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72화
버림받은 성녀의 군대 (3)
이런 종류의 정치에는 본래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기는 것이 국룰이었지만, 커다란 목소리 외에도 정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가 있었다.
아니, 단순히 성공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표현마저도 부족하다. 만약 이게 없다면 큰 목소리로 기선을 제압하는 방법이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얼마나 이성적인 척하느냐.’
실제로 이성적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대중들에게 어필할 만한 주장을 내세우면서 얼마나 이성적인 척하느냐가 중요했다.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는 목소리는 처음에는 대중들에게 먹힐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카운터를 맞는다면….
‘그대로 되돌려 받는 거지 뭐.’
업보 청산을 당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었다.
김현성이 이성적이었을까를 판단한다면 당연히 아니올시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경로와 방법 부터가 이성적이지 않았다.
추진력이 좋은 건 인정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추진력이 아니라 광기라 판단하는 것이 옳을 정도로 미친 짓을 자행한 셈이었다.
악마 군단장 비자를 타고 로헨으로 향한다는 계획을 파란 길드원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이 느낀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심지어 그 도박을 성공한 이후에 로헨에 떨어졌더니 이기영이 이기영이 아니란다.
누가 봐도 이기영인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영혼이 뒤바뀐 사람이었단다.
당연히 개소리로 들릴 만한 주장이었지만 파란 길드원들이 이 주장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김현성과 이기영이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딱 그것뿐이었다.
그 모든 것을 설명하는 과정이 이성적이었다면 파란 길드원들이 받아들이기 한결 편했겠지만, 이 모든 과정을 겪는 과정에서 김현성이 이성적일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정병증세가 슬슬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 내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지랄병을 떨었던 것이 바로 김현성이 아니었던가.
‘당장 로헨으로 가야 한다고… 제길 어쩌고… 제기랄… 어쩌고 육두문자 어쩌고….’
얘가 말도 잘 못 해요. 또.
극도로 흥분한 상황에서 의사를 전달하는 과정은 굉장히 난해하고 복잡했을 것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잔뜩 성이 난 채로 고성을 내지르는 것이 눈에 선했으니….
당연히 선희영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김현성은 평소의 김현성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했지만 눈앞에 있는 이기영은 누가 봐도 자신이 알던 그 이기영이 맞았으니 말이다.
순수하고 꿋꿋하고 신성하고 거룩한 그 이기영, 대륙과 빛을 위해 싸우고 정의와 신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 이기영.
[혹시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이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슨….”
어색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는 시점,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는 할 말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레 눈물을 흩뿌리고 있는 꽃과 풍요의 성자도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이기영 님. 제 뒤로.”
당연하지만 윌근본은 이쪽을 보호하겠다는 의사를 취한다.
‘동상이몽 지리자너. 진짜.’
선희영이 이기영 안에 있는 ‘어떤 것’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리라.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귀신같이 개연성이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당신은… 누구죠?”
[기억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째서 당신들은….”
[…….]
“어째서 로헨에 온 건가요.”
[이기영 님… 당신을 찾으러 왔습니다.]
“이기영 님. 더 이상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저건….”
“아니에요. 윌리엄 님. 저분은… 저분은 뭔가 달라요.”
“네?”
어째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꽃기영의 무의식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더 이상 그녀가 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버림받은 성녀 역시 그녀는 이쪽에 대한 적의를 거두기는 했지만 상대적 약자의 입장에 있는 꽃과 풍요의 입장에서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오롯이 이쪽에 있었다.
[접니다. 이기영 님.]
머리가 아프다.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머리 속에 안개가 낀 듯 그녀의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기영 님. 괜찮으십니까?”
“제길. 전투 준비!”
“그만….”
“네?”
[…….]
“저분은 적이 아니에요. 어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분은 적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저도 이해할 수 없지만 버림받은 성녀는 우리의 적이 아니에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선보이자 조금 다른 두 사람의 반응이 느껴졌다.
선희영의 경우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혹을 점점 확신하는 쪽, 어째서 이기영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겠지만 이쪽이 진짜라는 생각에 무게추가 기울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윌리엄의 경우와는 다르다. 죽을 위기를 헤쳐 나가며 적에게 당도한 시점, 갑작스레 꽃과 풍요의 성자가 눈앞에 있는 악마를 적이 아니라 말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녀석은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로헨의 성자가 버림받은 성녀가 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야기했다.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윌리엄은 검을 한번 고쳐 쥐고는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당신은 우리의 적입니까?”
[…….]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적입니까?”
선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윌리엄의 말은 그냥 씹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 이번에는 내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대답해 주세요. 버림받은 성녀여. 당신은 우리의 적인가요?”
[저는…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은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기영 님을 데리고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선희영조차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쪽을 데려가고 싶었겠지만 만약 노을빛의 군주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면, 지금의 김현성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김현성이 아니라면….
이기영을 이대로 노을빛의 군주 성으로 데려가는 것은 그를 죽이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짭현성은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가설의 불과하지만 지금의 이기영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도박에 주사위를 던질 수가 없다.
최소한 모든 게 명확해질 때까지는… 이기영을 꽃과 풍요에 두는 것이 이로울지도 모른다.
아주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생각의 흐름이었다.
아마 지금 선희영의 머리는 터지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함께 넘어온 파란 길드원들을 설득하는 것부터, 노을빛의 군주의 진짜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반드시 맞이하러 오겠습니다. 이기영 님.]
“…….”
[반드시 말입니다.]
“윌리엄 님. 정말로 이대로 끝내실 겁니까? 지금 적이….”
“버림받은 성녀는 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기영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분명히 그녀는 우리의 적이 아닐 겁니다. 물론… 대외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지금밖에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윌리엄 님.”
“이 메인스트림에는 우리들의 좁은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에밀리아.”
“…….”
“아직 인류의 전력은 노을빛의 군주에 비할 수 없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이곳까지 당도한 것 역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인류는 이곳에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채로 전멸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네.”
“다음에도 운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
“저는 이 메인스트림을 우회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그 답이 될 수도 있겠군요.”
‘이 새끼. 마음에 드는 소리만 쏙 쏙 골라서 하네.’
물론 불안해 보이기야 한다. 이미 나를 믿기로 결정을 내린 것 같았지만 버림받은 성녀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이쪽을 보고 어떻게 평정심을 찾을 수 있을까.
점점 검은 늪에 빠져드는 선희영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동기 새로 생겼나 보네.’
시전 시간이 어마어마 하게 느리기는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감정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 같았다.
자꾸만 멈추지 않는 눈물, 이상하게도 꾸역꾸역 쏟아지는 눈물을 애써 참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가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선희영이 이쪽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조용히 이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선희영 역시 떨리는 손으로 이쪽의 손을 부여잡는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심지어 약간의 불안감도 감돌고 있었다.
‘왜 꼭 흑화한 애들은 자기 모습이 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둠현성도 멋있었구… 둠희영도 이렇게나 멋있는데.
검은 늪처럼 깊고 빠져들 것만 같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광경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디자인했는지는 몰라도 둠희영 폼은 백 점 만점의 백 점을 줘도 모자라다.
“저….”
[…….]
“당신은….”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선희영이 검은 늪 속으로 사라진 순간, 버림받은 자들이 허물어져 내렸다.
동시에 환호성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살았다… 시발! 살았다고!”
“흐으윽… 이겼어.”
광기에 가까운 환호성. 모두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두 번째 이야기. 버림받은 성녀의 군대가 완료되었습니다.]
방금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다행이다.’
우회공략이라고 클리어 판정을 못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도 조금은 받아들이기 편한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린 듯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버린 이들, 특히나 버리고 가를 시전했던 마법사는 아예 대자로 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한계를 맞이한 모습. 이들 역시 환호성을 지를 만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다른 일반 병사들과는 다르게 얼굴에는 걱정과 수심이 들어서 있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시작이구나.’
물론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진짜루….’
선희영이 정치를 얼마나 해주냐에 달렸어.
솔직히 희영이는 믿을 만해.
심지어 김현성은… 그쪽에 있을 때도 계속 티비 시청만 하지 않았나?
방구석 폐인마냥 방에 틀어박혀서 작은 화면을 보고 울고 웃고 하는 녀석의 상태가 제정신으로 보일 리 만무했으니….
‘짭현성으로 몰아가는 게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광증이 심각해져 착각했다는 쪽으로 유도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 새끼 아마 지도 헷갈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