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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82화 (1,18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82화

노을빛의 마왕성 (2)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두 번째 이야기. 노을빛의 마왕성이 시작됩니다.]

메시지가 들려왔음에도 침묵에 빠진 병력들을 눈에 보였다.

버림받은 성녀 때와는 다르게 저 메시지에서는 고양감과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을 수 없는 모양.

마왕성 자체가 주는 압도적인 분위기와 압박감이 있었으니 그리 느낄 수도 있다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잘 만들었네.’

누가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노을빛의 마왕성은 제법 던전다운 느낌을 준다.

고풍스러운 디자인과 압도되는 것만 같은 규모와 크기. 잿빛노을과 어우러지는 그것의 풍경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지옥으로 온 손님을 환영하는 아가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만든 게 아니지 리모델링을 한 거지. 저기 원래 뭔 왕성이라 하지 않았었나.’

왕국의 생존자 5왕녀 메리벨을 비롯한 몇몇 놈들이 비통한 표정을 게 당연했다.

악마 놈들에 의해 왕가의 자존심이 훼손이라도 됐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다른 놈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의무감이나 책임감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보이는 상황,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곳에는 들어가기 싫다고, 아마 나 역시 뭣 모르고 왔다면 병력을 뒤로 물리지 않았을까.

“이기영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이프티 존을 만드는 게….”

“아니요. 곧바로 진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21군단의 악마들에게 포위되기 전에 말이에요. 힘들게 추적자들을 떼어내서 겨우 이곳까지 도달했는데 그걸 무위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군요.”

“세이프티 존을 만드는 건 마왕성 안이 될 거예요.”

김예리를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이 길을 열어준 것이 크기는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적들의 의표를 찌른 셈이었다.

악마 놈들조차 한 번에 노을빛의 마왕성으로 들어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는 스토리텔링.

지휘본부에서는 천재군사의 능력이 또다시 발휘되었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는 했지만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쪽에 오기 전에 전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전투가 아니라 잿빛노을 지역의 방어선을 유지하는 악마들이었다.

파란 길드 쪽에서는 길을 열어준다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21군단은 파란 길드의 것이 아니라 김현성의 것이 아니었던가.

지들 주인이 주먹질로 곤죽이 되는 걸 실시간으로 봤을 테니, 지들도 숙청되고 싶지 않다면 필사적으로 이쪽을 저지하려 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외성을 지키고 있는 악마 새끼들의 경우에는 절대로 이쪽을 입장시켜 주려고 하지 않겠지만 대책은 마련되어 있다.

“이만한 병력이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 없으니까요. 그럼….”

“네.”

“길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메리벨 님.”

“솔직히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아요. 하수로를 이용해 왕성을 빠져나갔던 것은 어릴 때나 자주 했던 일이고… 철이 들어서는 중앙 제국 아카데미에서 생활했던 터라… 자신만만하게 알고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왜 지금 와서 보니까 자신이 없어졌어?’

“괜찮아요. 멜번 마을로 길이 이어진다고 말씀해 주신 걸로도 충분해요. 아마 사전에 말씀드렸던 것을 토대로 정찰대가 먼저 구역을 조사하고 있을 거예요.”

“네.”

입술을 꽉 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비장한 얼굴.

솔직히 망국의 5왕녀가 제대로 된 길을 알지 못해도 별로 상관없기는 했다. 김예리가 사전에 받은 마왕성의 설계도가 머릿속에 있었으니 말이다.

5왕녀의 존재는 그냥 내가 길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를 채워주기 위한 개연성이다.

곧바로 발을 옮기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정문으로 가는 것도 나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태여 공성전까지 치러가며 억지로 문을 뜯어낼 필요는 없었다.

전자가 조금 더 드라마틱한 입장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했겠지만 숙청당할지 몰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악마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은 피해가 너무 크다.

“하수구의 입구는 총 세 개예요. 그렇죠? 메리벨 님?”

“네? 아… 네. 그런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첫 번째, 두 번째 입구는 멜번 마을의 지하수로와 연결되고. 나머지는 페들링턴 강으로 이어질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메리벨 님?”

“아아! 네! 그… 그랬…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부터는 병력을 세 개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가장 규모가 큰 첫 번째 입구는 꽃과 풍요를 중심으로, 나머지 둘 역시 사전에 말씀드린 대로 병력을 구성하겠어요. 원거리 통신마법을 이용해 제가 상시 지켜보고 있을 테니, 특이사항이 생기면 곧바로 보고해 주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아네모네의 눈을 가지고 있는 정하얀은 당연히 이쪽이 데리고 가는 게 맞지만 아쉽게도 아헨델의 한소라를 데려갈 수는 없다.

꽃기영과 정하얀 그리고 꽃과 풍요가 포함된 집단이 1연대.

아헨델의 영웅들과 한소라를 중심으로 짜인 곳이 2연대.

마지막 로헨의 상위 인사들과 우효열 파티가 3연대.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이쪽에게 말도 없이 떠나고 있는 우효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임채령과 남궁선, 노담혜 같은 경우에는 슬쩍 눈인사를 하고 있는 중.

어차피 파티와는 따로 연락망이 마련되어 있고, 지하수로를 통과한 이후 성에서 만나게 될 테니 짧은 이별이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은밀하고 신속하게.

“오. 사.”

빠르게.

“삼, 이, 일.”

“…….”

“주문.”

“은폐의 그림자.”

마법사들 여럿이 한꺼번에 중얼거린 주문, 병력 전체에 계속해서 걸려 있었던 투명화 마법을 다시 한번 리필한 이후에 작전이 시작된다.

다시 한번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주문을 외우자, 이속증가 버프를 비롯한 인식 저하 마법이 계속해서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듯한 감각. 민첩을 위주로 성장시킨 이들도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병력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지속시간은 짧다. 병력 전체에 한꺼번에 버프를 걸어줄 수 있는 성녀급의 사제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이동하는 것이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아마 마왕성에 들어간 직후, 많은 마법사들이 마력 부족을 호소하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 걸음을 디뎠을 뿐인데 마치 두세 발자국을 이동하고 있었고, 선봉의 같은 경우에는 이미 한참을 치고나가고 있다.

1,000명이 넘는 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맞춰 빠르게 이동하는 것은 장관 아닌 장관.

내 옆에서 나를 보좌하고 있었던 꽃과 풍요의 에밀리아가 손가락을 2개 들어 올린 것은 이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병력을 세워뒀었나?’

그에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니 고개를 끄덕인다.

결과는 금방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동하는 도중, 지하수로 입구에 쓰러져 죽어 있는 하급 악마들 시야에 비쳐온 것이다.

‘선봉대는 이미 지하수로에 진입.’

적 병력의 층이 엷다. 김예리가 이쪽을 배려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

2대대와 3대대 역시 비슷한 시기에 지하수로에 진입. 숨이 턱 막힐 만큼 역겨운 오물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시바.’

그냥 공성전 하면서 편하게 입성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악취였다.

“투명 마법 해제하세요.”

“네.”

“2연대. 3연대도 마찬가지예요. 마력 아껴요. 예비대는 퇴로를 확보하고 나머지는 안으로 진입합니다.”

“네.”

-네.

-네. 총지휘관.

-2연대. 전투 시작합니다. 잿빛노을의 영향을 받은 마물로 판단됩니다.

“무운을 빕니다.”

‘저건 무리 없어. 오히려 더 좋지.’

3연대도 별다른 트러블 없이 올라가고 있고….

이후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진입 작전 자체는 성공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튼 간에 마법을 해제한 이후 부대 정비를 하고 있는 윌리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법사들의 마력 상태나 체력 상태를 확인한 이후에는 곧바로 정찰대를 불러 주변에 수색 명령을 내리고 있는 상황.

내게 너무 많은 부담이 쏠려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 좋아. 사람이 저래야지. 학습 능력이 있어야지.’

“메리벨 님. 마왕성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약 3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될 거예요. 조금 더 빠를 수도 있고요. 원래 이곳에 마물 같은 건 없었는데….”

메리벨과 필요한 대화를 나누며 계속해서 움직이자 어느덧 넓은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1번 하수로가 제일 넓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꽤 넓어 보이는 장소.

이쪽 인원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내가 던전을 디자인 했다면 문지기를 배치했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김예리를 비롯한 파란 길드원도 던전은 질릴 정도로 다녀왔으니 이 정도 감성은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찰나.

“어리석은 손님들이 오셨군요.”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흥. 흐흥… 자신들의 주제도 모르고 마… 마왕성을 찾아오다니…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작은 문제가 있다면 마치 국어책을 읽는 것만 같은 톤이었다는 것.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이 딱딱하게 들려오는 말투. 시바 심지어 진짜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아… 쟤 누가 여기 세웠어.’

파란의 막내라인 중 하나.

‘쟤를 여기에 왜 세웠어….’

알프스였다.

‘아. 김예리. 진짜. 아!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지 뭐 이렇게 준비를 많이 했어?’

반가움보다 먼저 들어선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그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입은 복장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살다 살다 쟤가 비키니 아머 같은 걸 입은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갑옷을 입더라도 언제나 펑퍼짐한 베이지 색에 로브를 입고 있었던 알프스.

애초부터 정체성이 순박한 시골 소녀였다. 파란 길드에 들어온 이후에도 그 수수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팬들이 많지 않았던가.

언제나 단정했던 머리를 가리는 투구에는 커다란 뿔이 달려 있었고, 심지어 비키니 아머도 뿔이 달려 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채찍을 들고 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알프스, 90년대 전대물의 여간부를 떠올리게 하는 복식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푹 숙이고 있기까지 하다.

심지어 정하얀과 이쪽을 발견한 이후에는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모양새.

‘인사하지 마. 시발. 인사하지 말라고….’

허리를 꾸벅 숙이려다 본인의 역할을 깨달았는지 급하게 자세를 고쳐 잡았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 자체가 이상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대사도 치지 마. 제발. 부탁이야.’

“흥… 흐으응~”

‘콧소리 내지마. 섹시한 여간부 컨셉도 버렸으면 좋겠어. 제발.’

“제게… 조… 조오…련 당하고 싶은 필멸자들이 많이 찾아왔군요.”

‘조오련은 또 뭐야? 무슨 컨셉이야. 자꾸 채찍으로 바닥 때리지 마.’

쫘악!

쫘악!!!

쫘악!!!!

하는 소리들이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 심지어 채찍을 휘두르는 폼도 어색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흰둥이는 또 어디다 두고 왔어.’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그녀의 뒤편에서 세 마리의 거대한 마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의 컨셉과 기믹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처구니없게 진행될 뻔했던 첫 번째 네임드와의 조우를 살려준 것은 알프스의 어설픈 연기력과 비키니 아머 따위가 아닌 그녀가 부리고 있는 세 마리의 마수들.

“크르르르….”

“케륵….”

같은 소리를 내며 침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지옥의 맹수. 얼굴을 붉히며 필사적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알프스만 아니었다면 제법 그림이 나올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왜 저 갑옷에 망토까지 입은 거야? 마수를 조련하니까 채찍을 써야 되고 채찍을 쓰니까 여왕님 속성을 집어 넣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그런 거야? 예리야?’

“흐으으응~ 문답무용.”

그 누구도 알프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도대체 왜 문답무용이라 말한 것일까.

부끄러움에 당장에라도 던전을 뛰쳐나가고 싶다.

“그럼. 거두절미 하고~ 이 마수조련사! 알프스가 상대해 주겠어요! 어리석은 필멸자들이여!”

[던전, 노을빛의 마왕성의 첫 번째 보스. 마수조련사 알프스와 조우합니다.]

거대한 세 마리의 야수가 병력을 향해 쇄도하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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