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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84화 (1,18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84화

노을빛의 마왕성 (4)

최소한 성채에 입장한 이후에 흑집사 스미스를 등장시키면 안 되는 거였을까.

지하수로에서 적들을 기다리고 있는 집사라니 기가 차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바 차라리 집사라고 하지나 말지.’

물론 집사가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않은가.

아니, 잘잘못을 따지자면 초반 네임드 라인에 쟤가 포함되어 있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이거 진짜로 괜찮은 건가?’

지하수로 투기장 투사 벨리에의 경우에는 걱정이 되지 않는다.

부여된 기믹도 근접 공격에 특화된 네임드처럼 보였고 상성상 한소라를 이길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벨리에 자체의 포텐이 다른 이들에 비해 낮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이형적인 갑옷에 파묻혀 실루엣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주먹을 들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아는 벨리에 그 자체였다.

상대방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용도로 한 손을 길게 빼내고 가슴에 붙인 손은 언제든지 수인을 맺을 수 있게 준비하고 있는 모양새.

습관이나 걸음걸이 같은 것 역시 모든 게 벨리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당황스럽게도 온몸을 가린 거대한 갑주는 오히려 투기장 투사 벨리에의 힘을 봉인하는 용도로 보인다.

공격에 의해 갑옷이 벗겨질 때마다 더욱더 까다로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갑옷이 벗겨졌을 때 2페이즈가 시작되는 종류의 기본적인 구성이겠지.

-호오홋홋홋! 만 번째 제물은 누구냐!

‘그 웃음소리는 마왕성 여간부들 특징인 거야?’

눈앞에 알프스보다 나았던 것은 그녀가 그다지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었다.

의외로 체질인 것인지 2연대를 쥐락펴락하며 공략을 진행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거기! 너희들! 결투다!

지하수로에서 벽이 올라와 벨리에의 지목한 이들 외의 병력들을 가로막는다.

투기장 투사라는 기믹상 자체적으로 투기장을 만들고 분할된 적들을 상대할 수 있는 모양.

21군단의 힘을 받아 스펙이 올라갔다고 한들 아직까지 이 정도 규모를 상대해 본 적이 없는 벨리에에게 딱 맞는 기믹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왜 이렇게 살벌하게 패?

투기장으로 끌려온 놈들이 말 그대로 아작이 나고 있다는 것 하나였다.

-하압!

주먹질 한 방에 한 사제의 온몸이 벽에 튕겨 나가 나뒹군다.

온몸의 뼈가 바스러져 비틀린 것처럼 보였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

갑주 자체가 크고 무거운 만큼 방어력도 뛰어난지 웬만한 공격들은 전부 무시하며 불도저마냥 고립된 이들을 쥐어패고 있었다.

-이 감촉! 이거야!

‘진짜 연기 아닌 것처럼 보이자너.’

의외로 공략하기 까다로워 보이기는 했지만, 공략까지는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비명 소리나 혼란이 생겨나는 와중에도 한소라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투기장에 진입하는 순간 어느 정도 갈피가 잡히겠지.

다시 한번 2연대 쪽을 바라봐도 크게 문제가 없다.

두 번째 패턴이 조금 복잡하기는 했지만 변수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미비했으니 크게 지켜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기실 문제가 되는 것은 흑집사 스미스 쪽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악!

-피해! 피해!! 마력탄환이다!

-제길…

-엄폐물에 숨어! 마법사들 제기랄 뭐라도 해보란 말이야!

-제길! 여기 중상자다! 중상자가 있어! 제기랄!

쾅! 쾅쾅쾅!

자욱한 연기가 흩어진 이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랜만에 보는 스미스 대령, 아니, 흑집사 스미스, 집사의 상징과도 같은 멋들어지는 콧수염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이마 위로 돋아난 두 개의 뿔. 흉측해 보인다는 느낌이 아니라 의외로 본래부터 있어야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컨셉을 지키고 싶은지 평소와 다르게 알이 작은 안경을 쓰고 있는 것도 차이점, 물론 언제나 절제되어 있는 움직임은 여전했다.

‘여전히 딱딱해 보이자너.’

꼿꼿하게 서 있는 자세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뒷짐을 쥐고 있는 비주얼은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집사 그 자체인 것처럼 보였지만 아쉽게도 여기는 악취가 풍겨오는 지하수로였다.

이 새끼는 그냥 정장을 입은 채로 지하수로에서 시간을 보내는 빌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사막에서 북극여우를 마주친 것만 같은 부자연스러움이었지만 당연히 잘못된 출몰 장소와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는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꼼짝도 못 하자너.’

어처구니없게도 지하수로로 향하는 길에 3연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엄폐물 뒤에 숨거나 흑집사 스미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허억… 허억….

-…….

-제길… 제길… 으아아아아아아아!! 호영아!

한 녀석이 길 위에 쓰러져 있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몸을 보였을 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몸에 바람구멍이 뚫리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전투 방법은 원본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마력탄환을 쏘아 보내는 방식.

‘뭐 저렇게 빠르지?’

차이점은 훨씬 빠르다는 것이었다. 언제 탄환을 쏘아 보냈는지 아군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흑집사 스미스는 뒷짐을 진 채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으니까.

모습을 드러내면 죽는다. 아마 3연대의 모든 플레이어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아닐까.

-이 앞은 노을빛의 마왕성입니다.

-하아… 하아….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입장하실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부디 예를 지켜 돌아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 때문인지 나름대로 감정선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듯한 느낌.

구태여 연기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스미스 대령은 캐릭터를 잘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본인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대사를 칠 때마다 자꾸만 콧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것처럼 보이고 있으니 지금 모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컨셉 덕분에 부여된 역할이 적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지 않을까.

기믹이고 특징이고 할 것도 없다. 흑집사 스미스의 목적과 역할은 자격이 있는 자와 자격이 없는 자들을 걸러내는 것.

노을빛의 성채의 집사인 자신을 뚫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인 네임드라 할 수 있으리라.

‘이거 한 놈도 통과 못 하는 건 아니지?’

-제길… 제기랄….

물량으로 밀어내는 방식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서기는 했지만 피해가 너무 크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기관총을 가지고 있는 적과 칼 만들고 골목에서 마주친 격.

10명이 달려들든, 100명이 달려들든 간에 결과는 똑같다.

시체가 벽이 되어 방패막이 되어주지 않는 한 뚫어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괜히 저 많은 인원들이 엄폐물에 숨어 있겠는가.

-탱커 먼저 앞으로 나서야 돼. 방패 세우고 최대한 빠르게 밀어붙인다. 사제들은 회복 마법 외울 준비하고 마법사들은 쉴드 걸어놔.

-저걸 상대로 될까?

-될까 안 될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야. 일단 시도해 보는 게 중요해.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야? 후우… 후욱… 후욱… 나가자. 아니, 내가 먼저 나간다. 곧바로 지원해 줘.

-확인.

-방패조 나가!

-의미 없는 발버둥입니다.

온갖 버프로 떡칠을 한 방패조가 튀어나온 이후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벌집이 되어버린다.

-크아아아아악!

쿨럭! 하고 피를 토하는 녀석의 뒤로 보급형 박덕구가 한 발자국을 앞으로 옮기려고 하지만 녀석 역시 발을 내리기 전에 뒤로 날아간다.

방패조의 뒤에 숨어 활을 날리려던 궁수도, 쉴드로 지원을 하려고 하는 마법사도, 부상자들에게 치유마법을 걸려고 하는 사제도 계속해서 마력 총탄에 몸에 구멍이 생기며 허물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제길! 사제!

-아아아아아아아악!

-움직여 전진해! 전진하라고 이 새끼들아!

-쿨럭. 쿨럭… 우웩….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디렉터의 설계 미스가 불러온 참혹한 현장.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야 뭐야.’

-계속 가! 계속!

‘어디를 가, 몇 발자국도 전진 못 했는데. 너희들.’

-계속 전진해! 방패 들어!! 제길! 쉴드! 쉴드!

쩌엉! 쩌엉! 쾅! 쾅! 콰아아앙!

아예 두 손을 들어 올린 채로 마력총탄을 발사하는 모습. 계속해서 연기가 자욱해진다.

쾅! 콰드드득! 쾅! 쾅! 쾅!

-아아아아아악!

-공격! 공격해! 움직여!

쾅! 쾅! 쾅! 콰드드드득! 쾅! 쾅!

‘스미스 대령은 적당히라는 걸 몰라?’

-으윽… 아으… 살… 살려줘….

-이야아아아아아아! 이 더러운 악마 새끼야!

-부상자를 뒤로 빼고 물려!

-제길!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원들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버린다.

무표정으로 계속해서 마력탄환을 쏘아 보내고 있는 흑집사 스미스가 자세가 흐트러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효열아.’

쇄도하는 것은 발톱을 숨기고 있었던 검은 짐승.

보일 리가 없는 탄환을 피해가며 낮은 자세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떡이 된 탱커 하나를 방패 삼아 전진하기도 하고 벽으로 달리며 몸을 피하기도 한다.

쾅! 쾅! 콰아아앙!

두 자루의 검으로 몸으로 날아오는 총탄을 계속해서 쳐내며 전진하고 있는 모습.

보호마법이 계속해서 우효열에게 떨어진다.

-보호의 선율!

음악이 흘러나오며 파동이 녀석의 몸을 감싼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우효열의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시바! 효열아!’

다시금 고개를 원 상태로 복구시킨 녀석의 이빨에는 마력탄환 한 발이 걸려 있었다.

‘나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아! 시바!’

-퉤! 별거 없군.

흑집사 스미스도 깜짝 놀랐는지 눈이 살짝 크게 뜨여지는 것이 보인다. 대사를 쳐야 한다는 게 기억이 났는지 뒤늦게….

-호오…

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우효열 이 새끼… 확실히 감각은 좋아.’

지금까지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저 탄환에 익숙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본인이 피할 수 있을지,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대략적인 판단을 마친 이후라서 그런지 움직임이 더 자연스럽다.

흑집사 스미스가 두 손을 들어 올린 것은 우효열이 다시금 발걸음을 옮긴 직후.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합격.

-뭐?

-당신은 합격입니다. 위로 올라가셔도 좋습니다.

-하.

-당신 같은 사람들은… 네. 계약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그럴 자격 역시 충분합니다. 혹시나 해서 묻겠습니다만… 계약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쓸데없는 걸 묻는군.

-노을빛의 마왕성의 집사가 되는 자에게는 당연한 질문입니다.

-…….

-저는 악마이자 집사니까요.

잠깐 동안의 소강상태, 우효열도 팔을 내린 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마치 스미스의 발언을 받아들일 것처럼 말이다.

우효열에게 적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스미스 대령 또한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우효열은 스미스 대령의 앞에 서서 고개를 위로 올리며 중얼거렸다.

-거절이다. 개자식.

스미스 대령의 콧수염이 살짝 떨린 것이 보인다.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마치 짐승의 눈처럼 길고 가늘어진 눈동자가 두드러졌다.

‘화났다.’

스미스 대령 빡친 거 가터.

-방금….

-네놈 상판이 마음에 안 들어서 거절한다고 이야기했다.

‘쟤 화났다.’

안 그래도 이상한 연극 때문에 굴욕을 겪고 있는데 뭔 듣도 보지도 못한 양아치가 반항해서 열이 뻗치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의 스미스 대령이라면 무덤덤하게 넘길 만한 사건이었지만….

‘집사 컨셉 주고 지하수로에 떨궈 놨으니 예민해질 만하기는 했지.’

말은 필요 없었다.

곧바로 손가락에 탄환을 장전한 스미스 대령은 근접거리에 있는 우효열을 향해 탄환을 쏘아 보낸다.

-손님에게는 친절한 것 아니었나?

-입 다물어라.

‘컨셉은 깨지는데….’

이건 또 이거 나름대로…

‘흥미진진하네.’

1연대 쪽에도 마수조련사 알프스와 고군분투가 펼쳐지고 있기는 했지만,

“윌리엄!”

“으아아아악! 쉴드!”

“곰부터 밀어내!”

솔직히 쟤네가 우리 쪽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 역겨운 얼굴에 칼집을 새겨주지.

-든 것 없는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만들어 주마. 쓸모없는 양아치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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