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79화
주연과 조연 (4)
언제나 그렇듯 부정한 힘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법이었다.
약간의 부작용이 따르기도 했지만 시간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고 파괴력 자체도 일반 진화 못지않았다.
물론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다는 페널티 자체는 반갑지 않았지만 우효열의 경우에는 김현성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 템플러 젠, 윌리엄, 등등 정리된 검술을 사용하는 근본 라인과는 다르게 우효열 같은 경우에는 번뜩이는 본능과 신체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쪽이었다.
사실상 검을 든 짐승이라고는 표현 외에는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녀석은 본능에 의지하는 검술을 추구했다.
구태여 녀석을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에 비교하자면 모든 면에서 김현성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적어도 센스나 전투 본능만큼은 녀석이 더 위에 있다.
오죽했으면 이것 하나만큼은 희라 누나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까.
애초에 강자로 태어났던 누나는 센스 자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이유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희라보다 더 야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은, 녀석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이점 중 하나였다.
‘그냥 한번 생각해 본 것뿐인데….’
생각보다 효율이 잘 나올 것 같자너.
‘무조건 강화 계열 쪽으로 가는 게 좋겠지?’
김현성의 노을빛의 검과 윌리엄의 붉은 꽃을 기술 계열이 아니라 희라 누나 같은 육체 강화 쪽으로 방향성을 잡고….
‘계약할 수 있는 악마를 알아봐야 되나?’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급 떨어지는 악마와의 계약은 오히려 녀석의 포텐을 낮추는 결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최소 까마귀 정도의 악마와 계약을 하거나 스스로 각성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판단이 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누구 때문에 저녁도 같이 못 먹었네요.”
“…….”
“진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한 자신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오빠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아니, 이제 들어온 지 1년도 되지 않은 사람이 무슨 자신감으로 꽃과 풍요의 윌리엄 님한테 대든 건지. 솔직히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구요.”
‘그래 나도 네 말에 동의해.’
“안 그래도 전시상황인데… 군 기강 잡는다고 트집 잡고 당장 목을 날려도 할 말 없는 상황 아니었어요? 그래도 부파티장님 때문에 이렇게 살아 있는 거지. 사람 참 무모하다니까.”
‘너무 그렇게 팩폭 날리지 마. 얘 상처받겠다.’
물론 들을 수 있다면 말이다.
꽤 오랫동안 기절해 있는 듯한 느낌. 혹시 쪽팔려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런 의심을 하기에는 상처가 꽤 위중하다.
신성력으로 치료를 한 뒤에도 조금의 요양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녀석의 짐승 같은 회복력이 아니었다면 최소 두 달 정도는 안정화를 취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효열 씨는 제가 돌볼 테니 채령 씨도 조금 쉬세요.”
“아… 그래도 될까요?”
‘넙죽 받아들이네.’
“네. 세인트 벨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조금 눈치가 보이지만… 부파티장님의 뜻이 그렇다면야… 큼… 큼….”
혹여나 붙잡을까. 재빠른 속도로 병실을 빠져나가는 임채령.
‘쟤는 안 되겠자너.’
이윽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녀석이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새끼가 그 이후에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살짝 자리를 비켜주자 아니나 다를까 물건들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을 이기지 못해 병실을 박살 내고 있는 것이리라.
“효열 씨!”
라고 외치며 다시 들어간 병실에 보인 것은 괜스레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우효열.
‘왜 나를 노려보고 지랄이야?’
할 말이 없는지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지는 않았지만 뭔가 여기서 나가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괜히 민망하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것이리라.
‘어림도 없지. 시바.’
캐릭터 설정상 23살 꽃기영은 너무 순수해서 눈치가 없거든. 오히려 녀석을 전력으로 위로해 주고 싶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우리 이제 친하자너. 그렇지?’
“깨어나셨군요.”
“…….”
“몸은 괜찮으신가요?”
“…….”
여전히 커뮤니케이션 장애를 가지고 있는 녀석, 만남 초반 꽃기영과 우효열의 관계라면 어리석은 행동이라며 우효열을 다그치거나 이죽거렸겠지만….
‘심지어 이 새끼도 차라리 내가 이죽거려주기를 바라고 있을 거야.’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진심으로 녀석을 걱정하는 듯한 눈빛과 행동, 정말로 깨어나서 다행이라는 무브먼트, 우효열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잠깐 상처를 봐도 될까요?”
“필요 없다.”
“그러지 마시고 잠깐….”
“내가 분명히 필요 없다고 말했을 텐데?”
“걱정이 돼서 그래요.”
“걱정할 만한 상처가 아니다. 그리고 네놈이 신경 쓸 만한 일도 아니지.”
‘이 새끼 왜 이렇게 삐딱해? 아직도 꽃기영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안 와? 시바?’
전형적으로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상황이었다.
본인이 쪽팔리고 할 말이 없으니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이었고, 지도 면목이 없으니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급 개망신 한 번으로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시점.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게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꽃기영이 선택한 것은 한껏 성을 내는 것이었다.
“걱정이 된다고요!”
꽃기영 답지 않게 한껏 지른 목소리.
“뭐?”
내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녀석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잠시.
이내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는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효열의 눈동자의 비치는 꽃기영이 보인다. 한껏 창백해진 얼굴과 덜덜 떨리는 몸, 흔들리는 눈빛과 정상적이지 않은 호흡.
조금 정답을 맞히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아마 녀석이라면 꽃기영이 어째서 이런 증상을 보이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이기영은 우효열의 상처에서 레이먼 볼트를 투영하고 있었다.
‘다시는…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아….’
“…….”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다시 한번 더 동료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제는 전부 이겨내 털어냈다고 생각했던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이기영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파티 전체가 레이먼 볼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우효 녀석이 빠르게 눈치챈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흥.”
“…….”
“별것 아닌 상처다.”
‘그래? 그런 것치고는 시바 피를 너무 뿜으면서 쓰러지던데요?’
“검이 얕더군. 네놈이 뭘 걱정하는지는 예상이 되지만 정말로 걱정할 필요 없다. 이까짓 상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별로 아프지 않았다는 걸로 자존심을 챙기려는 것 같아 조금 불쌍해 보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져주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찌 됐건 간에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
“아니, 다행이 아니죠. 어째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던 건가요?”
“…….”
“아카데미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군요. 뭐가 그렇게 효열 씨를 급하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무모했어요. 물론 당신이 무모한 건 알고 있었지만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행동이었다고요.”
“…….”
“당신은 강해요. 그리고 더 강해질 거고요.”
‘내가 진화시킬 거야.’
어둠진화 아웃풋은 스컬 그레이 현성과 구역질 나오는 바하무트 정도밖에 없기는 한데… 하나는 실패, 하나는 걸작이었어.
근데 그 실패한 것도 실수였구… 제대로만 하면 너도 윌리엄처럼 필살기 하나 가져갈 수 있어.
아니, 필살기가 아니지 너는 강화계열로 가야 되니까 패시브 스킬이라 보는 게 맞지.
어둠진화가 괜히 쉬운 것이 아니다. 일반 진화 같은 경우에는 대상의 멘탈이나 상태, 어떤 서사를 가지고 있느냐 어떻게 설계했느냐가 중요하지만 둠진화 같은 경우에는 키워드가 무척 간단하다.
‘누구 하나 뒈지면 되자너.’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놈들이 분노 같은 1차원적인 감정에 매몰되고, 그게 본인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곧바로 길이 열린다.
트리거를 어떻게 건드리느냐, 어떤 수단을 사용하느냐 정도의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진화에 비하면 쉬운 편이다.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춘 우효열에게 필요한 건 하나.
‘넌 나랑 더 친해져야 돼.’
레이먼 볼트 이후로 제법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지금 상태로 내가 뒈진다고 해도 놈이 매몰될 것 같지는 않았다.
무력함, 열등감 따위의 감정이 좋은 조미료가 되어주겠지만 그 조미료 역시 메인 메뉴와 잘 어우러져야 효과가 있는 법.
이를테면 녀석의 부족함으로 소중한 동료를 잃게 만드는 상황이 온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효열이 입을 연 것은 꽃기영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한참이나 생각에 빠진 녀석은 항상 그렇듯 뜬금없고 거침없게 입을 열어왔다.
“네놈.”
“네?”
“도대체 윌리엄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1회차와 비교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해진 녀석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달라진 것은 이기영이 녀석의 옆에 붙어 있었다는 것 하나.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1차전에서도 내가 영향력을 끼쳤으니까. 아무래도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물론 설명하는 것은 쉬웠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으니 말이다.
“설명하자면 길어요. 제가 뭔가를 했다기보다는… 꿈의 세계에 다녀왔었거든요. 아니, 이걸 다녀왔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윌리엄 님과 저는 제 꿈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
“악마 하나와 500번이 넘는 사투를 벌였고… 윌리엄 님은 500번이 넘는 죽음을 경험했어요. 중간중간에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 많았었지만… 윌리엄 님이 결국 이겨내신 거죠. 좀 전에 효열 씨가 봤던 게 바로 그 결과예요.”
“…….”
“그렇군.”
물론 이후에도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배경 설명이 꼭 들어가야 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기영 안에 ‘어떤 것’이 봉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악마들이 ‘어떤 존재’를 노리고 있다는 것과 꿈의 세계를 만든 것은 그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우효열도 윌리엄과 비슷한 방향으로 생각이 닿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번 메인스트림을 공략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눈앞에 있는 성자라는 것. 어쩌면 강해지는 열쇠도 내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조금은 절박해진 녀석이 기특한 질문을 던져왔다.
“이기영.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다만….”
“네?”
“네가 보기에는….”
“…….”
“내가 어떻게 해야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지?”
번개가 내리친 것 같은 충격이 느껴진 것은 녀석이 앞선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이게…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조금 깨닫는 것이 늦기는 했지만.
‘설정상 나 이 새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로헨에 오지 않았나?’
설정상 꽃기영의 안에 있는 어떤 것은… 어쩌면 우효열의 어둠진화를 위해 안배된 거라는 흐름으로 가도 되지 않을까.
아니, 그게 맞는 것 같다.
아무 설정이나 전부 다 때려 박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스토리로 연결되고 있었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
“제가… 제가… 네… 하… 하하… 명확한 방법을 제시해 드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게 옳은 방법이 아닐까요?”
조금은 이상한 반응이었지만 우효열은 별생각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쯤에서 복선을 슬쩍 깔아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효열 씨는 분명히 강해질 수 있을 거예요.”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려보자.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말이다.
“제가 장담할게요. 분명… 강해질 수 있을 거예요.”
“…….”
“…….”
꽃기영은 그릇이었다.
그의 안에 들어가 있는,
세상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힘은 우효열에게 넘겨주기 위한 힘이었으며,
꽃기영이 그 힘을 억누르고, 정화하고, 정제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고 있다는 설정이 방금 추가됐다.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