵다.

한소라야 정하얀과 항상 붙어다니니까 없는 사람처럼 생각해야 되고… 창렬이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길드원 한 명 한 명이 너무 개성이 넘치다 보니 잘 섞이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 중간에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끼워 넣으면 반대로 잘 섞이지 않는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있어야 되는 거자너.’

아무래도 파란 길드를 컨트롤 하는 것은 나 정도가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라는 판단이 설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방진이나 파티플레이야 지들끼리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 길드원들을 백 퍼센트를 끌어올릴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이기영 님.”

“저희는 성벽을 나설 거예요.”

“네?”

“술사를 직접 타격할 거예요.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저 언데드들을 뚫고 가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최대한 우회할 거지만…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여러분들과 함께라면 말이에요.”

잠깐 동안이지만 파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전장.

내가 빛의 화관을 쓰고 발걸음을 옮긴 순간,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두 번째 이야기. 버림받은 성녀의 군대가 시작됩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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