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76화
주연과 조연 (1)
처음에 21군단 소환사태가 터졌을 때만 해도.
‘진짜 대책 없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 이 시점까지 와보니 점점 퍼즐이 모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단순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예상하지 못한 도움을 준 것이 시기를 앞당기는 원인이 된 셈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파란 길드원의 협력이 아니었다면 애초 시작할 수조차 없었겠지만 5년 이상을 박아야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이쪽으로서는 조금은 다행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대가 마련됐으니까.
어떤 방향으로 향해야 할지 명확한 가이드 맵이 생긴 것이다.
김예리가 다시 세인트 벨을 떠나온 지 정확히 13일이 지난 시점, 승리의 도취되어 있었던 많은 플레이어들의 흥분이 가라앉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질리지도 않는지 아직도 버림받은 성녀와 꽃과 풍요의 성자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이들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과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었다.
당연히 갤러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몰래 온 손님을 못 봤으니까 하는 소리예요.
[하늘의 문지기♥가 노을빛의 군주는 자신들의 생각보다 더욱 잔인하고 악독한 자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우리 기영의 선택을 지지할 거라고 다짐합니다.]
[가녀린 촉수여왕♥은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현재 21군단이 북벌로 인해 스스로 전력을 깎아 먹고 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장소에 병력들을 투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연속의 가장 낮은 심연♥이 무리한 기회를 잡기 위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군단장을 만나는 것은 매우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합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고 설득합니다.]
[황금색 성좌에 앉은 이♥ 역시 그 말에 동의합니다. 현재 21군단은 스스로 가지고 힘을 깎아 먹고 있으며 지금이 때인 것 같다고 중얼거립니다.]
[초승달 아래에서 우는 늑대가 분명히 전부 죽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필멸자들은 악마 대군주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근시일 내에 향하든 이후에 향하든 결과는 변함이 없을 거라 말합니다.]
[거룩한 밤의 여주인♥이 당신을 응원한다고 말합니다. 부디 로헨에 평화를 가져와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삐뚤어진 수호자는 버림받은 성녀를 몰아낸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며 비웃습니다. 어설픈 각오로 들어갔다면 좋지 않은 꼴을 볼 것이라 외칩니다.]
‘얘네는 진짜 계속 이러네.’
정작 이쪽은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끼리 갑론을박을 쉬지 않고 벌이고 있었다.
당연히 주제는 노을빛의 마왕성의 공략 시기, 로헨의 플레이어들을 좀 더 성장시킨 이후에 던전에 진입하느냐,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도 때를 맞추느냐가 매번 일어나는 토론의 쟁점이었다.
당연하지만 인류도 이 주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당장 세인트 벨 수성전에서 기적을 써 내려간 아헨델과 이쪽 플레이어들은 원정에 호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새로 합류한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승리의 열기에 취한 이들도 슬슬 제정신이 들었는지 현시점에서 노을빛의 마왕성 공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 노을빛의 마왕성으로 진입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꽃과 풍요의 성자님의 판단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조금…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21군단이 북벌을 진행 중이라면 기회인 것은 확실하나. 이제 막 세인트 벨을 수복하고 안정화시킨 시점입니다. 앞으로 넘어야 할 잿빛노을이 첩첩산중일진대… 어떻게 마왕성으로 진군하실 계획입니까?”
“만에 하나라도 노을빛의 마왕성에 도달하기 전에 어디에선가 고립된다면….”
물론 반대하는 이유가 전부 합당하기는 했다.
‘실제로도 미친 짓이기는 해.’
나 역시 몰래 온 손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이른 시기에 곧바로 진군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마당을 지켜냈다고 적의 심장부로 쳐들어가자는 꼴, 세인트 벨에서 노을빛의 마왕성까지의 거리도 거리이거니와 지나쳐야 하는 지역들도 만만치 않다.
세인트 벨 탈환작전에서 잿빛노을을 밀어내기 위해서 아군 측 병력들이 희생한 것을 떠올려 본다면 당연히 이처럼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잿빛노을 지역 안에서 계속해서 행군해야 한다는 것.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지역에서 적의 함정을 뚫어내야 한다는 것.
중간에 문제가 생긴다면 잿빛노을 지역 안에서 고립될 수도 있다는 것.
김예리와의 거래를 알 턱이 없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불확실하게 들려올 것이다.
‘이미 전부 다 계획에 있다고요.’
“매번 같은 말만 드리는 것 같아 힘드네요.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오지 않을 거예요. 이미 잿빛노을 지역이 북부로 많이 올라간 상황이기도 하고… 21군단에 북벌에 성공한다면 그들과 대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하지만….”
“무작정 행군하는 것이 아니에요. 현재 세인트 벨에서 이어진 지역에 병력들이 빠지는 걸 레인저들이 확인했어요. 중간중간 세이프티 존을 만들 수 있는 지역도 확보하고 있고요.”
“흐음….”
“당연히 고된 행군이 될 거예요. 휴식을 제대로 취하기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진행해야 돼요.”
“…….”
“더불어 제가 이런 회의를 여는 것은 이번 작전의 실행 여부에 대해 토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더 나은 방안이 있는지, 다른 아이디어가 있는지 머리를 맞대기 위함이라고요.”
‘이 답답한 놈들아.’
계속해서 징징대는 것이 지들이 생각하기에도 민망했는지 조금은 건설적인 질문이 나오고 있었다.
“보급품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하실지… 혹시 생각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꽃과 풍요의 성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긴 행군이 된다면….”
문제가 될 여지가 있었지만 최소한 로헨에서는 긴 행군으로 인한 보급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코인을 사용할 거예요.”
“네?”
“만약 부족한 보급품이 있다면 코인으로 충당할 겁니다.”
여기는 코인이라는 시스템이 있거든. 만약 우리 대륙에서도 코인 시스템을 도입한다면 많은 모험가들이 환호성을 내지를지도 모른다.
장거리 원정, 던전 원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보급이 아니었던가.
특히나 고등급의 던전같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원정 같은 경우에는 보급에 대한 회의로 몇 주를 소비할 정도였다.
어떤 물품을 가져가느냐, 어떤 전투식량을 선택하느냐부터, 야영 물품이나, 기본적인 생필품까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따로 지원부대를 꾸리는 이유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고….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최소한 로헨은 이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이 되지 않다는 건… 뭐….
‘코인 아깝다 이거지.’
아니나 다를까 몇몇 놈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여러분들이 코인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알고 있어요. 단순한 보급품 따위에 귀중한 코인을 낭비하기 싫다는 것도 말이에요. 하지만 필요한 일이에요.”
“코인이라면….”
“투자라고 생각하셔도 될 거예요. 이미 보셨겠지만 메인스트림에 연관되어 있는 모든 행동이 정산에 기여하니… 이곳에 계신 분들은 자발적으로 코인을 소비해 주시는 게 향후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그렇…군요.”
“랭커들, 아니, 굳이 랭커들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이름을 올린 플레이어들이 얻은 아이템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억하신다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
“게다가.”
“…….”
“살아야 코인도 쓸 수 있는 거예요. 죽은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어요. 이 싸움은 인류의 명운이 걸려있는 싸움이라는 걸 항상 상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로헨의 존속이 걸려 있는 싸움에 코인을 아까워하시는 분들은 없을 거라 믿겠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성자님.”
“더불어 만약 인류가 승리한다면 이후 진행할 논공행상에서도 여러분들이 소비하신 코인을 정산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당장 스펙업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최소한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코인은 보급품 생성에 쓰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
‘이 정도는 해야지 좀 안 아까워하겠지.’
“다른 의견이 없다면 오늘 회의도 여기서 종료하기로 할게요. 추가로 이번 원정에서 빠지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씀 부탁드려요.”
물론 빠지고 싶은 놈들은 없을 것이다.
‘원래 그게 사람 심리자너.’
작전명 여명, 메인스트림 버림받은 성녀의 군대, 단 두 가지로 꽃기영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위험성이야 언제나 있지만 그래도 묘한 기대를 걸어보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개죽음당하는 것도 무섭겠지만,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들은 보통 혼자만 뒤처지는 것을 더욱더 두려울 것이다.
마지막 말을 남긴 이후에는 곧바로 바깥으로 나오자 여느 때와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원정 준비에 시끌벅적한 사람들, 단체 훈련을 받고 있는 이들의 모습과 타 도시에서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는 보급품과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등록 수속을 밟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레벨 2는… 원정에 지원하실 수 없습니다.”
“짐이라도 나를 테니 받아주십시오. 꼭 참가하고 싶습니다. 로헨의 위기를 이대로 못 본 척할 수는 없습니다.”
‘뭐 저런 사람들도 있네.’
생산직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 역시 작업에 한창이다.
‘저기는 볼 필요 없을 것 같고….’
나는 계속해서 눈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 좀 쓸 만한 놈들은 없나.’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우리 대륙이 성공적으로 외신을 몰아내고 많은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김현성, 차희라, 정하얀, 같은 종류의 1선들이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그들을 받쳐주는 2선들 3선들의 영향력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안개 소환사 천관위, 길드에 가입하기 전의 스미스 대령, 원거리 저격수 위란, 사냥개 이주혁, 그냥 엘프 엘리오스 같이 각자의 자리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녀석들.
3선으로 내리면 더욱더 많다. 당장 기억나는 건 가로쉬 앤 캐쉬 길드의 갈오식이라든가… 김미주도 있었고… 이기연으로 만났었던 우정 길드의 이철우와 국민지도 현질로 떡칠을 해서 제법 무게감이 생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립국 라이오스에도 몇 놈 있었고, 연방이나 연합에는 몇 팀이 존재했다.
심지어 공화국에는 이런 3선 라인을 묵직하게 잡아주는 네임드들이 더욱더 많다.
‘이건 진 군사가 더 잘 알고 있을 거고….’
당연히 로헨에도 이런 인재들이 필요했고, 그것이 내가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는 이유였다.
‘시간이 없어.’
가능성이 보인다 싶으면 코인으로 직업이나 아이템 같은 것들을 사서 한 명 한 명을 전부 전직시켜야 했다.
“저… 캐시 님?”
“네? 저요? 저… 저 부르신 거 맞나요? 지휘관님!”
“아. 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물론!”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무대는 마련되었으니,
배우들도 하나하나 만들어야지.
“…….”
“…….”
한 명에게 전직 권유를 한 뒤에, 다시 한번 도시를 둘러보며 노예들을 물색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오랜만에 보는 금발 태닝 양아치가 도시로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주연 하나가 배역을 되찾으러 돌아온 것이다.
“오랜만이군.”
“네! 오랜만이에요. 효열 씨. 다른 분들도 그간 잘 지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