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80화
로헨은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정은 아직 내려온 게 없는 거지?”
“네. 하지만 조만간일 것 같아요.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물자 상황이나 분위기를 보면 대충 알 수 있으니까요. 적어도 이주, 아니 빠르면 일주일 이내에 출발할 가능성이 높겠네요.”
“참. 이것도 문제야.”
“네?”
“어디서는 너무 빠르다고 난리, 어디서는 너무 느리다고 난리, 우리 총지휘관님 스트레스받아서 어떻게 해?”
통칭 ‘아헨델의 바람둥이’ 캐시의 한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세인트 벨 탈환 작전에 참여하기 전에 품고 있었던 온갖 의심과 꽃과 풍요의 성자의 능력을 의심하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꽃과 풍요의 성자를 아끼는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 안 그래? 뒤에서 이래라저래라 훈수 둘 거면 지들이 상석에 앉든가. 병법은 개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원시인들한테 문명의 이기를 가르쳐 줬더니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 아주 누가 들으면 천재군사가 총지휘관이 아니라 지들인 줄 알겠어.”
“…….”
“내 말이 틀려 맞아? 조니아.”
“이하동문.”
“아주 싹 다 잡아다가 지들끼리 공략해 보라고 등 떠밀려 나가봐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라니까. 짐승도 은혜를 아는데 이 새끼들은 은혜를 몰라요. 만약에 총지휘관 없었어 봐. 세인트 벨? 아헨델? 로헨 자체가 아주 개박살 났을걸. 그렇지 않아?”
“이하동문.”
“정확한 때라는 게 언제인지 우리 총지휘관님 말고 누가 알겠어? 당장 내일 출진하자고 해도 이유가 있는 거야. 내 말 맞지? 알레리아.”
“네. 캐시 말이 맞아요. 실제로 지휘본부에서 출정 시기를 탄력적으로 잡으려고 하는 이유도 총지휘관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흐응. 그래서… 요즘은 조금 어때 알레리아. 삶의 낙이 생기고 막 그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당신은….”
“왜 모른 척해? 알레리아. 너 경호 병력으로 차출됐잖아. 총지휘관님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으니까. 매일 같이 눈요기하고 있는 거 아니야?”
“눈요기라니요. 이상한 말씀은 그만둬 주세요. 저는 그런 목적으로 지원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왜 나는 떨어졌는지.”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행실 문제겠죠.’
어째서 갑작스레 경호 병력들을 차출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버림받은 성녀의 군대 이전에 총지휘관님을 납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본부에서 정확한 사유를 공지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지원했고 합격했다는 것 하나였다.
기본적인 테스트는 물론 면접도 8차 면접까지 있었으니 기준이 얼마나 빡빡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구에서 무엇을 했는지, 활동하는 도시에서의 이력, 사상검증, 아주 사소한 부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심층적으로 조사하고 파고든다.
곧바로 투입될 경호 인력이 필요했던 만큼 시간은 짧았지만, 생에 가장 힘들었던 경험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아헨델의 바람둥이 캐시에게는 결격 사유가 많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그녀의 추문들은 둘째 치거니와 짧게나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던 이력이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술에 취해 여관의 기물을 파손한 경범죄였지만 경쟁자가 많았던 만큼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
“아무튼 간에 알레리아… 이제는 정보 좀 공유할 때도 되지 않았어? 총지휘관님은 요즘은 뭐 하고 지내셔?”
“말씀드릴 수 없다고 말했잖아요. 캐시. 캐시가 평소에 보는 것과 똑같아요. 총지휘관님이 계속 지휘본부에 계시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자주 모습을 보이시잖아요.”
“…….”
“파티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와 함께 보내시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는 파티원들과 계속 함께 있으세요. 물론 업무 시간을 제외하시고요.”
“에이. 나는 그런 걸 듣고 싶은 게 아니라고. 안 그래? 조니아?”
“이하동문.”
“설령 다른 활동을 하시더라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저도 웬만하면 말씀드리고 싶은데… 보안이 걸려 있어서… 만약 말해드린다고 해도….”
“…….”
“정말로 그것 외에는 다른 활동이 없으시다고요.”
“됐어. 말해주기 싫으면 말해주기 싫다고 해. 치사해가지고… 가자. 조니아.”
“난 안 갈래.”
“쳇.”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낸 친구 인지라 잔뜩 삐져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정말로 할 수 있는 해줄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총지휘관님의 하루 일과는 무미건조하다면 무미건조했으니 말이다.
할당되어 있는 기본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간다.
뭐가 그렇게 확인할 것이 많은지 새벽부터 일어나 계속해서 서류를 정리하기 일쑤였고, 직접 야전으로 나와 병사들의 훈련과 보급상황을 매일같이 체크하기도 했다.
실상 자유시간이랄 게 없었지만 그 짧은 시간을 활용하실 때면 꼭 파티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식사시간이라든가, 잠깐의 여가시간이라든가 모두 파티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웃음꽃을 피웠다.
몇몇 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총지휘관님의 모습은 세인트 벨 곳곳에서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 이들이 볼 수 없고, 자신만 볼 수 있는 모습을 굳이 말한다면….
“…….”
“…….”
바로 저런 모습들이었다.
캐시와 조지나와 헤어진 직후, 다시 업무에 복귀하고 난 이후에 보이는 광경.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 말이다.
“…….”
아무 말 없이, 정말로 아무런 말도 없이 홀로 있을 때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조차 보여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처럼,
최근 들어 그는 슬픈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는 했다.
당연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가 어떤 심정인지는 한낱 범인에 불과한 자신이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기영.”
“네. 효열 씨.”
“아! 효열 오빠. 또 잔소리하려고 한다. 오빠나 좀 잘해요! 괜히 우리 부파티장님 속 썩이지 말고. 술맛 떨어지게. 자! 이러지 말고 담혜 언니도 한 잔 드세요.”
“네? 저는 갑자기 왜….”
“다 같이 취해야 재미있잖아요!”
파티원들과 함께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듯,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라는 듯이 웃음 짓기도 했었지만.
밤이 되어 숙소 안으로 들어갈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적막함이 언제나 그를 휘감기도 했다.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말이다.
캐시와 조니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뭔가를 말해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캐시가 던진 쓸데없는 물음표 때문에 남들이 볼 수 없고,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지켜보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꽃과 풍요의 성자라는 이면 뒤에 가려진 그림자를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파티장님. 제가 밥 꼭 같이 먹자는 게 매끼 만나서 시간 보내자는 이야기는 아니었다고요!”
“제가 조금… 귀찮게 했나요?”
“채령아.”
“언니! 당연히 나도 좋다고 한 소리였지.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부파티장님! 절대! 절대 부파티장님을 귀찮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물론 저도 사람인지라 혼자만의 시간이 조금 필요하기는 하지만 언제 또 우리 파티가 이렇게 뭉치겠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소중한 사람들과 어떻게든 시간을 함께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효열 씨. 말씀드릴 게 있는데….”
“무슨 일이지? 그것에 관해 생각이라도 난 건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지금부터 훈련할 시간이다. 네놈은… 다른 일이 없는 건가?”
“저, 저는 딱히 할 일도 없어요. 그보다 잠깐 시간을 내주시면….”
“훈련할 시간이라고 말했을 텐데?”
“아… 그러면… 저는 그냥 구경할게요.”
“흥.”
조금이라도 더 소중한 이들을 자신의 눈에 담아두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짧은 휴식시간에 구태여 파티원이 훈련하는 것을 바라본다든가, 무리를 해서라도 시간을 내 여가 시간을 맞춘다든가.
그의 파티원들이 보이는 곳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파티의 음유시인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임채령이라는 여인과 함께 시끄럽게 떠들며 우효열의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의 그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언제나 정숙하고 품위 있고, 기품 있는 모습을 잠깐은 집어 던지며 나쁜 놈 같은 종류의 욕을 어색하게 내뱉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용히 웃음 짓기도 했다.
“하하하하하!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요? 부파티장님?”
“…….”
성기사로 전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파티의 사제와는 함께 기도를 드리거나 로헨의 신학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고, 함께 레이먼 볼트라는 노전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럴 때의 그는 무척 억지로 슬픔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언제나 파티원들에게 말하고는 했다.
할아버지는 죽지 않았다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시잖아요.”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언제나 살아있을 거라고. 우리가 그를 잊지 않는 한 그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있을 거라고. 함께 웃고 함께 떠들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이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 눈에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잊지 말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 같았다.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자신은 언제나 당신들과 함께 있을 거라고, 함께 웃고, 함께 떠들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발악하듯이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효열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듯 그의 말을 끊었지만, 그는 여전히 웃음 짓고 있었다. 아마 그게 그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그랬으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 느껴졌었으니까.
이제는 저 둘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이때 즈음에,
그는 이따금 글을 쓰기도 했다. 무슨 글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것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총지휘관님. 원정 계획은….”
“아직이에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꼭. 말씀드릴게요.”
업무를 진행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쓰고는 했다. 여전히 파티원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였지만, 간혹 먼저 빠져나와 글을 쓰고는 했다.
나는 아마 그 글이 그의 친구와 그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전하는 편지, 혹은 그들에게 전하는 싶은 어떤 것. 그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말이다.
그는 언제나 하늘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의 친구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우효열이 훈련하는 모습을 멍하니 앉아 바라보며 간혹 이야기를 나눴고,
노담혜와 함께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임채령과 함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어린아이처럼 웃었고,
남궁선과 함께 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레이먼 볼트를 기리고는 했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웃었고,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글을 썼고,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발악하듯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고,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글을 쓰는 것을 멈췄을 때,
“…….”
“…….”
로헨은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